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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강희제)

강희대제(康熙大帝)와 피터대제(Pyotr Veliky)

by 중은우시 2009. 12. 19.

글: 왕룡(王龍)

 

17세기와 18세기의 교차기에 섬광처럼 중국과 러시아의 하늘에, 거의 동시에 놀랍게도 비슷한 두 개의 큰 별이 나타난다. 그들은 바로 고금에 유명한 강희대제와 피터대제(표트르 대제)이다.

 

그들은 기세가 대단했던 전설적인 군주이다. 한 명은 운주유악(運籌帷幄), 역만광란(力挽狂瀾)의 중국황제이고, 한 명은 예의개혁(銳意改革), 광표돌진(狂突進)의 러시아 차르이다. 두 대제는 출생시기가 비슷하고 재위기간도 비슷하다. 그리고, 둘 다 비범한 웅재대략을 지녔다. 그들은 나라를 잘 다스리는데 애를 썼고, 17, 18세기에 각자의 국가를 전성기로 끌어올린다. 강희제는 중국을 일거에 명말청초의 대동란기의 만신창이국면에서 벗어나 동방 최강의 왕조가 된다; 피터대제는 낙후하고 우매한 러시아를 일거에 도약시켜 유럽열강들이 괄목상대하게 만드는 봉건강국이 된다. 그러나, 그들은 두 거함의 조타수로서, 중요한 역사의 시점에 서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배를 몰았다: 피터대제는 러시아를 신속하게 근대화의 길로 들어서게 하여, 유라시아에 웅거하고, 전세계를 오시하게 만든다. 강희제는 봉건체제를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그가 연 태평성대의 왕조는 공업혁명의 시기도 놓치고, 금방 석양에 저무는 해처럼 쇠락한다. 자부심에 넘치던 천조대국이 급격하게 전락하여 누구에게도 얻어맞는 비참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 서방열강에 침략당하는 동시에, 러시아로부터도 침략과 유린을 당한다.

 

이것은 희비가 교체하는 처량한 만가이다. 곰씹어볼 만하고, 깊이 반성해야 한다.

 

강희와 피터는 모두 고대에서 근대로 들어서는 중요한 시기에 살았다. 모두 같은 출발선에 섰다. 그들은 정치에 힘쓰고 태만하지 않았다.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강희와 피터는 모두 그 시대가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그들은 서로 만날 수없는 평행선 위를 나란히 달려갈 운명이었다. 강희는 농후하고 박대한 중국전통문화의 토양이 층층이 집적된 태산과 같았다. 피터는 러시아의 광활한 평원에서 자유롭게 자란 거대한 나무와 같았다. 강희제는 엄격하게 만든 큰 건물이라면, 피터는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큰 강물이다. 강희제는 온건하고 신중했다면 피터는 더할 수 없이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다.

 

강희제는 "물은 배를 띄우지만, 배를 뒤집기도 한다"는 군왕의 도리를 잘 알았다. 조모로부터 '민심을 얻어야 나라를 얻는다"는 교훈을 잘 기억했고, 일생동안 "경천, 법조, 근정, 애민(敬天, 法祖, 勤政, 愛民)"의 신조를 지켰다. 그는 백성들에 인자하고 후덕했다. 중국역사상 이는 보기 드물다. 그는 자주 말했다. 나는 만리장성이 필요없다. 나는 인심을 얻겠다. 인심이 바로 나의 만리장성이다. 강희제가 한번은 바깥으로 순찰을 나갔는데, 길위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았다. 황제의 앞길을 막는 것은 보통 사건이 아니다. 시위가 엄히 처벌하고자 했다. 강희제는 바로 제지했고, 상황을 파악하도록 시켰다. 그리고 그 사람은 왕사해이고 일꾼인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배가 고파서 쓰러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강희제는 그를 놀라게 하지 말라고 하고, 죽을 먹여서 구해주도록 시킨다. 왕사해는 뜨거운 죽을 마시고 정신을 차렸다. 강희제는 이 자의 집안이 아주 곤란하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돈을 쥐어주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왕사해는 감격하여 마지 않았고, 사방을 다니면서 당금성상의 애민공덕을 노래했다. 이 작은 사건만 보더라도 강희제가 백성을 사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희제는 천하가 태평하고 국세가 날로 강성해지는 것을 보면서, 바로 "지영보태(持盈保泰)"의 사상을 제기한다. 백성들이 매년 풍성한데 만족하고, 백성들이 배를 두드리며 노래하는 사회풍경에 만족한다. 곳곳에 태평성대의 모습이었다.

 

또 다른 길위에, 피터는 엄격하고 혹독한 채찍을 들고 러시아를 근대화의 도로로 강행군하게 만든다.

 

그는 진취적이고 백절불굴의 개혁가였다. 그의 강국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그는 그 어떤 댓가도 마다하지 않았다. 푸시킨의 말을 빌리면, 피터의 어떤 명령은 "채찍으로 썼다" 한번은 피터와 수도경찰국장이 차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다리가 고장났다. 그는 이것이 경찰국장의 직무소홀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바로 경찰국장을 두들겨 팬다. 그리고 말했다: "너는 잘 기억해라. 도로와 교량이 잘 통하도록 해야 한다. 이후 더욱 자주 순시해라" 차르는 경찰국장에게 공적인 일을 제대로 처리하라고 한바탕 훈계한 후, 다시 손을 흔들었다: "차에 타라. 동생."

