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문화/중국의 문화

중국 고대명인들의 아명(兒名)

by 중은우시 2009. 8. 3.

글: 창랑지수(滄浪之水)

 

고등학교를 다녔던 친구들이라면 모두 이 사(詞)의 몇구절 - 신기질의 <<영우락.경구북고정회고>>를 기럭할 것이다. "사양초수, 심상항맥, 인도기노증왕(斜陽草樹, 尋常巷陌, 人道寄奴曾往)", "가감회수, 비리사하, 일편신아사고(可堪回首, 狸祠下, 一片神鴉社鼓)", 이 사에 나오는 "기노", "비리"는 사람을 가리킨다. "기노"는 남조 송무제 유유(劉裕)의 아명이고, "비리"는 북위 태무제 척발도의 아명이다. 아명을 얘기하자면 가장 널리 알려진 고대제왕의 아명은 유선(劉禪)의 아명인 "아두(阿斗)"와 명신 조조(曹操)의 아명인 "아만(阿瞞)"일 것이다. 이들 아명은 중국의 독특한 사회문화적 가치를 지닌 이름을 짓고 부르는 습관을 보여준다.

 

아명은 소명(小名), 유명(乳名), 소자(小字)라고도 부른다. 특히 영아가 태어난 후 부모가 지어주는 비정식의 이름을 말한다. 중국전통문화체계에서, 성명은 사람의 가정배경, 출신과 개성요소를 드러내주는 중요한 표지이다. 상(商), 주(周)때, 사람들은 성명을 중시하기 시작한다. 성명은 점차 예의화, 제도화되고, 이름에 대한 각종의 금기와 제한이 나타난다. 상층사회에서는 이름을 짓건 자(字)를 짓건 모두 융중한 의식을 치렀다. 그리고 상호간에 아무렇게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많은 가정에서는 어린 아이에게 아명을 붙여준다. 그리하여 가족과 친한 사람들 사이에서 부르는 칭호로 했다. 아명은 왕왕 아이가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아서, 젖을 먹고 있는 동안에 붙이기 때문에, "유명(乳名)"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사회의 하층평민계급에서는 융중한 이름을 짓거나 자를 짓는 의식을 거행할 권리도 없고 능력도 없기 때문에, 그들이 어려서 지어준 '아명'이 종종 성년이 된 후의 '대명(大名)'이 된다. <<송사. 선거지3, 종학>>에는 "(함순)9년, 무릇 관직이 없는 종실자제가 과거에 응시할때면 처음에 태어나면 유명으로 증거를 삼고 자라면 훈명(訓名)을 쓴다."  이를 보면, 예법에 따라 신생아가 태어난지 3달후에 명명의식을 거행하기전에 "유명"을 먼저 짓는 것이 당시에 이미 보편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명현상은 역사가 오래된 언어습속이다. 유국은(遊國恩) 선생이 고증한 바에 따르면, 아명을 지어주는 풍습은 "양한(兩漢)때 시작하여, 육조(六朝)때 성행했다" 고대문헌에서 아명에 관한 기록은 드물지 않다. 사료에서 아명을 지어준다는 내용이 기록된 것은 진한때부터 시작한다. 예를 들면, 진헌공(晋獻公)의 아명은 "채(虿)"이다. "채"는 전갈이라는 뜻이다. 정장공(鄭庄公)은 출산때 난산이었다. 그리하여 아명을 "오생(寤生)"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어떤 아명은 아이가 강보에 있을 때 겪은 일에서 따왔다. 예를 들면, 동진말기의 대시인 사영운은 순일(旬日)에 출생하였는데, 두치(杜治)의 집에 보내어져 키워졌고, 15살때 본적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아명이 "객아(客兒)"였다. 이외에 봉건사회 상층계급의 여성들도 장기간 집안의 규방에서 생활하여, 바깥에 얼굴을 드러내는 일이 드물었다. 그리하여 아명이 더욱 유행하였다. 다만 이런 아명은 집안에서만 사용했기 때문에, "규명(閨名)"이라고 불렀다. 예를 들어, 한고조의 황후인 여치의 아명은 "아후(娥)"였다. 한무제의 외조모는 아명이 "장아(臧兒)"였고, 한무제의 진황후는 아명이 "아교(阿嬌)"였다. 당나라 수창공주의 아명은 "충낭(蟲娘)"이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상의 아명은 속되고 추하고 천하게 짓는다는 원칙에 따랐다는 것이다. 위로는 천황귀주(天潢貴胄), 왕손공자부터, 아래로는 가마꾼, 장삿꾼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러했다. 이는 사회질서와 생활이상에서 우아하고 듣기좋은 이름을 짓는 것과 전혀 다르다. 이렇게 하여 중국성명문화에서 아명에는 하나의 공통된 특색이 있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주로 어른들이 아이들을 너무나 아낀 나머지, 순조롭고 건강하게 자라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일부러 비천하게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이러한 역반(逆反)의 심리를 이용하여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감추고자 한 것이다. 이런 현상은 지금까지도 많은 어른들이 후손들을 부르는 명칭에서 남아있다. 이렇게 해야 아이가 평안하게 자라고 요괴가 목숨을 앗아가지 않도록 바란 것이다. 물질생활수준, 의료수준이 낮았던 고대에, 미신사상까지 성행하여, 아명을 지을 때 초현실적인 요소가 크게 작용한 것이다. 이런 습속은 한나라 위나라때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영향은 지금까지 미친다. <<홍루몽>>에 왕희봉이 딸의 아명을 짓는데, 유모모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이름을 지어봐라....너희는 농사꾼이다. 가난하고 힘들게 사니, 너같이 빈궁한 사람이 이름을 지어주면 그녀의 명을 누를 수 있을 것이다" 부귀한 사람들이 보기에, 빈천한 사람이 지어주는 이름이 천명(賤名)이다. 그렇게 하면 사를 피하고 병을 몰아낼 수 있다고 보았다. "교저(巧姐)"라는 이름은 이렇게 유래된 것이다. 이 부분의 이야기는 바로 전통적인 습속을 반영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명을 짓는데 가장 자주 보이는 현상은 대체로 아래와 같은 일곱가지이다:

