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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한국/한중관계

안중근: 하르빈의 총성

by 중은우시 2009. 7. 24.

글: 설이(雪珥)

 

1909년 10월 26일, 하르빈의 몇 발의 총성은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다: 일본의 신임 추밀원 의장, 전 수상, 전 조선총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 암살당한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중요한 외교적 사명을 띄고 왔었다. 그는 러시아 재정대신 M. Kokovtsoff와 만주철로등 일련의 중국동북지역 권익문제에 대하여 회담을 하려고 온 것이었다.

 

십자형의 총탄

 

"제0차세계대전"이라고도 불리우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비록 승리하기는 했지만, 전체 만주지역을 집어삼킬 힘은 없었다. 중국만주지역은 러일이 남북으로 분할하는 국면이었따. 청나라는 여전히 힘들게 노력하여 러시아와 일본에 항거하고 있었다. 1906년 청나라는 정치체제를 포함한 전면개혁에 착수하고, 만주의 개발과 개방은 서태후를 포함한 청나라조정에서 아주 중시하던 업무였다. 간부체제개혁의 시범을 앞장서서 했을 뿐아니라, 행정효율을 제고시키고자 했고, 200여년간 금지(禁地)이던 대청제국의 "용흥지지(龍興之地)"에 대한 진입금지를 해제했다. 정부의 우대정책하에서 직예(하북)와 산동에서는 "틈관동(闖關東)"의 붐이 인다. 많은 인구가 변방으로 이주했다; 농촌노동력부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청나라정부는 심지어 이전에 몰래 건너와서 황무지를 개발하던 조선의 이주민에 대하여도 관용적인 이민정책을 취했다. 중국국적만 취득하면, 이전의 과오를 묻지 않으며, 혜택이 많은 수전(授田) 정책을 썼다.

 

외교적으로, 대청제국정부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전통사고를 가지고, 원세개, 당소의등의 주재하에, 적극적으로 중국만주와 러시아동부지역으로 확장하지만, 영토야심은 없던 미국자본과 전략적 파트너관계를 수립하여 미국자본을 끌어들여 만주일대를 개발하고자 했다. 지연정치와 경제발전의 이중적인 고려에 따라, 미국정부는 "만주철로중립화"를 요구하고, 일본과 러시아 양국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중국의 영토주권완정과 만주문호개방을 확보하도록 요구한 것이다. 독일의 지지하에, 독일, 미국, 중국의 삼국동맹도 적극적으로 이를 추진했다. 비록 결국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런 미묘한 국제간의 세력균형은 확실히 힘이 미약한 청나라정부로 하여금 러시아, 일본과 교섭할 거리를 마련해 주었다.

 

막 전쟁의 피바람에서 벗어난 러시아와 일본은 중국만주에서 공동의 이익에 대한 위협을 받으면서, 극적으로 적국에서 우방으로 바뀌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와 Kokovtsoff 두 사람의 회담은 바로 이렇게 복잡한 국제적인 압력하에서 어떻게 협조하고 대응할 것인지를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러시아정부는 심지어 영화촬영팀까지 파견해서, 이번 주요한 고위층회담을 촬영했다.

 

10월 26일, 러시아 동철로회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위하여 준비한 전용열차가, 경비가 삼엄한 하르빈기차역으로 들어왔다. 대청정부와 러시아 동철로공사는 공동으로 주재하여 기차역에서 융중한 환영식을 거행했다. 중국측에서는 하르빈 세관을 주관하는 "빈강관도(濱江關道)" 시조기(施肇基)를 우두머리로 하여, 관민대표들이 참석한 외에 신군으로 구성된 청군의장대가 기차역에 정렬해 있었다. 러시아영사는 러시아측 관민과 2개 소대의 동철로 경위대를 데려왔다. 그들은 미리 도착해 있던 Kokovfsoff를 호위하며, 일본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용열차가 역으로 들어와서 선 후에, Kokovtsoff가 열차에 올라가서 이토 히로부미를 환영했다. 두 사람은 25분간에 걸친 제1차 비밀회담을 가진다. 그후, Kokovtsoff는 러시아국경수호군단 명예군단당의 명의로 이토 히로부미가 의장대 및 환영인파를 사열하기를 청했다.

