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등중당(鄧中堂)
2009년 12월 하순, 하남성 문물부서는 안양시정부와 일부 전문가 학자를 초청하여, 북경 아주대주점에서 기자회견을 개최하여, 안양현 안풍향 서고혈촌의 남쪽에서 조조의 능묘 즉 고릉(高陵)을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금새 세상을 깜짝 놀래킨다. 곧이어 CCTV등 신문매체도 대거 보도하기 시작했다. 전국적으로 내지 국제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조조묘는 천고의 수수께끼였다. 오늘날, 하남에서 조조묘가 안양현 서고혈촌에서 발견되었다고 선포하자, 사람들은 아주 기뻐하였다. 필자는 고업문화연구회 회장으로서 여러해동안 고업문화를 연구해왔다. 조조 및 조조묘에 대하여도 연구를 해본 바 있으며, 조조묘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아무런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오늘 조조묘가 안양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자연히 놀라고 기뻤다. 그러나 한편으로 마음을 안정시키고 하남에서 얘기하는 묘에서 출토되었다는 관련 물건을 하나하나 따져보고, 분석해보니, 적지 않은 의문점이 발견되었다. 종합하면 아래의 몇 가지이다.
첫째, 묘안에서 '진주', '마노'등 배장물품이 출토되었다. 이는 조조가 생전에 근검절약했다는 품성이나 임종시에 남긴 <<유령>>에 어긋난다.
조조는 '천자를 끼고 제후에 명을 내렸다' 그는 풍운을 질타했고, 기세가 하늘을 삼킬 듯한 일대효웅이었다. 그러나, 평생 아주 근검절약했고, '후양박장(厚養薄葬, 살아있을 때 잘해주고 죽은 후에는 간소하게 하라)"을 주장했다. 그는 생전에 한나라 승상이고 나중에 위공, 위왕에 봉해지지만, 평소의 생활은 아주 근검절약했다.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그는 생전에 10년간 같은 요와 이불을 썼다. 심지어 요는 헤어져서 여러번 꿰멘 다음에 다시 사용했다. 그가 사용한 가구는 모두 흑색으로 칠을 했고, 화려한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집안의 사람들에게 의복을 소박하게 입고, 절대로 화려하게 입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의 아들인 임치후 조식의 처인 최씨가 화려한 의복을 입고 외출했다가, 조조가 동작대에서 발견하고 대노하여, 즉시 최씨를 사사한 바 있다. 이는 조야를 진동시켰다. 이를 보면 조조는 근검절약했음을 알 수 있다. 사치나 허례를 엄금했다. 그는 생전에 근검절약했을 뿐아니라, 후양박장을 주장했다. 나중에 그는 매년 전투를 벌이고, 나이도 많아지자, 자연히 세상에 살아있을 시간이 길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건안23년(218년) 육월에서 건안25년(220년) 정월까지 계속하여 몇 건의 <<종령>>과 <<유령>>을 내려, 자신의 후사에 대하여 정한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죽은 후에 입을 4계절 의복을 준비하여 4개의 상자에 넣어두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그는 <<유령>>에서 "금이주옥(金珥珠玉)은 하나도 넣지 말라"고 한 바 있다. 또 다른 <<유령>>에서는 "입고 있던 옷으로 염을 하라" "금옥주보를 넣지 말라"고 했다. 조조가 생전에 근검절약을 숭상하고 후양박장을 주장하였고, <<유령>>에서 자신의 사후에 명확히 금옥주보를 넣지 말아달라고 요구하였는데, 안양 서고혈촌의 소위 '조조묘'에는 왜 진주, 마노같은 것들이 나오는가? 조조의 생전의 품성이나 <<유령>> 의 요구사항에 위배되니,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조조의 부인 변태황태후가 사후에 고릉에 합장되었는데, 서고혈촌의 "조조묘"에서는 왜 그녀의 유해가 발견되지 않았는가?
하남측에서 공표한 서고혈촌의 "조조묘"에서는 250건의 유물이 출토됭렀다. 여기에는 60세가량의 남자의 두개골과 두 여자의 유골이 있다. 그런데 이 두 여자의 연령은 현대과학수단으로 측정한 결과 1명은 연령이 40세가량이고, 다른 한명은 20세가량이다. 이것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삼국지.후비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명제(조예)가 즉위하고, 태후(변씨)를 태황태후로 모신다" 또 다른 기록에서는 "태화(위명제의 연호) 4년 봄, 명제는 태후의 조부를 광일개양공후로 추존하고, 부친을 원일경후로 추존하며, 조모 주씨를 양도군에 봉하고...그해 오월, 후(변태황태후)가 붕어하다. 칠월, 고릉에 합장하다" 여기에는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변태황태후는 태화4년(230년) 오월에 붕어하고, 두 달후에 남편 조조와 '고릉에 합장'되었다. 그런데, 서고혈촌의 '조조묘'에는 왜 변태황태후의 유해가 없는가? 오히려 40세가량의 여자와 20세 가량의 여자의 유해만 남아있는가? 변태황태후는 조조보다 6살이 적었고, 조조는 건안25년(220년) 정월에 죽었는데, 나이가 66세였다. 변부인은 당시 60세였다. 10년후인 태화4년(230년) 오월에 변태황태후가 죽었을 때는 나이가 70세이다. 사서에 명확하게 변태황태후는 조조와 고릉에 합장되었다고 되어 있는데, 서고혈촌의 '조조묘'에는 왜 나이 70세가량된 여자의 유해가 없는가? 변부인은 어디로 갔는가? 이런데도 묘주인이 조조라고 할 수 있겠는가?
