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은하(水銀河)
한무제(漢武帝)는 웅재대략(雄才大略)의 황제였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는 위풍당당했지만, 사후에는 모두 빼앗겨 버리게 되었다. 그가 묻힌지 4년후에 벌써 장안에는 그의 묘(茂陵)에서 도굴해낸 경서(經書)를 판매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왕망의 신(新)나라가 들어선 후 일어난 농민군이 장안으로 쳐들어왔을 때, 규모나 부장품이 가장 크고 많았던 한무제의 무릉은 적미군(赤眉軍)에 의하여 큰 구멍이 났고, 수만명이 1달동안 물건을 날랐다. 그래도, 무덤 안에 부장된 물건의 절반도 반출하지 못하였다. 나중에 적미군이 곤경에 처해지자, 군수물자조달을 위하여 다시 한무제의 능을 파헤쳤다. 그래도, 이때의 피해는 죽은 한무제에 있어서 아주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시신은 여전히 편안히 호화로운 관 속에 누워있었기 때문이다(부패여부는 사서에 기록이 없다). 이후 들어선 동한왕조는 그들의 조상인 한무제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다시 무릉을 수리하였다. 점차 한무제의 무릉은 왕년의 화려함을 되찾아갔다. 이로써 한무제의 악운이 그쳐야 했지만, 하늘은 그를 그냥두지 않았다. 동한말기에 이르러 역사상 유명한 악인 동탁(董卓)이 등장했다. 그는 다시 무릉을 파헤쳤을 뿐아니라, 대명천지에 그의 시신을 파내서 벌판에 며칠간 내버려 두었다. 그 후에 다시 관 속에 집어넣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인가?
건원2년 한무제는 자신을 위한 무릉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기원전87년에 죽은 후에 그는 이 곳에 매장된다. 앞뒤로 50여년이 걸려, 진시황의 능과 나란히 언급될 정도인 무릉이 비로소 완공되었다. 그가 재위하던 시절은 한나라제국의 전성기였다. 기본적으로 중화민족의 생존기반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한나라는 통일, 번영, 강대한 모습으로 동방에 우뚝선 제국이 되었다. 이름을 날리기 좋아하는 한무제는 자기의 위업을 역사에 남기고 싶어했고, 자신의 능묘도 역사에 우뚝 그 이름을 세우고 싶어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매년 국가수입의 1/3씩을 떼어내서 무릉을 건설했고, 나중에는 아예 1/2까지 늘려버렸다. 그가 매장될 때의 무릉은 규모도 거대하고, 건축물도 웅장했으며, 묘안이 순장품들은 아주 호화롭고 풍성했다. 역사서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금전재물, 조수어별, 우마호표 살아있는 날짐승 등 무릇 190여가지 물건들을 모두 묻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한무제의 금루옥의(金鏤玉衣), 옥상(玉箱), 옥장(玉杖) 등이 모두 묘안에 묻혔다고 한다. 당시 능묘안에는 제사지내는 편전, 침전이 있고, 궁녀와 능묘를 지키는 사람이 거주하는 집이 있었으며, 5000명이 능묘를 관리했다. 이들은 나무에 물을 주고, 청소하는 등의 일을 담당했다. 그리고 무릉의 동남쪽에 무릉현성을 두고, 많은 문무대신과 명문호족들이 이 곳으로 이주해서 살았는데, 인구가 277,000명에 달하였다. 무릉의 봉토는 복두형(覆頭形)이다. 현재 남아있는 것만 하더라도 높이가 46.5미터에 달하고, 묘총의 아랫부분의 변길이가 240미터에 달한다. 능원은 정방형이며, 변의 길이는 약 420미터에 달한다. 지금도 동, 서, 북의 삼면에는 토궐(土闕)이 남아 있다. 능묘의 주위에 배장된 묘들로서 아직도 이부인(李夫人), 위청(衛靑), 곽거병, 곽광, 김일제 등의 묘들이 남아있다. 무릉은 한나라역대 제왕능뇨중 규모가 가장 크고 건축기간이 가장 길었으며 부장품이 가장 풍부한 능묘였고, '중국의 피라미드'로 일컬어질 만했다.
놀라운 수량의 부장품으로 무릉은 도굴자들이 가장 먼저 노리는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동탁으로 하여금 한무제의 시신을 벌판에 버려두게 만든 것은 금은재보가 아니라 약방(藥方)이었다. 동한말기, 머리가 맛이 간 대장군 하진(何進)은 자기와 갈등이 있던 십상시(十常侍)를 제거할 생각으로 멀리 양주에서 서북바람을 맞고 있던 동탁으로 하여금 장안으로 와서 도와달라고 하게 된다. 동탁은 원래 양주의 지방호족이었고, 그의 부하는 모두 지방의 토박이들과 강족, 호족의 추장들이었다. 동탁을 우두머리로 한 아주 흉악한 승냥이같은 도적들은 역사상 가장 야만적인 파괴자였다. 당시 인구, 문화, 재물이 가장 집중되어 있던 낙양, 장안은 모두 이들 야수들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동탁은 일찌기 대장군 여포(呂布)에게 서한의 황릉들을 발굴하라고 명령하였다. 그 중에는 막 회복된 한무제의 무릉도 포함되었다. 다른 황제의 묘를 발굴하는 것은 당연히 재물을 위한 것이었지만, 한무제의 능을 발굴한 것은 다른 목적이 있었다.