 

시조기가 특별히 배치하여, 전용열차에 가장 가까이 정렬해 있던 것은 러시아군 의장대가 아니라, 청나라군 의장대였다. 이렇게 하여 청나라가 '제1지주'임을 명확히 한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시조기와 악수를 하고,청나라 의장대를 사열했다. 그리고 러시아군 의장대를 사열하면서 중국, 러시아, 일본의 상인과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끝까지 걸어갔다 되돌아오려는 순간에, 일본상인백성들의 무리 속에서 돌연 압설모(鴨舌帽)를 쓰고, 양복을 입은 왜소한 청년이 뛰쳐나와 권총을 꺼내들고는 러시아군의 틈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서 3발을 쏘았고, 모조리 명중했따. 그후, 그는 다시 이토 히로부미의 주변에 있는 일본관리들을 향하여 4발을 쏘았고, 4명의 관리가 총을 맞았다.

 

돌연한 변고에, 플랫폼에 서 있던 모든 사람은 멍해 졌다. 영화촬영기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고, 이 역사적 사건의 전모를 그대로 기록했다. 이토 히로부키가 총에 맞은 후, Kokovtsoff의 손을 붙잡고 땅바닥에 웅크린다. 정신이 든 러시아군경은 이 자객을 향하여 달려간다. 그는 도망치지 않고, 담담히 권총을 버리고, 러시아어로 소리쳤다: "꼬레아우라!(조선만세!)" 그후에 담담하게 체포에 응했다.

 

자객의 총탄은 모두 끝부분을 갈라서, 십자형의 홈을 팠다. 그리하여 그 살상력은 10년전에 헤이그협약에서 사용금지된 덤덤판(Dumdums)을 초과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치명적인 총상을 입고, 전용열차로 옮겨진지 몇분만에 사망하고 만다.

 

"대한의병"의 그후

 

현장에서 체포된 자객은 조선인이고 이름이 안중근(安重根)이다. 항일무장 "대한의병"의 중요인물이며, 참모중장, 특파독립대장 및 러시아령지구사령관이었다. 안중근은 천주교도이며 무술고수였다. 막 이립(而立, 30)의 나이였다(1879년생). 일찌기 부대를 이끌고 일본군과 격전을 벌인 바 있고, 전투에서 패해한 후에는 자살순국하려는 생각도 가졌으나, 동지들이 말리는 바람이 러시아가 점령한 극동지역으로 숨어들어 이번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조직한다.

 

사건발생후, 러시아당국은 신속히 하르빈에서 대대적인 체포작전을 벌여, 안중근의 근 30명에 이르는 동료들이 체포된다. 이들은 일본에 인도된다. 이 사건은 비록 러시아가 강저한 동청철로보호지에서 일어났지만, 어쨌든 청나라영토이다. 당시에는 중국-일본간의 "간도"를 둘러싼 주권귀속다툼이 있었고, 만주로광산개발권을 둘러싸고 오랫동안 다툼이 있었다. 중국은 간도의 주권은 지켰지만, 도로광산권익은 많은 손실을 보았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다시 한번 일본에 압력을 가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시조기의 처리는 상당히 빠르면서도 노련했다. 그가 처음 내린 명령은 바로 부가전 전보국에 모든 대외전보의 발송을 중단하라고 하고, 정보를 전면적으로 통제했다. 동시에, 그는 북경 외무부에 긴급보고를 해서, 이 사건이 명확히 조사완결되기 전에는 여하한 성명도 발표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한다: "만일 누군가가 이 일에 대하여 묻는다면, 정부는 절대 '보호가 완전하지 못했다'는 류의 말로 사죄해서 나중에 일본인들에게 구실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동시에, 시조기는 여러 측면에서 일본 러시아와 심문에 참여하여, 안중근의 진술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목적은 나라를 위하여 복수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원래의 계획은 하르빈에 들어오기 전에 구부러진 곳에서 강제로 차에 올라가서 암살하는 것이었는데, 전용열차의 정확한 운행시간을 확보하기 어렵고, '열차가 중국국내에 있어 중국관리들이 연루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나중에 기차역에서 러시아군대의 중간에서 습격하기로 바꾸었다"(시조기 회고록)는 사실을 알았다. 이러한 상황이 밝혀진 후, 시조기는 바로 외무부에 전통으로 보고한다. 동시에 미국에 여러해동안 유학하여 영어실력이 상당하였으므로, 영문뉴스원고도 만들어서 함께 보낸다. 그리고 외무부는 이를 북경의 영문매체에 싣는다. 각 매체에 이러한 내용이 실린 후에 시조기는 비로소 부가전 전보국에 정상적인 전보발송을 재개하도록 지시한다. 이렇게 하여 발언권의 기선을 제압했고, 일본인들이 "중국측의 보도에 대하여 반박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일본측은 이 사건에 대하여 전혀 항의를 하지 못했다' 이 사건은 중국근대사상 비교적 손쉽게 해결된 외교위기중의 하나이다.