셋째, 안양 서고혈촌의 '조조묘"에는 왜 변태황태후의 인새(印璽)가 출토되지 않는가? 묘주인의 신분은 무엇으로 인정할 것인가?
조조는 건안25년(220년) 정월에 사망한다. 같은 해 2월에 고릉에 매장된다. 변태황태후는 조조가 죽은 후 10년이 지난 태화4년(230년) 오월에 사망하고, 같은 해 7월에 고릉에 합장된다. 조조의 처인 변씨는 조조의 생전에는 승상, 위공 및 위왕일 때 변부인이라고 불렀다. 조조의 아들 조비가 황제에 오른 후, 변부인은 황태후에 오른다. 조조의 손자 즉 조비의 아들 조예가 황제에 오른 후, 조모인 변태후는 태황태후가 된다. 한나라제도에 따라, 황제가 등극한 후에 황후, 태후 및 태황태후가 된 사람은 모두 조서와 인수(印綏)를 받는다. 변씨는 생전에 황태후와 태황태후에 봉해졌다. 생전에 받은 인새는 일반적으로 모두 묘안에 같이 묻는다. 안양 서고혈촌에서 출토된 한나라묘가 조조의 묘장인 고릉으로 인정받으려면, 변태황태후가 사후에 조조와 고릉에 합장되었으므로, 그녀가 생전에 받은 인새는 묘안에 묻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안양 서고혈촌의 '조조묘'에는 왜 그녀의 인새가 출토되지 않았을까? 묘안에서 조조의 인새도 출토되지 않고, 변태황태후의 인새도 출토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묘주인의 신분을 확정한단 말인가?
넷째, 조조의 <<종령>>에 따르면, 조조묘는 단일묘가 아니다. 오히려 기세가 대단한 묘군(墓群)이다. 그런데 안양 서고혈촌에 나타난 "조조묘'는 단지 1개의 분묘만 딸려 있고, 묘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이는 조조의 <<종령>>에 배치된다.
조조는 임종전에 <<종령>>을 내러, "옛날에 장례를 지낼 때는 반드시 척박한 땅에 묻었다. 서문표 사당의 서쪽 고원에 수릉으로 삼으라, 높은 곳을 기반으로 하고, 덮거나 나무를 심지 말라. 주례에서 공의 묘는 제후가 좌우의 앞에 있고, 경대부가 뒤에 있어야 한다. 한나라제도에서는 배릉이라고 한다. 공경과 여러 장수들중에 공로가 있는 자들은 수릉에 배장하는 것이 좋겠댜. 넓은 부지를 잡아서 모두 묻을 수 있도록 하라" 조조는 공로가 있는 문신무장을 포상하기 위하여 자신이 죽은 후에 북방통일에 공로가 있는 문신무장을 자신의 묘에 배장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널리 부지를 꾸미도록 하였고, 충분히 묻을 수 있도록 하라고 했다 .이를 보면, 조조가 죽은 후 배릉의 자격이 있는 대신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세가 당당한 묘군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나타난 "조조묘"는 기본적으로 단일묘이다. 주위에 다른 공경대신의 능묘가 발굴되거나 출토된 바 없다. 묘안에서 나온 몇 조각의 '위무왕상소용격호대극'등의 글자가 있는 석패만 을 가지고 묘주인이 조조라고 하는 것은 견강부회이다.
다섯째, 안양 서고혈촌의 '조조묘'에서 출토된 '위무왕상소용격호대극' '위무왕상소용격호대도'등의 글자가 새겨진 석패는 사진으로 보기에, 석패의 글자가 아주 선명하고, 심지어 새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 무슨 비밀이 있지는 않을까?
