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호각조(胡覺照)
하남 안양에서 "조조묘"가 발견된후 반년동안, 긍정론과 부정론간의 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단지 긍정론이 배경을 장악하고 있어, 자연히 여론의 우세를 점하고 있다. 증거가 하나도 나오기도 전에 미리 생쌀은 익어서 밥이 되었다. 그리하여 맞아도 맞고, 틀려도 맞아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모든 일은 이치에 맞아야 한다. 권세, 엘리트와 금전이 함께 얽혀 있는 조조묘가 세상에 나왔을 때도 여전히 천하인들의 목소리를 다 막을 수는 없었다. 긍정파들이 도저히 대답하지 못하는 수 많은 문제가 나오고 있다. 결국 역사의 심판을 벗어날 수는 없다. 이런 자신감에 힘입어 여기에서 의문점들을 내놓기로 한다.
1. 유경주 선생은 논리가 없는 사람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가?
하남 안양에서 대묘(大墓)를 발굴했다. 사회과학원 학부위원겸 고고연구소 전 소장인 유경주 선생은 즉시 3가지 이유를 내세워 조조묘로 인정했다. "첫째, 이 묘는 안양현에 있고, 북쪽이 업성, 즉 조조의 왕도이다. 중국고대의 관례에 따르면, 제왕은 죽은 후에 수도부근에 묻혔다. 이 묘는 그의 신분에 부합한다. 둘째, 이 묘의 규격은 상당히 크다 이런 묘는 고위등급이다. 왕묘이거나 고위급 귀족의 묘이다. 셋째, 출토된 물건이 그의 시대이다. 한 시대는 한 시대의 문화가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현재는 플라스틱을 쓰지만, 수천년전에는 플라스틱이 없고 자기를 썼다. 그것은 동한의 이치이다. 조조시대의 물건은 바로 동한시대의 것이다"
세 가지 근거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첫째와 둘째는 서로 모순된다. 첫째에 따르면 조조는 낙양에서 죽었지, 업성에서 죽지 않았다. 유경주 선생이 말한 대로라면, "중국고대의 관례에 따르면, 제왕은 죽은 이후에 수도부근에 매장된다" 그렇다면, 조조묘는 낙양부근이 되어야지, 안양부근이 되어서는 안된다. 안양에서 발견된 것은 분명히 조조의 묘가 아닐 것이다. 둘째, 셋째 근거는 서로 배제할 수가 없고, 전혀 배타성을 갖추지 못했다. 이것만으로는 조조가 묘주인이라는 판단을 도저히 할 수가 없다. 단지 이런 사이비의 근거를 가지고 자신이 하고싶은대로 결론을 내린 것일 뿐이다.
유경주 선생의 사고방식대로라면, 묘주는 조조로 반드시 확정될 수가 없다. 다른 사람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 대상자만 한무더기 내놓을 수 있다. 수많은 유골들이 유경주 선생의 3개 조건에 부합한다. 예를 들어, 조조의 여러 부하와 아들, 조카들이 있다. 조조보다 먼저 죽은 곽가, 조앙, 조안민, 조충, 하후연, 순욱, 순유, 전위등이 그들이다. 조조보다 뒤에 죽은 사람으로도 조인, 조홍, 하후돈, 장료, 장합, 조진등이 있다. 그리고 이미 다른 곳에 매장된 것으로 확인된 조식도 여전히 유경주 선생의 조건에 부합한다. 다시 시대를 약간 앞으로 혹은 약간 뒤로 넓힌다면, 이곳에 묻힐 수 있는 왕후장상은 또 얼마나 될 것인가? 그들이 모두 묘주인으로 확정된다면, 이곳은 공동묘지일 것이다.
2. '위무왕상소용격호대극' 위무왕상소용격호대도'같은 류는 조조가 상용하던 무기인가?
조조는 활쏘기의 명수였다. 하루에 63마리의 새를 잡은 기록이 있다. 그러나 호랑이를 잡았다는 기록은 없다. 그가 절대 이런 리스크를 감내할 이유가 없다. 더더구나 '상소용'이라고는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생전에 쓰지도 않던 무기를, 어떻게 죽은 후에 지하에 묻을 수 있겠는가?
3. 조조무덤에 배장된 두 명의 여인은 누구인가?
조조가 살았을 때 유언을 남긴 바 있다: 후궁비빈들은 고생을 많이 했으니, 조비에게 잘 대해주라고 하고, 동작대에 살게 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자를 순장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런데, 묘장에는 두 명의 배장된 여인이 있고, 하나는 4,5십세, 다른 하나는 2십여세이다. 긜고 두골이 모두 묘안에 있다. 긍정파에서는 사,오십세된 두개골의 주인은 변씨라고 한다 .그러나, 변씨는 죽었을 때 이미 칠십세이다. 두 개의 연령이 다른 두개골이 있고, 칠십세된 두개골은 찾지를 못했다. 설마 이것은 변씨의 노년, 중년, 청년의 세 시기가 모두 함께 묻혔다는 말인가?
고대이건 지금이건, 중국에는 배장,합장의 습속이 있다. 다만 모두 하나의 묘갱안에 두지는 않고, 멀지 않은 곳에 배장한다. 보통의 합장인 경우에도 두 개의 묘혈이 있다. 중간에는 격자벽을 두게 된다. 고급의 묘갱에 3개의 두개골이 발견된다면 이것을 배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조조가 이정도로 근검절약했던가?
4. 조조의 사후에 무왕의 시호를 받았는가, 위무왕의 시호를 받았는가?
