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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강희제)

강희제, 건륭제와 강남미녀

by 중은우시 2010. 2. 10.

글: 서광원(徐廣源)

 

세상사람들은 모두 건륭(乾隆)이 풍류적이었다고 말한다. 여러번 강남을 순행하면서 미녀들을 무수히 거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것이 이다. 건륭의 이런 '기호'는 바로 그가 무한히 숭배하는 '성조야(聖祖爺)" 강희(康熙)로부터 이어받은 것이라는 것을.

 

속담에, "위에는 천당이 있고, 아래에는 소항(蘇杭, 소주와 항주)이 있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은 바로 강남 소주, 항주의 풍경이 천하제일이라는 말이다. 아마도 이곳이 산도 아름답고, 물도 아름다워서인지, 사람도 아름답다. 자고이래로 중국의 강남 특히 소주, 항주는 미녀를 많이 배출했다.

 

중국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청나라역사 전문가인 양진(楊珍) 연구원이 고증한 바에 따르면, 강희제의 비빈(妃嬪)중에도 강남 소항일대에서 온 한족 미녀가 있었다고 한다. 청나라때 황실에는 하나의 내부규정이 있었다. 만주족혈통을 보존하기 위하여, 청나라황제는 한족여자를 후궁으로 들일 수가 없었다. 한족여자가 황궁에 들어오고, 청나라황제의 후궁이 되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녀가 엄청나게 아름다웠기 때문일 것이다. "침어낙안의 용모와 폐월수화의 자태가 있어야만 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한족여인으로서 후궁이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강희제의 후궁중에서 순의밀비(順懿密妃)는 바로 소항에서 온 한족여자이다.

 

순의밀비 왕씨(王氏)는 지현(知縣)인 왕국정(王國正)의 딸이다. 강희29년(1690년)에 궁중에 들어간다. 양진 연구원은 강희제가 강희23년(1684년)과 강희28년(1689년)에 두번 남순(南巡)을 하며 소주에 머문 바가 있었다. 소주는 미녀가 많기로 천하에 유명했다. 현지 관리, 지방호족들은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여러가지로 궁리를 했을 것이며, 여러 형식으로 황제에게 충성을 표시하였을 것이다. 황제에게 미녀를 바치는 것은 황제의 환심을 사는 가장 좋은 방법중 하나이다. 왕씨는 아마도 바로 이 강희28년의 남순때 소항에서 데리고 가서 입궁시킨 것일 것이다. 그래서, <<청황실사보(淸皇室四譜)>>에서 그녀가 강희29년에 입궁했다고 적은 것은 정확할 것이다. 오랫동안 만주족, 몽고족 여인들과 함께 지내서 어느 정도 질린 강희제로서는 강남의 부드러운 한족미녀에게 마음이 끌렸을 수 있다. 그래서 더욱 총애했는지도 모른다.

 

왕씨는 입궁후에 강희32년(1693년) 십일월 이십팔일 황십오자 유각군왕 윤우를 낳는다. 이년후 왕씨는 다시 강희34년(1695년) 육월 십팔일 황십육자 장친왕 윤록을 낳는다. 강희40년(1701년) 팔월 초팔일 왕씨는 다시 황십팔자 윤개를 낳는다. 왕씨는 입궁후에 연속으로 3명의 황자를 낳으니, 그 공로가 적지 않다. 그래서 강희57년(1718년) 십이월 이십팔일에 밀빈(密嬪)에 봉해진다. 강희제가 죽은 후 옹정2년(1724년) 육월초십일에 옹정제는 그녀를 황고밀비(皇考密妃)로 올려준다. 건륭원년(1736년) 십일월초삼일 건륭제는 다시 그녀를 "황조순의밀태비(皇祖順懿密太妃)"로 올린다.

 

그녀는 입궁후에 강희제를 30년간 모시고, 강희, 옹정, 건륭의 세 황제와 함께 지냈다. 건륭9년(1744년)에는 이미 칠순이 넘었다. 그녀는 건륭제의 존경을 받았다. 이해 사월, 순의밀태비는 병에 걸려 병석에 눕는다. 병세가 점점 심해지자, 건륭제는 친히 병문안을 가려고 막 떠나려는 참에 보고를 받는다. 태비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이 날이 바로 사월 십팔일이다. 건륭제는 3일간 조회를 하지 않는다. 다음 날, 건륭제는 황태후를 모시고 순의밀비의 침궁에있는 영전으로 가서 제사를 지낸다. 그녀의 관은 잠시 경북조 팔리둔에 모셔둔다. 건륭10년(1745년)에 매장된다. 원침의 정중앙에 매장된 것을 보아도 그녀가 얼마나 존귀한 위치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낳은 황십팔자 윤개도 이 원침에 같이 묻혀 있다.

