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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논쟁/조조무덤논쟁

서고혈: 조조의 무덤으로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by 중은우시 2010. 6. 15.

글: 황진운(黃震雲)

 

2009년 12월 27일, 하남성문물고고연구소는 6가지 증거를 내세우며, 북경에서 조조의 무덤 고릉(高陵)을 발견했다고 선포했다. 그후 진위여부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다. 논쟁과정에서 각자의 이유와 결론도 더욱 분명해졌다. 그렇지만 아직도 논리나 증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핵심은 여전히 석패(石牌) "위무왕상소용격호대극(魏武王常所用格虎大戟)"이 서릉혈이 조조의 묘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냐의 점이다. 이에 대하여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첫째, '위무왕상소용격호대극'과 '위무왕상소용격호대도(魏武王常所用格虎大刀)'의 두 석패에 관한 것이다. 필자는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의 연도포럼에서 나온 주장에 동의한다: 참고로 할 수는 있으나, 증거로 삼을 수는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대극(大戟)'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 즉, 이는 한어언어습관에 맞지 않는다. 한나라때 양웅의 <<방언>>권9를 보면, "극(戟), 초나라에서 결(釨)을 부르는 말이다. 무릇 극이라 함은 날(刃)이 없는 것이며, 진(秦)과 진(晋)사이에서는 결(釨)이라고도 하고, 혹은 인(鏔)이라고 했다. 오(吳)와 양(揚)의 사이에서는 과(戈)라고 불렀다. 동제진진(東齊秦晋) 사이에서는 그중 큰 것을 만호(鏝胡)라고 불렀다. 구부러진 것은 구(鉤)라고 하였다."  이 글의 뜻은 결국 '대극'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당연히 '만호'라고 되었어야 한다는 말이다. '대극'이라는 용어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위의 글의 다음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이어진다: "삼인지(三刃枝)를 남초완영(南楚宛郢)에서는 언극(匽戟)이라고 불렀다. 그 자루는 관서에서는 비(柲)라고 했는데, 수(殳)라고도 했다." 이를 보면 극은 크고 작은 형태에 따라서 명칭이 각각 따로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대극'이라는 것은 누구의 말인가? <<방언>>에 따르면, 조조부자가 쓰던 말은 진진의 말이다. 조조부자의 작품을 분석하면 상고음계에 속하고, 개별적인 글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상의 기록에 따르면, '대극'이라는 글이 나오는 것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2. '위무왕(魏武王)'이라는 말도 맞지 않는다. 조조는 생전에 위왕(魏王)이고, 사후에는 무왕(武王)이라는 시호를 받는다. 모두 글자 1자의 뒤에 왕을 붙인다. 봉호에 다시 시호를 붙인 다음에 왕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없다. 두 글자를 같이 붙여서 부르는 것은 예법에도 어긋난다. 나중에 항간에서 부르는 것은 별론으로 한다. 만일 왕이라고 칭하려면 당연히 '한위왕(漢魏王)'이라고 했어야 한다. 왜냐하면 조조는 생전에 한나라의 신하로 자처했기 때문이다. 절대로 자기가 죽은 후에 난신적자로 몰릴 석패를 남겨두지 않았을 것이다. 일반적인 상황하에서라면 공식자료에 봉호와 시호를 서로 붙여서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3. '격호(格虎)'라는 것은 근거없는 말이다. 어떤 문헌에도 조조가 호랑이를 잡았다는 말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상격호(常格虎)'인가. 만일, 상용무기라면 단지 1개여야 한다. 어떻게 2개에 모두 '상'자를 붙인단 말인가. 이것은 조조가 자주 호랑이를 잡는데, 한손에는 극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도를 들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어찌 둘 다 '상'자를 붙인다는 말인가. 2010년에 새로 발굴한 후에 나타난 것은 아마도 역시 위무왕이 항상 썼던 '상소용장서순(常所用長犀盾)'이 나왔다. 군왕이 어찌 방패(盾)를 든단 말인가?

 

둘째, 묘안에서 나온 한나라때의 화상석(畵像石)에 관한 것이다.

 