 

그는 일체를 돌보지 않고 개혁을 추진했다. 혼자서 러시아의 변혁 연극을 감독한 셈이다. 러시아의 저명한 사상가인 헤르젠은 이렇게 평가한다: 그의 야수같이 커다란 손바닥에 러시아의 미래가 있다. 전체 러시아는 모두 이 위무당당한 운명의 왕의 손안에서 떨면서 바뀌어갔다.

 

간섭과 반대를 배제하기 위하여, 그는 걸핏하면 몽둥이를 들고 때리면서, 대신들에게 명령을 집행하도록 하였다. 그의 징벌조치는 소액벌금에서 전재산몰수까지, 육체를 괴롭해는 것에서 유배를 보내어 힘든 일을 시키는 것, 그리고 사형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들이 있었다. 그의 개혁은 러시아인들을 인내의 극한까지 몰아갔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인 알렉세예프까지도 견디지 못하고, 힘을 모아서 그의 개혁에 반대했다. 1716년 11월, 태자 알렉세예프가 도망친다. 피터대제는 무력을 빌어 태자를 귀국시킨 후, 친히 태자의 심문에 참여한다. 피터대제는 놀라운 잔인함을 보여준다. 그는 아들을 고문하고 죽이는 모든 과정에 참여한다. 개혁에 반대하는 풍파속에서 자신의 모친, 숙부, 장인,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결연히 관계를 끊어버린 것이다.

 

누구도 생각지 못했겠지만, 역사의 패러독스는 이렇게 나타난다. 강희제의 인정애민(仁政愛民), 피터의 흉포치국(凶暴治國); 강희의 수덕중외(修德中外), 피터의 침략확장, 강희의 도의정치, 피터의 이익추구....그런데, 결과는 러시아는 하늘로 승천하고, 중국은 그저 회광반조와 같은 일시적인 최후의 휘황을 보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근정유위(勤政有爲), 여정도치(勵精圖治)했던 두 제왕은 왜 그 결과가 이렇게 달라졌을까? 설마 유가가 숭상하는 도덕이념이 자본주의의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이념에 미치지 못한단 말인가? 천년에 나올까 말까한 현명한 성군이 백성을 전혀 돌보지 않는 러시아 '진시황'보다 못하단 말인가?

 

사실, 중국과 러시아의 두 번영하고 강성한 제국은 표면상으로 비슷했지만, 감추어져 있는 실체는 전혀 달랐다. 하나는 봉건주의의 석양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의 청춘이었다. 역사의 십자로에서 강희와 피터는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 이는 두 국가의 서로 다른 앞날의 결정했다.

 

러시아인들이 스스로 얘기하는 것처럼, 피터는 "고귀한 심령에서 나오는 특이한 본능으로, 한눈에 조국의 모든 질병을 꿰뚫어 보았고, 러시아에 무서우나 유익한 일격을 가했다."

 

피터는 천재적인 개혁가이다. 그의 개혁은 전국의 거의 모든 분야에 미쳤다. 그는 일생동안 3천여개의 법령을 반포하였고, 행정기관, 군대를 개혁하고, 군사공업을 건립하고, 천여명의 각종 전문가를 유치했으며, 여러 실리주의적인 학교와 과학원을 건립하며, 계속적으로 젊은이들을 해외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러시아는 개혁의 회오리바람 아래에서, 이성이 금고(禁錮)를 깨트리고, 과학이 우매를 압도하고, 중상주의가 성행하며, 자본주의가 신속히 발전했다. 러시아는 결국 세계의 선진조류와 발걸음을 함께하며 나아갔다. 피터가 자랑스럽게 말했듯이: "나는 내 스스로 강대한 러시아를 만들거나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나의 후계자는 반드시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 목표가 실현될 때까지."

 

강희가 계승한 것은 유교문화의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굽는 것처럼" 하라는 오래된 진리이다. 완전히 전통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유가가 설계한 정치도덕의 청사진을 완벽한 이상으로 보고 추구했다. 그는 비록 열심히 부국의 길을 뚫어나갔지만, 그것은 그저 중국에 소농경제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중국을 자본주의를 향하여 나가도록 할 능력은 없었다. 이런 자급자족의 소농경제는 세외도원처럼 느긋하고 편안하지만, 실제로는 미약하다. "강건성세"는 자연경제시대의 석양이다. 당시의 인류역사발전과정을 보자면, 이미 시대에 많이 낙후되었다. 세계에서 불고 있던 산업혁명을 강희제는 전혀 몰랐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으며, 변혁에 반대하고, 현실에 안주했다. 그는 대내적으로 봉건전제를 강화하고, 문자옥을 일으키고, 사상을 통제했다. 관료사회는 부패가 횡행했고, 아무리 억제하고자 해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경시했다. 이리하여 명나라말기이래로 일어났던 자본주의의 맹아는 뱃속에서 죽어버린다. 대외적으로 문을 걸어잠그고 폐쇄정책을 써서, 사회발전이 심각하게 지체된다. 그는 극력 태평성세의 국면을 열려고 했지만, 실제로는 근대화조류와 반대로 가는 길을 걷고 있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후퇴한다. 단순히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오랫동안 유지될 수 없다. 이것은 가야할 길을 잃었던 제국이 남겨준 최대의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