 

첫째, "배항(排行)"으로 이름을 짓는다: 남조 진무릉왕 소엽은 제고제 소도성의 다섯째 아들이다. 그래서 아명이 "아오(阿五)"였다. 양원제 소역은 일곱째였다. 아명이 "칠부(七符)"였다.

 

둘째, 특정의 글자 앞에 통상적으로 쓰는 글자를 붙여서 아명으로 삼는다. 가장 자주 보이는 것은 "아(阿)"를 붙이는 것인데, 유선, 조조등의 아명이 그것이다.

 

셋째, 특정한 글자의 뒤에 통상적으로 쓰는 글자를 붙여서 아명으로 삼는다. 자주 보이는 것은 "노(奴)"나 "아(兒)"를 붙이는 경우가 많다.

 

넷째, 첩자를 써서 아명으로 삼는다: 예를 들면, 소소(小小), 노노(奴奴), 앵앵(鶯鶯), 반반(盼盼)등이 그것이다.

 

다섯째, 사람에게 짐승이름을 쓴다: 예를 들면 공자의 아들은 아명이 "리(鯉)"였다. 사마상여의 아명은 "견자(犬子)"였다. 고개지의 아명은 "호두(虎頭)"였고, 도연명의 아명은 "계구(溪狗)"였으며, 왕안석의 아명은 "환랑(郞)"이었고, 송효종의 아명은 "소양(小羊)"이었다.