안양(安陽)에서 두 개의 한나라때 화상석이 출토되었다. 우리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근100년동안 한나라때 묘장은 많이 발굴되었고, 화상석도 수만개 나왔다. 묘주인의 지위는 2천석이상인 경우가 거의 없다. 게다가 1, 2개뿐인 경우도 없다. 처음에 글을 써서 기고할 때 필자가 지적한 바 있다. 그 문자가 한나라때 글같지 않을 뿐아니라, 조조의 수하에는 문인이 그렇게 많았는데, 어떻게 이런 수준으로 글을 썼단 말인가? 화상도 조잡하고, 해하지전에 대하여 아무렇게나 직무명칭을 몇개 적어놓았다. 이것은 확실히 '무중생유'의 혐의가 짙다. 게다가 하나는 북위의 원밀의 묘에서 출토된 것과 도상이 비슷하다. 그것은 현재 미국에 있다. 그러므로, 한나라때의 화상석을 가지고 증거로 삼는 것은 부족하다. 2010년 발굴후에 다시 수만개의 부서진 화상석이 나왔는데, 이것은 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만일 이천석이하의 하급관리라면 몰라도..그런데 돌연 수만개의 조각이 그것도 부서져서 나오다니, 우리로서는 북망산 아래의 고수왕 선생을 생각지 않을 수 엇다. 이것은 일종의 인위적인 조작이 아닌가? 서고혈묘장은 불규칙하고 아주 엉성하여, 왕후묘장과 관련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0년 6월 12일의 발굴결과는 묘주인의 얼굴이 망가졌고, 잘려나갔다는 것인데. 이것은 더더구나 불가능하다. 사서 필기에 이런 기록은 없다. 고고인원들은 '능원이 장방형이고, 묘앞에 광장이 있으며, 조조생전의 전조후침(前朝後寢)의 궁전건축배치를 모방한 것같다'. 이것은 더더구나 말이 되지 않는다. 주문왕때로부터 묘지는 생전과 같이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모방했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가장 가소로운 것은 침묘(寢廟)의 구조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앞부분은 종묘이고 후부분이 침소인 것이다. 전조후침이라는 것은 없다. 한고조이후에 이미 침묘는 구분했다.

 

셋째, 조조의 생전기록과 맞지 않는다. 문헌을 근거로 하자면, 서릉묘는 조조와는 관계가 없다. <<삼국지.무제기>>의 기록에 따르면, 건안23년(218년) 육월, 조조는 조서를 내려서 자신의 죽은 후의 일에 대하여 지시한다: 예로부터 장지는 반드시 척박한 땅이어야 한다. 서문표사당의 언덕위에 묘를 만들고, 높은 곳을 기반으로 삼고 봉토를 하거나 나무를 심지 말라. <<주례>>에 따르면 군주의 무덤이 있으면 좌우에 제후의 무덤을 두고 경대부의 무덤은 뒤에 둔다. 한나라의 제도에도 이런 배장묘가 있어, 공경대신중 공로가 있는 자들은 무덤 곁에 배장하도록 하려면, 부지를 넓게 잡아서 모두 만들 수 있도록 하라." 즉, 조조의 묘지는 높은 곳이다. 조비가 쓴 <<무제애책문>>에 따르면, 조조의 영구가 "이 궁정을 버리고, 저 산으로 갔다." 즉, 산의 곁이나 산의 아래이지 지하는 아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풍수에도 맞는다. 조식은 <<무제뢰>>를 썼는데, 글에서 조조는 확실히 서릉에 매장했다고 한다. 여기서 능은 일반적으로 산릉(山陵)을 말한다. 육기가 저작랑으로 있을 때, 황실비각의 역사자료에서 조조의 유령을 봤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쓴 <<조위무제문>>의 서문에 이렇게 털어놓았다. 조조는 유언에서 그를 '업의 서쪽언덕위에 서문표사당에 가까운 곳에 매장하며, 금은진보를 묻지 말라"고 하였다고 한다. 서쪽언덕은 바로 서릉이다. 그러므로 조조의 묘지가 지하에 있으면 안된다.

 

<<진서.예제>>에서는 '금이주보동철(金珥珠寶銅鐵)같은 물건은 보낼 수 없다. 문제(文帝)는 이를 지켜서 증가시키지 않았다. 선양을 받고, 금새(金璽)를 새기고, 존호를 추가했지만, 묘도를 열지 않았고, 옥새를 묘도에 숨겼다. 이를 통하여 능안에 금은주보가 없다는 것을 밝혔다" 여기서 두 가지 문제가 나타난다. (1) '동철'과 같은 물건을 넣지 않았는데, 어떻게 대극, 대도를 안에 넣을 수 있겠는가? 금은주보도 들어갈 수 없는데, 어떻게 옥주가 나오는가? 한나라때 묘장에서 입과 항문을 막는 것은 매미등 작은 동물모양인 것은 많은데, 어떻게 여기는 옥주가 많이 나오는가? (2) 조조가 죽은 후에 조비가 존호를 추가하였을 때도 묘도를 열지 못하고, 그 앞에 석실을 만들어 옥새를 보관했다는 것인다. 이것은 한번 파보면 아는 것이다. 혹시 이미 팠지만 못찾은 것인가? 아니면 아예 파려고 하지 않는 것인가? 봉황TV에서 토론을 할 때, 하남에서 온 사람들에게 면전에서 물어봤지만 그들은 답변하지 않았다. 하남문화재계통의 사람은 문헌을 가지고 의문을 제기하자, 그저 이렇게 대답했다: 너는 고고학을 모르니, 나에게는 고고학지식을 보급시켜줄 의무가 없다. 그리고 고고학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면: 너는 문헌을 모르니, 문헌이나 잘 찾아봐라고 대답한다. 우리가 할 말을 잃게 만든다. 마치 가지고 노는 것같다.