 

공식서류와 자료를 보면 황제의 비빈의 용모에 대한 묘사는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왕씨가 예뻤는지 어떤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강희제의 후궁중 또 다른 소항의 한족미녀를 직접 목격한 외국인의 기술에서, 우리는 왕씨도 그 이상으로 아름다웠지, 그 아래는 아니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강희제 말기에 청나라황궁에서 화가로 있던 이탈리아인인 마국현(馬國賢) 신부는 그의 회고록인 <<경정십삽년>>에서 이러한 에피소드를 쓰고 있다. 강희60년(1721년) 여름, 그는 황제를 따라 피서산장으로 갔다. 그는 활불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고 싶었다. 태감에게 물어보니, 활불이 그가 거처하는 곳을 지나간다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그는 창문에 구멍을 내고 쳐다보았다. 그런데, 방향을 잘못 잡아서, 활불은 보지 못하고, 한 꽃처럼 아름다운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건너편 호숫가에 앉아있는 것을 본다. 몸에는 짙은 붉은색의 옷을 입고, 머리 위에는 보석이 휘황찬란했다. 성결한 여신과도 같았다. 개략 5살된 어린 남자아이가 그녀의 다리곁에 꿇어앉아 그녀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국현은 놀랐다. "이렇게 젋고 아름다운 여인이 이렇게 대단힌 궤술(詭術)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폐하의 아이를 자신을 신처럼 모시고 무릎꿇게 만들다니" 그런데, 태감이 그에게 말해준다. 그가 본 아름다운 여인은 황제의 후궁중 한 명이다. 최근 들어 몸이 좋지 않아서, 호숫가에 앉아서 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곁에 있던 어린아이는 그녀의 아들이다.

 

양진 연구원이 고증한 바에 따르면, 이 젊고 아름다운 여인도 역시 소항에서 온 한족미녀였다. 그녀는 아마도 귀인(貴人)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옹정연간에 죽었고, 건륭제가 즉위한 후에 그녀를 목빈(穆嬪)으로 추존했다. 목빈의 성은 진(陳)이고, 그녀의 부친은 진기산(陳岐山)이다. <<청황실사보>>에서 일반적으로 비빈의 부친은 관직을 표시한다. 그런데 목빈의 부친은 관직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를 보면 그는 그저 일개 평민백성임을 알 수 있다. 목빈이 낳은 아이는 강희제의 황이십사자 윤비이다. 나중에 화석함친왕이 된다.

 

낮은 등급의 귀인마저도 이처럼 아름다웠다면, 그녀보다 등급이 높았던 왕씨의 아름다움은 그보다 뛰어나지 않았을까?

 

앞에서 강희제의 후궁을 언급할 때, 순의밀비와 목빈이 모두 소주와 항주에서 온 미녀라고 설명했다. 강희제는 조상의 법도를 따르지 않고, 강남미녀를 후궁에 들였따. 풍류적인 건륭제가 어찌 강남미녀를 후궁에 들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청나라역사전문가들은 청나라의 자료를 뒤적여서 건륭제의 방비(芳妃)와 녹귀인(祿貴人)이 모두 강남에서 온 여자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리고 사료에서는 건륭제가 이들 간암여자들에 대하여 내린 밀지도 남아있다.

 

자료기록에 따르면, 명귀인 진씨(陳氏)(나중에 건륭59년에 芳嬪이 되고, 가경3년에 芳妃로 봉해진다)는 양주(揚州) 사람이다. 녹귀인은 소주사람이다. 당안에는 두 가지 기록이 남아 있다. 하나는 건륭41년 십월십삼일, 명귀인이 자신의 오빠를 아주 그리워해서, 수하의 태감 왕성으로 하여금 궁밖의 집으로 가서 자신의 오빠를 만나도록 분부했다는 내용이다. 왕성은 '부모를 보는 것은 되지만, 오빠를 보는 것이면 안된다'고 말한다. 명귀인은 왕성에게 황상에게 주청을 드려달라고 부탁한다. 그녀가 사람을 보내어 오빠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결국 건륭제는 엄히 거절한다. 이년이 지난 후, 명귀인의 오빠인 진제(陳濟)는 경성에 와서 일을 했다. 총관내무부대신인 복륭안은 이 일을 황제에게 보고한다. 건륭황제는 복륭안에게 양회염정 이령아에게 말을 전하게 한다: "짐의 후궁의 친척들을 엄히 단속해라. 그들이 바깥에서 일을 만들지 못하도록 하라. 만일 황실의 인척임을 내세우고 다닌다면 안될 일이다." 동시에 이 밀지에는 "육상(陸常)은 소주적관이다. 친척등이 있는지 상세히 조사해보고, 엄히 단속하라." 여기의 '육상'은 바로 녹귀인을 가리킨다. 이 밀지에서 우리는 건륭제가 한족후궁의 친족에 대하여 엄히 단속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그 가족들이 황실의 인척임을 내세워 발호하는 것을 막고자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대청황제가 한족여인을 후궁으로 두었다는 것을 알까봐 우려했다.

 

자료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이 두 여인이 한족이라는 것이다. 후궁중에 또 다른 강남여인이 있었는지는 미지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