 

여섯째, 남자에게 여자이름을 붙인다. 이는 바로 남존여비의 봉건관념이 만들어낸 기괴한 풍습이다. 여성을 동물과 같이 천한 것으로 보았기 땜누이다. 그래서 아예 사내아이에게 여자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일곱째, 여자에게 남자이름을 붙인다. 이것도 역시 중남경녀의식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딸을 낳으면, 아들을 낳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딸의 아명을 가지고 이상한 짓을 벌인다. 즉, 남동생을 부르고, 남동생을 얻기 위함이다.

 

조사가능한 자료에서는 "노(奴)"자를 아명으로 쓴 경우가 가장 많다. "노"자는 중국고대 유명인들이 가장 좋아했던 아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 가장 성행했던 시기는 양진남북조에서 수당오대까지이다. 예를 들어, 서진의 문학가 석숭의 아명은 "제노(齊奴)"이다; 동진의 서예가 왕헌지의 아명은 "관노(官奴)"이다; 권신 오돈의 아명은 "암노(奴)"이다; 남조 송무제 유유의 아명은 "기노(寄奴)"이다; 진후주 진숙보의 아명은 "황노(黃奴)"이다; <<진서>>에서 임충의 아명은 "만노(蠻奴)"라고 적고 있다; <<위서>>에는 이소의 아명이 "진노(眞奴)"라고 적고 있다; <<주사>>에는 왕덕의 아들 왕경의 아명이 "공노(公奴)"라고 적고 있다; <<북사>>에는 노사도의 아명이 "석노(釋奴)"라고 하였다; <<구당서>>에는 이임보의 아명이 "가노(哥奴)"라고 적었다; <<구오대사>>에서 민제의 아명은 "보살노(菩薩奴)"라고 적었다; <<요사>>에는 요성종의 아명이 "문수노(文殊奴)"라고 적었고, 요경종의 넷째아들의 아명은 "현노(賢奴)"라고 적었다.

 

"노"로 아명을 짓는 것에 대하여는 두 가지 에피소드가 전해지는데, 음미할 만하다.

 

1. 당나라 개원20년(732년), 시선 이백은 그의 처 허씨와의 사이에 첫번째 아이를 갖는다. 딸이었다. 아이가 출생할 때 하얀 달이 하늘에 걸려 있었고, 달빛이 온 대지를 비추었다. 이백은 딸의 이름을 "명월노(明月奴)"라고 짓는다. 이백은 일생동안 명월을 사랑했고, 그가 남긴 1천여수의 시에서 4분의 1이 바로 달을 읊은 것이다. 딸에게도 같은 아명을 지어주었다는데서 이백이 달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다고 할 것이다.

 

2. 명나라사람의 필기 <<객좌췌어>>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서율지가 원흉에게 해를 당하였는데, 아들 효사가 임신중이었다. 모친은 나이가 어려서 개가하고 싶어했고, 자식을 낳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침상에서 땅바닥에 떨어지면 아이가 지워질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다듬이방망이로 배를 때리기도 했고, 낙태약을 먹기도 했다. 그래도 태아의 명이 질겨서 태어나니 아명을 "유노(遺奴)"라고 지었다. 서율지의 아들에게 "유노"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바로 모친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이다. 사영운과 마찬가지로 아명에는 그의 인생경력이 담겨 있다.

 

당연히, 현대사회는 물질생활수준과 의료수준이 모두 제고되어서, 유아의 사망률이 아주 낮아졌다. 사람들은 더 이상, 영아가 죽지나 않을까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아명을 지을 때도 초현실적인 신앙요소가 약화되거나 소멸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갈수록 많은 젊은 부모들은 직접 "보보(寶寶)", "보배(寶貝)", "소보(小寶)"와 같은 아명으로 자신의 아이를 부른다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자신의 사랑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이는 우리 시대가 진보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천편일률적인 아명과 비교하자면, 고대가 훨씬 풍부하고 다양했다. 백화제방식의 아명문화는 이에 역사무대에서 철저히 내려간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