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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한국/한중관계

임진왜란/정유재란시 명나라원군의 장수들의 이후 운명은?

by 중은우시 2009. 8. 21.

글: 도단방(陶短房)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시에 명나라는 조선에 원군을 파견했다. 그런데, 원군을 지휘했던 장수들은 대부분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였다.

 

임진왜란(1592)때는 병부시랑 송응창(宋應昌)이 경략(經略)이 되고, 이여송(李如松)이 총병관(總兵官), 이여백(李如柏), 이여매(李如梅)가 부총병관이 되었다.

 

그중 송응창은 항주사람으로 문인출신이다. 나중에 우도어사에 오르고, 1606년에 70세의 고령으로 병사하니, 선종(善終)했다고 할 수 있다.

 

이여송등 세 명은 명나라때의 유명한 장군이며, 요동총병관이었던 이성량(李成梁)의 아들들이다. 그중 이여송은 1598년 요동에서 오랑캐와 싸우다가 전사한다. 이여매가 이여송의 뒤를 잇는데, 다음 해에 적을 두려워해서 전투를 피한 죄로 삭탈관직된다. 이여백은 1619년에 명나라와 누르하치간에 벌어진 살이호(薩爾滸)전투에서 전군이 패배하고 퇴각한다. 이여백은 일찌기 누르하치의 조카딸을 취한 적이 있어 의심을 받아 파면된다.

 

정유재란(1597)때는 규모가 더욱 컸따. 양호(楊鎬)를 경략조선군무(經略朝鮮軍務)로 하고, 형개(邢)를 경략어왜(經略御倭)로 하며, 마귀(麻貴)를 총병관, 진린(陳璘), 두송(杜松), 유정(劉鋌), 등자룡(鄧子龍)을 대장으로 삼았다.

 

양호는 1619년 병부좌시랑, 요동경략으로써, 병력을 4로로 나누어 누르하치를 공격하지만, 살이호에서 대패한다. 그는 관직을 박탈당하고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간다. 1629년 후금의 병사들이 산해관으로 들어오고, 원숭환이 반간계에 걸려 사망한다. 숭정제는 사기를 북돋우기 위하여, 양호를 처결해 버린다.

 

형개는 나중에 병부상서에 오르는데, 당쟁으로 쫓겨난다.

 

마귀는 1618년, 요동에서 공을 세운 후,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난다. 그는 대동(大同)사람으로 당시에 서북제일명장으로 불리웠다. 이성량과 더불어 동이서마(東李西麻)라고 나란히 칭해졌다.

 

진린은 광동(廣東)의 건장이다. 대포를 잘 썼다. 정유재란후 그는 귀주(貴州) 일대에서 묘족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투입된다. 실로 대재소용(大材小用)이라고 할 만하다.

 

등자룡은 절강 사람인데, 1598년 노량해전때 전사한다.

 

가장 비참한 것은 두송과 <<치가등청정서(致加藤淸正書, 카토 마사요시에 보내는 글)>>로 유명한 유정이다. 경략인 양호의 잘못된 지휘로, 그들은 살이호대전에서 병력이 분산되어, 각각 철배산과 살이호에서 전사하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