 

넷째, DNA검사에 관하여

 

2001년 3월, 필자는 외국의 유전자연구자료에 관하여 읽고는 <<인류DNA다태성분석과 민족학연구>>라는 글을 써서 발표했다. 필자는 이것도 쉽게 오해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한다. 현재 고고학계에서는 민족을 종족으로 보고 비교한다. 그러나, 사실상 제왕성씨들 예를 들어, 유씨, 이씨는 모두 문화관계이지 혈연관계가 아니다. 즉, 항백씨가 유씨로 개성한 것처럼, 유씨와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다. 조조의 가족도 이렇다. 만일 할 수 있다면 박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후예, 혹은 하후씨족을 찾는 것이다. 민족과 종족의 개념은 분리해야 한다. 유전인자는 검사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모두 인정할 것이다. 서릉묘의 남성시신의 곁에 있는 여성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따지지 말자. 그저 이 여인의 나이가 얼마인지등 과학적인 검사만 해보자. 진실만이 사람을 설득시킬 수 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안양의 묘에서 200여건의 문헌을 얻어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은 모조리 민간 와도(瓦陶) 혹은 도저권(陶猪圈)이다. 관요나 혹은 정교한 물건은 없다. 중국고고학회의 이사장인 서평방은 이렇게 말한다: 도저권은 가정에서 돼지를 길렀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전에 일부 마을의 유적지에서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한나라때, '죽음을 삶과 같이 보았다"는 후장의 풍속을 반영한다. 그러나, 위무왕의 묘에 '죽음을 삶과 같이 보았고' 도저권이 출토되는 것이 가능한가? 어제 생방송에서 현장의 하남성 문화재계통의 인사는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런 것이 어떻게 조조의 왕의 신분에 부합되는가? 2010년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포럼에서 "목묵행청(木墨行淸)의 간독(簡牘)이 나왔다. 여기서 '행청'을 화장실로 해석하기도 했다. 조조묘에 화장실이 나온다는 것도 웃긴다. 내용이 무슨 뜻이건 간에 간독의 연대는 측정해야할 것이 아닌가? 왜 모든 출토문헌을 내놓지 않는 것인가?

 

얼굴을 마주하고 토론하는 것이건 인터넷에서 토론하는 것이건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흘렀는데도 위에서 언급한 의문들은 전혀 해결되지 않고 있다. 어떤 네티즌은 말한다: 초나라 묘에서 일찌기 오왕부차모와 월왕구천검이 나왔는데, 설마 그것이 부차와 구천의 묘란 말인가?" 확실히 현재 조조의 묘라고 인정할 증거는 부족하다. 현재의 증거만으로는 설득력이 없다. 건륭,가경제때의 학자들도 한가지 증거만 있고 유력한 반증이 있으면 성립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왜 오늘날의 우리는 제대로 토론을 하지 않는 것인가? 사실여부가 아직 확정되지도 않았는데, 힘들여 여론조작을 하고, 꽌시를 이용하려고 하고, 참관하고 축하행사하고, 누군가를 비난하고, 이런 것들은 모두 정확한 길이 아니다.

 

조조묘의 진위는 학술적으로 더욱 연구해보아야할 문제이다. 과학적인 고고학의 창시자인 이제 선생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고고학은 광범위하게 증거를 모아야 한다고. 설마 이 말이 틀린 말인가? 2010년 서평방은 북경에서 거행된 "2009년 전국10대고고학신발견"에 대한 평가회에서, 다시 한번 조조무덤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고고발굴은 반드시 도굴에 의한 간섭이 없는 상황하에서 비로소 실재적인 물건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상소용"은 물건과 의복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것은 최고통치자가 그의 신하나 친척에게 하사하는 경우가 동한시대에 자주 있었다. <<후한서>>에도 이런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이들 물건은 그저 묘주인이 위무왕으로부터 하사받은 후, 아주 귀하게 여겨서 자신이 죽은 후에도 곁에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서평방은 말한다: 이 묘를 '서고혈'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 그러나 만일 지금 조조무덤이라고 규정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많다.

 

북경고궁박물원 장충배 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고릉은 투표로 뽑혔다. 그러나 이것이 토론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투표를 한다면 그저 투표의 결과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의 주요책임자는 반복하여 조조무덤이라는 것은 결론이 아니고, 인식이라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왜 서고혈이 조조묘가 되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가려는 길이 행정노선이고, 시장이 나서고, 문화재국이 따라가기 때문이다. 학술행정화는 이번 무덤의 성격결정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최근 들어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의 한 연구원의 블로그를 보았다. 그는 아주 난감해하고 있었다. 이 무덤은 일찌감치 발굴을 완료했는데, 왜 갑자기 생방송발굴을 한다고 난리인가? 이 묘는 도대체 언제까지 발굴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