글: 예방육(倪方六)
변씨(卞氏)는 조조(曹操)와의 사이에 4명의 아들을 낳은 외에 2명의 딸도 낳았다: 조절(曹節), 조화(曹華). 조조에게는 모두 7명의 딸이 있었는데, 변부인과의 사이에 낳은 조절, 조화이외에 조헌(曹憲), 청하장공주(淸河長公主), 안양공주(安陽公主), 금향공주(金鄕公主), 임분공주(臨汾公主)가 있었다.
외부에서 모두 알고 있는 일은, 건안18년(213년), 조조는 조헌, 조절, 조화의 3 딸을 함께 한헌제(漢獻帝) 유협(劉協)의 비(妃)로 보냈다는 것이다. 사실, 조조가 바친 것은 이 3명의 딸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딸을 바친 것이다. 이것도 중국봉건역사사상 아주 보기 드문 경우이다.
세 명의 이미 성년이 된 딸들 이외에, 조조에게는 아직도 어린 몇몇 딸들이 있었는데, 이들도 모조리 유협과 '정혼'을 하게 했다. 잠시 입궁시키지 않고, 자신의 집에서 기르지만, 나이가 어느 정도 성장하여 혼인할 때가 되면 입궁시키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자신의 모든 딸을 황제에게 바친 것은 중국고대제왕후궁사상 극히 보기 드문 기록이다. 이런 일은 조조만이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고대 황제의 후궁은 지금의 미인선발대회와 마찬가지로, 후궁을 뽑는 것도 고르고 골랐다. 아무 여자들이나 입궁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조는 권력이 조야를 뒤흔들 정도이니, 국사만 자신의 손아귀에 장악한 것이 아니라, 황제의 성생활도 그가 알아서 처리했다. 당연히 이는 자신의 딸의 혼인과 행복을 걸고 자신의 조정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는데 썼다. 유씨황제를 자신의 손아귀에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를 보면, 조조의 권력욕은 아주 컸음을 알 수 있다.
조헌, 조절, 조화가 입궁할 때, 신분은 모두 "부인(夫人)"이었다. 다음해에 세 딸은 모조리 "귀인(貴人)"으로 승격한다.
유협의 황후는 원래 복수(伏壽)였다. 조조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그녀는 자신의 부친 복완(伏完)에게 밀서를 보내어 조조를 제거하라고 한다. 그런데, 이 일이 조조에게 누설되었다. 조조는 유협을 핍박하여 복황후를 폐위토록 하고, 복수는 유폐되어 죽는다. 조조가 앞장서서 유협의 새 황후를 뽀븐데, 자신의 둘째딸 조절을 황후의 자리에 앉힌다. 그녀가 바로 "헌목조황후(憲穆曹皇后)"이다.
조절이라는 이름은 그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같다. 과거 피휘를 하던 시절에는 보기 드문 사례이다.
조절은 전통윤리를 지키는 보수적인 여인이었다. 그녀는 7년간 황후로 지낸다. <<후한서.황후기하>>(권10)에 따르면, 조비(曹丕)가 화흠(華歆)을 시켜 유협에게 양위하도록 핍박하며, 전국옥새를 내놓으라고 하였다. 조절은 그 말을 듣고 화를 내며, 내놓지 않고, 문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여러번 거절했지만, 계속 사람을 보내왔다. 조절은 어쩔 수 없이 조비가 보낸 사람을 들여보낸다. 그녀는 온 사람의 앞에서 자신의 오빠를 욕하면서 전국옥새를 집어던진다. 그리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천부조이(天不祚爾, 하늘이 너에게 복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조비는 한나라를 대체하여 황제가 된다. 이는 조조가 생전에 이루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했던 숙원을 완성한 것이었다. 황제 유협은 폐위되어 산양공(山陽公)이 되고, 조절은 산양공부인이 된다.
유협의 최후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조위 청룡2년(234년) 삼월, 유협이 사망하니, 향년 54세이다. 그는 한나라 천자의 예로 선릉(禪陵)에 장사지낸다. 이 릉은 하남성 수무현에 있다. 유협이 죽은 후 26년이 지난 경원원년(260년)에 조절이 병사하여, 선릉에 합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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