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제갈량의 초선차전(草船借箭)의 세가지 유래

중은우시 2009. 1. 12. 17:30

글: 월초(越楚)

 

제갈량이 적벽대전의 전날 밤에 했다는 "초선차전(草船借箭)"은 나관중(羅貫中)의 명저 <<삼국연의>>중에서도 가장 잘만든 이야기중의 하나이다. 나관중은 이를 통하여 거의 신선의 경지에 이른 제갈량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역사상 제갈량이 "초선차전"한 사실은 없다. 나관중이 세가지 원전의 이야기를 끌어모아서 제갈량이 한 것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단순히, 한가지 원전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첫번째 근거: 손권차전(孫權借箭)

 

<<삼국지. 오서. 오주전 제2>>의 배송지의 주석에 <<위략>>을 인용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쓰여 있다: "(손권)이 큰 배를 타고 와서 군대를 살펴봤다. (조조)공은 화살을 마구 쏘게 해서, 화살이 그 배에 가득 떨어졌다. 그리하여 배가 한쪽으로 무게가 몰리자 기울어져서 전복되려고 했다. 손권은 배를 돌리게 하고, 다시 다른 편으로 화살을 맞으니, 화살이 균형을 이루어 배가 균형을 이루었다. 그리고 돌아갔다." 이 사건은 적벽대전이 끝난 지 5년후인 건안18년(213년) 정월에 발생한다. 당시 조조와 손권은 유수(濡須, 지금의 안휘성 소현 서쪽 소호(巢湖)가 장강으로 들어가는입구)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전투초기에 조조의 군대가 대패하여, 병영을 굳게 지키고 나가서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손권이 강에 얕은 안개가 낀 것을 보고는, 큰 배 한 척을 타고 유수에서 조조의 군영앞으로 가서 적진을 관찰했다. 조조는 성격상 의심이 많아서, 감히 나와서 싸우지는 못하고, 명을 내려 화살을 쏘아 오나라 배를 맞추도록 했다. 한쪽편에만 화살을 많이 맞다보니, 배가 기울어서 넘어지려고 했다. 손권은 즉시 뱃머리를 돌리도록 하여, 다른 쪽도 화살을 맞ㄱ ㅔ 했다. 그렇게 되니 양쪽에 맞은 화살이 균형을 이루어 편안히 되돌아올 수 있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손권차전"은 사전에 기획한 것이 아니었고, 그저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초선차전"처럼 미리 짚으로 허수아비를 만들지도 않았다. 그저 직접 큰 배의 나무판을 향해서 쏜 것이며, 아주 우연이 발생한 "목선차전(木船借箭)" 사건인 것이다.

 

두번째 근거: 장순차전(張巡借箭)

 

역사상 진정으로 "짚허수아비(草人)"을 사용하여 화살을 빌린 사람은 당나라때의 명장 장순(張巡)이다. 그가 수양(陽. 지금의 하남성 상구)현령으로 있을 때 반군인 영호조(令狐潮)와 전투를 벌이게 된다. 그때 "초인차전(草人借箭)"의 계책을 사용한다. <<신당서. 장순전>>에 따르면, "성에 화살이 떨어졌다. (장)순은 짚으로 허수아비를 천여개 만들게 한 후에, 검은 옷을 잎히고, 성아래로 늘어뜨리게 했다. 영호조의 병사들이 앞다투어 쏘았다. 나중에서야 지푸라기로 만든 허수아비인 것을 알았다. 허수아비를 끌어올리니, 화살 수십만을 얻었다" 이 사건은 안사(安史, 안록산, 사사명)의 난의 중반에 일어난다. 당시 안록산은 장수 영호조로 하여금 4만가량의 반군을 이끌고 수양성을 공격하게 하는데, 장순은 임시로 모집한 천여명의 수비군으로 결사항전한다. 반군이 계속 공격함에 따라 성안의 화살을 이미 바닥이 났다. 이날 깊은 밤에 장순은 사병들에게 지푸라기로 허수아비를 천여개 만들게 한 후에, 검은 옷을 입힌 후, 밧줄로 성아래에 늘어뜨렸다. 반군은 이를 발견하고, 허수아비를 향하여 화살을 마구 쏘아댄다. 날이 밝고서야 비로소 허수아비인 줄 깨닫게 된다. 수비군은 허수아비를 끌어올려, 수십만개의 화살을 얻게 된다. 다음 날 저녁, 장순은 다시 오백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여전히 밧줄을 통하여 성아래로 내려보낸다. 반군은 이것도 역시 허수아비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비웃으며 신경쓰지도 않는다. 이 오백명은 적이 방비하지 않는 틈을 타서 영호조의 본부를 직접 습격하고, 영호조는 미처 저항할 시간도 업게 된다. 그리하여 수민의 반군은 사방으로 흩어져 물러났다.

 

"장순차전"은 사전에 정교하게 계획된 "초인차전(草人借箭)"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수비하는 중에 사용된 것이고, 또한 선박이 사용되지 않았다.

 

세번째 근거: 주유차전(周瑜借箭)

 

이 세번째 이야기는 바로 "손권차전"의 내용을 '주유'에게 붙인 것이다. 송원교체기에 나온 화본(話本) <<삼국지평화(三國誌評話)>>에서는 "주유는 장막으로 선박을 덮었다. 조조가 화살을 쏘았다. 주유의 배의 왼쪽면에 화살이 박히자, 선원들에게 배를 돌리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오늘쪽면에 화살이 박혔다. 떠나올 때는 배에 화살이 가득 찼다. 주유가 돌아와보니 약 수백만대의 화살을 얻었다. 주유는 기뻐서 말했다: '승상(조조)의 화살에 감사드립니다' 조조는 크게 대노했다." <<삼국지평화>>의 작자는 아마도 주유를 좋아했었나보다. 그리하여 주유로 하여금 "목선차전"의 좋은 역할을 맡게 한 것이다. 그리고 "약 수백만대의 화살을 얻었다"는 것은 이미 소설가의 과장이다. 생각해보라 한 사람이 수십대씩 쏘고, 십만명이 동시에 화살을 쏘아서 맞추어야만 되는 일이다. 그리고 강물에 빠지지도 않아야 한다. 현실에서 이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화살의 무게만 하더라도 수백만대의 화살이 배에 박히면 그 무게 때문에 어지간히 큰 배가 아니고서는 가라앉고 말 것이다.(예를 들어, 화살 1대가 50그램이라고 치면, 3백만대일 때 15톤이 된다)

 

"주유차전"의 문학본에는 아직 "초인(草人)"이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이것은 사전에 기획한 "목선차전"이다. 그 스토리는 이미 <<삼국연의>>의 제갈량의 "초전차전"과 거의 비슷하게 접근했다.

 

역사상 손권의 전혀 의도하지 않은 '목선수전(木船受箭)'이 장순의 '초인차전'을 거쳐, 문학작품에서 주유의 '목선차전'으로 발전한다. 나관중은 아마도 바로 이 세 가지 이야기를 근거로 하여, <<삼국연의>>에서 제갈량의 "초선차전"의 생생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