조조묘가 안양 서고혈촌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공개된 후, 필자는 글을 쓰고 있었으므로 현장을 가볼 수가 없었다. 현재 상황으로 보아서, 갔더라도 문밖에서 들여보내주지 않았을 것같다. 신문에 실린 사진으로 봐서, 묘지 현장은 이미 봉쇄되어 있고, 실탄을 장전한 경찰이 경계를 서고 있으며,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기회가 되어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묘안에서 출토된 물건들은 아마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소식통에 따르면, 이 묘는 일찌기 2004년에 발견되었다. 이전에 이미 도굴되었고, 그 후에도 여러번 도굴되었다. 그러나 이 일은 현지정부와 관련부서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 묘가 도굴을 당하여 엉망이 되고난 후에야 비로소 황급히 발굴을 하게 된 것이다. 생각지도 못하게, '조조묘'를 발굴한 것이다. 필자는 묘안에서 출토되고, 관련부서에서 묘주인의 신분을 판단하는데 의존한 '위무왕상소용격호대극' '위무왕상소용격호대도'등의 글자가 새겨진 석패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신문에 실린 사진으로 보아, 이들 석비의 잘자는 아주 분명하고 아주 새것같다. 이것은 혹시 사회에 돌아다니는 모조품이 아닐까? 한위문화학자인 염패동(閆沛東) 선생이 털어놓은 바에 의하면, 현재 문화재시장에서 모조품이 아주 성행하고 있고, 어떤 모조품제작자는 모조품의 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고의로 가짜유물을 옛날무덤에 가져다 넣기도 한다. 그후에 다시 도굴하여, 가짜를 진짜처럼 파는 것이다. 업계인사는 이런 방법을 "지뢰매설'이라고 부른다. 안영 서고혈촌의 조조묘가 여러번 도굴되었고, 도굴꾼들이 자유롭게 드나들었다면, 모조품이 묘안으로 흘러들어올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다. 하물며, 어떤 석비는 도굴자의 수중에서 회수해온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진실성이 도대체 얼마나 될까? 이들 물건을 가지고 묘주인의 신분을 확정한다는 것은 편파적이다. 신뢰도가 얼마나 될 것인가?
여섯째, 1호묘가 아직 발굴되지 않았는데, 2호묘에서 출토된 배장물을 가지고 묘주인이 조조라고 인정하는 것은 조조묘라는 천고의 수수께끼를 너무나 쉽게 풀어버린 것이 아닌가? 어떻게 사람들을 믿게 할 수 있겠는가? 거기에 무슨 말못할 비밀이라도 숨어있는가?
신문에 공개된 것에 따르면, 안양 서고혈촌에서 발견된 것은 1개의 한묘가 아니라, 2개의 한묘이다. 하남의 관련부서에서는 이를 1호묘와 2호묘라고 부르고 있다. 고고학의 상례에 따르면, 묘의 상황을 분명히 하고, 묘주인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하여, 두 개의 한묘를 동시에 발굴해야 한다. 발굴역량이 부족하면, 먼저 그중 하나를 발굴한 후 다시 나머지 하나를 발굴해야 한다. 두 개의 묘에 대한 발굴이 완료된 후에 다시 두 개묘에서 출토된 물품을 비교분석한 후에 비교적 확실하게 묘주인의 신분을 확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 하남에서는 그중 2호묘에 대하여 발굴(2호묘가 1호묘보다 규모가 크다고 한다)한 후, 2호묘에서 출토된 일부 기물을 가지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기자회견을 열어서 천고의 수수께끼였던 조조묘 즉 고릉이라고 밝힌다. 이러한 결론은 너무 성급하다. 이 묘를 조조묘라고 인정할 증거는 확실히 부족하다. 하남에서 왜 그렇게 서둘렀는지 모르겠다. 한묘는 그들의 땅안에 있는데, 다른 사람이 가져갈 수도 없다. 조조묘는 옛날부터 수수께끼인데, 그들이 조조묘를 확인할 충분한 증거를 확보한 후에 발표해도 늦지 않았을 것이다. 1천여년도 흘려보냈는데, 며칠 밤낮정도야 무슨 상관이겠는가? 속담에 "마음이 급하면 뜨거운 두부를 먹을 수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조조묘가 안양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퍼져나가자 마자 의문성이 줄줄이 나온 것도 이러한 점 때문이다. 오히려 호랑이등에 탄 형세가 되어 내릴 수도 없게 되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거기에 무슨 비밀이라도 숨어있는가? 그 이유는 아마도 하남측에서만 알고 있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조조묘'가 안양 서고혈촌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의문점이 아주 많다. 가장 주요한 점이라면 서고혈촌 2호묘를 조조묘로 인정할 증거가 확실히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남측에서 추가적으로 더욱 깊이있고, 더욱 자세하게 업무를 진행하여, 추가적으로 증거를 찾아서 확실한 증거를 내놓아서 조조묘라는데 사람들이 의심을 품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조조묘라는 천고의 수수께끼를 푸는데 공헌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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