여포가 무릉을 발굴할 때, 동탁은 그에게 비밀임무를 하나 내린다. 그것은 바로 무릉에 남겨진 비방묘약(秘方妙藥)을 찾아내라는 것이었다. 원래, 동탁에게는 손녀가 있었는데, 이름이 동백(董白)이었다. 그녀는 화용월태의 미인이었고, 셩격도 좋아서 동탁이 아주 좋아했고, 장상명주로 여겼다. 10살때 동탁은 그녀를 위양군에 봉했고, 그녀를 위하여 성대한 의식도 거행해 주었다. 의식을 거행할 때, 동탁은 특별히 병사들에게 명하여 너비6미터, 높이 2미터의 단을 만들게 하였고, 동백은 귀한 헌금화청개거(軒金華靑蓋車)에 앉아서 여러 관리들이 뒤따르며, 단에 올라서 작위를 받았으니, 아주 융중하였다. 다만 아쉬운 점은 동백이 벙어리라는 것이었다. 이것때문에 동탁은 아주 고민이 많았다. 천하의 명의를 불러모아서 치료하게 하였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 나중에 동탁은 부하중 하나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한무제는 일생동안 신선을 공경하여, 선약을 많이 달였다. 무릉에는 분명이 벙어리를 치료하는 영단묘약이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동탁은 여포에게 이 임무를 맡긴 것이다.
여포는 병사를 가득 이끌고 무릉으로 들어갔다. 대량의 보물을 운반하는 동시에, 자세하게 영단묘약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러나, 능묘를 다 뒤졌고, 한무제의 관을 뒤집어보기까지 하였지만, 영단묘약은 찾을 수가 없었다. 여포는 동탁이 부여한 임무를 완성하지 못하게 되자, 마음이 조급하고 우울해졌다. 바로 이때 한 사병이 비단종이 하나를 가지고 왔다. 그러면서, "찾았습니다. 찾았습니다"를 외쳤다. 여포는 그 말을 듣고 기뻐했으며, 사병이 보고하기도 전에 비단종이를 빼앗아서 살펴보았다. 펼쳐보니, 그 위에는 단정한 예서로 12글자가 적혀 있었다.
천리초(千里草) 하청청(何靑靑)
십일복(十日卜) 부득생(不得生)
천리의 풀이 어찌 푸를 것인가
십일의 점이 삶을 얻지 못한다.
여포는 무장이었으니 이 몇 글자를 알아보는 것만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안에 내포된 의미까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것이 아마도 동탁이 찾는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기쁜 마음으로 병사를 데리고 조정으로 되돌아왔다. 돌아온 후, 이 비단종이를 동탁에게 건넸다. 동탁은 한참을 들여다 보았지만 그 뜻이 해석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대신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렇지만 대신들도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아무도 말하는 자가 없었다. 동탁은 대노하여, 큰 소리로 말했다: "이 열 두 글자의 의미조차도 알아내지 못하면, 내가 너희 대신들을 길러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가 화를 내자 대신들은 부들부들 떨었다. 동탁은 화가나서 대전을 걸어내려와서, 두 눈을 부릅뜨고 가장 앞자리에 서있는 대신들을 노려보았다. 그 대신은 상황이 좋지 않다고 여겨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대왕이시여. 신이 모르는 것이 아니라 감히 말씀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동탁은 "말해봐라. 책임은 묻지 않겠다. 빨리 말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대신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 말은 대왕을 저주하는 말입니다". 동탁은 "어째서 그런가?"라고 물었다. 그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그 대신은 이렇게 말했다: "보십시오. 이 천리초(千里草)를 합하면 '동(董)'이라는 글자가 되지 않습니까. 십일복(十日卜)을 합치면 탁(卓)이라는 글자가 되지 않습니까. 이 말은 당신이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저주하는 말입니다" 동탁은 그 말을 다 듣고는 화가나서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그는 그 비단종이를 빼앗아 와서 찢어버리려고 하였으니, 비단종이는 질겨서 찢어지지 않았다. 화가 난 끝에 비단종이를 땅바닥에 내팽겨치고 발로 짓밟았다. 그리고는 여포를 욕했다: "네가 뭘 가져온 거냐. 밥통. 꺼져라..." 나중에, 화가 가라앉지 않은 동탁은 사람을 보내어서 한무제의 시신을 벌판에 며칠간 버려두게 하였다. 조정대신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타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채옹을 보내어 동탁을 설득시켰다. 동탁은 그제서야 화가 풀려, 시신을 제 자리로 되돌려 놓게 하였다.
이후에도 무릉은 편안하지 못하였다. 당나라말기에 다시 한 명의 파괴자를 만났다. 바로 황소(黃巢)이다. 1천여년후, 국민당의 장군 손련중(孫連仲)도 검은 마수를 무릉에 뻗쳤다. 지금은 휘황찬란했던 무릉에 금조가리 은조가리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탐욕은 인간의 본성이고, 예로부터 황제들은 생전에 천하를 가지고, 사후에도 무덤속에 가득 가져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지 못했던 것은, 탐욕에는 끝이 없다는 것이고, 도굴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탐욕스러운 도굴자들은 그들이 그렇게 많은 보물을 독차지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결국은 재물도 지키지 못할 뿐아니라, 시신마저도 온전히 보존하지 못하게 된다. 세상에 이것보다 멍청한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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