위무왕이라는 세 글자는 깊이 연구해볼만하다. 위(魏)는 봉지(封地)이다. 무(武)는 공덕을 가리키고, 왕은 작위이다. 조조는 생전에 위왕에 봉해졌다. 위는 봉지이고, 왕은 작위이다. 사후에 위왕은 조비가 승계했다. 조조의 봉지도 조비에게 넘어갔다. 그러므로, 조조는 위무왕이 될 수 없고, 무왕이 될 수밖에 없다. 고대인들은 시호에 아주 엄격했다. 함부로 붙이거나 부를 수 없었다. 무왕의 앞에 위를 아무렇게나 추가할 수 없는 것이다. 위무왕이라는 세 글자로 보고, 이 묘혈이 조조묘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오호십육국시대에 요양(姚襄)은 '위무왕'에 추봉된 적이 있다. 왜 요양묘는 될 수 없는가?
5. 견씨(甄氏)는 조조묘에 배장될 수 없는가?
조비의 처인 견씨는 총애를 잃고 죽음을 당했다. 사후에 업성부근에 묻혔다. 오늘날의 영지촌이다. 조예가 즉위하고 생모 견씨를 문소황후에 추존한다. 그리고는 자그마한 무덤에 불만을 갖고, 다시 새로운 능묘를 건축하는데, 조양릉이다. 새로운 능묘는 옛 능묘와는 거리가 멀지 않았다.
고대의 장례제도에 따르면, 황후, 비빈은 황제의 곁에 배장되어야 한다. 조비는 견씨를 사사했으므로 그녀를 배장하지 않은 것은 이해가 된다. 조예는 부모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견씨의 영구를 조비의 수양릉에 배장하지 않았다.
서고혈촌의 능묘를 조조묘로 인정하면 견씨의 능묘아 6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객관적으로 보면 조조의 묘에 배장된 것이다. 이것은 세상사람들에게, 조조, 견씨간에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같다. 즉, 조비는 세상에 부친 조조와 견씨간에 무슨 관계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조예는 모친의 영구를 이장할 때, 여전히 부친의 뜻에따라 모친을 할아버지와 애매한 관계라는 점을 세상에 알린 것이다. 만일 정말 이렇다면, 그건 정말 말도 되지 않는다. 이런 황제들과 이런 문무대신들이 있단 말인가?
6. 왜 측정하지 않는가?
시대는 발전하고, 과학기술은 진보한다. 고고수단도 날로 새로워진다. 조조묘의 진위논쟁은 육안으로 판단하거나 주관적인 억측으로 하는 것보다는 현대화 설비로 측정하는 것이 낫다. 조조의 묘에서 나온 남성두개골은 묘주의 신분을 측정하는데 결정적인 조건을 제공한다. 상해박물관 문화재보호과기센터에는 열석광기술이 있다. 북경대학에는 방사성회선가속기질량분석기가 있다. '조조'의 두개골의 이 두 곳중 한 곳에 보내어 공정하고 투명한 환경하에서 측정해보면 그 연령과 지금으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떨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 다시 두개골과 조조의 여러 후대의 유전인자를 비교하면, 모든 논쟁은 일거에 해결될 것이다. 왜 측정하지 않는가? 마음 속에 거리끼는 것이라도 있는가? 만일 있다면, 도대체 무엇을 꺼리는가?
7. 배장된 도저권(陶猪圈)은 무슨 의미인가?
조조묘의 배장품 중에, 도저권이 있다. 물어보자. 조조의 생전에 돼지를 길렀는가? 아니면 조조의 사후에 지하세계에서 먹을 고기가 없을까봐 걱정했을까?
8. 누가 함정을 설치하지 않았을까?
무덤의 주인을 인정하는데에는 발굴해낸 증거를 가지고 말해야 한다. 현재까지, 조조무덤 고고발굴팀도 좋고, 유경주도 좋다. 모두 무덤내에서 찾아낸 증거는 없다. 있는 것은 모조리 도굴범의 수중에서 회수한 장물이다. 이들 장물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도굴점의 진술을 믿을 수 있는가? 당사자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누가 증명할 수 있는가?
9. 업계인사의 상식적인 말을 왜 듣지 않는가?
유경주는 스스로 전문가로 자처한다. 그리고 기세등등하게 비전문가들의 말을 무시한 바 있다. 중국고고학계의 권위자이자, 전 중국고고학회 이사장이며, 80여세된 서평방 선생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서고혈묘는 조조묘일 수가 없다.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고고학의 가장 중요한 것은 증거이다. 하나면 하나이고, 둘이면 둘이다. 추측이 아니다. 도굴된 묘는 절대로 중대한 고고학적 발견에 들어갈 수 없다." 서평방 선생이 한 말은, 아주 일반적인 고고학적 상식이다. 이는 수학에서 1+1=2와 같다. 절대로 어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수한 잘못이 일어나게 된다. 유경주 선생은 오랫동안 고고학에 종사해왔는데, 어떻게 이런 저급한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일까? 왜 1+1=3이라고 말하는가?
서평방 선생은 나아가 이렇게 질문한다: "유경주와 하남성문물부문이 이것은 조조묘라고 이를 악물고 말하는데, 나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 유경주가 이렇게 성실하다면 당연히 나서서 대답을 해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왜 피하기만 하고 대답을 하지 않는가?
서평방 선생은 다시 하나의 기밀을 폭로했다: "나와 나이가 비슷한 고고학자들은 모두 조조묘가 아니라고 보고 있다." 비록 이렇게 많은 고고학계인사들이 부정적인 의견을 나타내고 있는데, 왜 당국에서는 못들은 척 하는 것일까?
확실히 조조묘에 관한 모든 논쟁은 일찌감치 시비의 범위를 넘어섰다. 이미 양심과 사심의 대결로 바뀌었다. 무엇이 학술부패인가? 조조묘의 고고학적 발굴에서, 학술부패가 있는가 없는가? 이치는 분명하다. 국외인들은 그저 차가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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