 

일본의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은 안중근사건에 대하여 재판을 진행한다. 세계여론이 모두 주목했다. 일본은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안중근에게 두 명의 일본변호사를 붙여주었을 뿐아니라, 영국변호사 1명과 러시아변호사 1명도 변호에 참가할 수 있게 허용한다. 안중근은 암살행동에 대하여는 스스로 모두 인정했다. 그러나, 자신은 테러리스트가 아니고, "대한의병"의 고위장교이니, 전쟁포로로 취급해달라고 요구한다. 안중근은 법정에서도 대거 '동양평화'를 호소하고, 이토 히로부미가 동양평화를 파괴하고 일본천황의 성유를 어긴 '역적'이라고 질책했다.

 

이 항일영웅은 일본헌병, 법관등으로부터 크게 존경받는다. 일부 일본인들은 심지어 도처에 다니면서 그가 사형을 받지 않게 해달라고 활동했다. 안중근은 옥중에서도 우대를 받아서 서신과 저작을 계속할 수 있었다. 심지어 자주 일본헌병들을 위하여 글을 써서 기념으로 남겨주었다. 이들 글은 왕왕 문화재경매시에 진품으로 취급되곤 한다. 1910년 3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당한지 딱 5개월후에, 안중근은 여순 일본러시아감옥에서 교수형이 집행된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여기에서도 발휘된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는데, 이것은 오히려 대한제국의 멸망을 가속화시킨다. 그리고 청나라의 "만주대개발" 노력을 대거 감쇄시킨다. 조선합병에 대하여 원래 일본내부에는 강, 온의 양파가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극력 온건파의 주장, 즉 시기를 늦추자는 주장을 펼쳤다. 이유는 이 지역의 국제적인 힘의 균형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열강들 중에서 적을 너무 많이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양파의 의견충돌이 날로 심해졌고, 이토 히로부미의 명망으로도 조선총감의 자리를 지켜낼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1909년 5월, 조선총감의 직을 사임하고, 일본본토로 돌아가서 추밀원 의장이 되었다. 1910년 8월, 내부견제세력이 사라진 일본은 마침내 대한제국을 합병해버리고 만다.

 

청나라와 미국이 가장 중요하게 보았던 것은 "만주철로중립화"였다. 이토 히로부미와 Kokovtsoff는 각각 일본, 러시아 양국국내에 있는 소수의 '비둘기파'였다. 그들은 각자의 철로를 미국에 매각하는데 동의했다. 만일 이토 히로부미가 죽지 않았다면, 미국의 역량이 아마도 만주지역에 더 많이 개입되었을지 모른다. 암살사건이후, 만주철로중립화는 철저히 실패하고, 일본과 러시아 두 나라는 독특한 '전략파트너관계'를 수립하고, 공동으로 만주를 공고히 점거한다.

 

이 모든 것은 아마도 모두 피끓는 조선의 영웅들이 전혀 예견하지 못했던 결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