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호충량(胡忠良)
강남은 자고이래로 미녀가 많이 나왔다. 청나라의 태평성대인 강희(康熙) 연간에, 강남여자의 매매사건은 중앙의 최고지도자까지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강희46년(1707년) 정월 이십이일, 강희제는 제6차남순(南巡)을 떠나 소주(蘇州)에 도착했다. 그는 돌연 수행하던 공부상서 왕홍서(王鴻緖)에게 밀명을 내린다: "지난 해에 남순할 때, 많은 불초한 자들이 소주여인을 속여서 매매했다. 짐은 집에 돌아간 후에야 알게 되었다. 금년에도 이런 짓을 하는 자가 있을지 모르니, 네가 자세히 알아보거라..."
이 왕홍서는 당시에 강희황제에게 비밀리에 글을 올릴 수 있는 권한이 있던 "대내밀탐(大內密探)"중 한 명이었다. 밀명을 받은 후, 그는 비밀리에 조사를 시작한다. 조사를 통해, 왕홍서는 당시 강남여자매매의 내막을 파헤친다. 먼저, 당시 여자매매는 아주 유행했다. 규모가 적지 않았을 뿐아니라, 일정한 시장의 관행까지도 형성되어 있었다. 매입자들은 모두 '성명을 날조하고, 허위로 속여서 거래를 한다. 딸을 파는 부모가 딸을 데려가는 사람에서 돈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사간 사람이 누군지를 알지 못했다." 매매되는 여자는 모두 16세에서 18세의 젊고 예쁜 여자들이었다. 심지어 더 어린 경우도 있었다. 매매가격은 시장가격에 따랐다. 예쁘고, 재능이 있으면 가장 비싸게 받았다. 여자매매에 참여하는 자들은 대부분이 상인이나 관리였다. 동기도 각양각색이다. 자신의 첩으로 삼으려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보내려는 경우가 더 많았다. 특히 관리들에게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시장이 활발해져서, '팔 여자'가 부족하여, 양가집 여자들로 모자라게 되면, 기녀들을 데려다 팔기도 했다. 더욱 기괴한 것은 사내아이(孌童)도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의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남자는 '소수(小手)'라고 불렀고, 여자는 '왕용(王蛹)'이라고 불렀다.
왕홍서는 비밀보고서에서 아주 주의를 기울여야할 한 무리의 집단을 거론한다. 바로 북경에서 황제를 따라온 수행관리들과 지방에서 황제를 맞이하는 관리였다. 강희제 신변의 몇몇 시위들 위에 후보첨사(侯補僉事) 범부(范溥)는 행적이 아주 궤이하였다. 이 자는 황제의 행렬을 맞이하면서, 강희제에게 꽃을 바쳐서 황제로부터 어전(御箭)을 받은 바 있다. 그리하여 이 어전을 가지고 바깥을 다니면서 자랑을 했다. 범부는 평민여자를 강제로 매입하면서, 모두 어전인물들을 핑계로 내세웠다. 그리하여 아무도 그의 배후인물을 캐려고 하지 못했다. 만일 여자의 부모가 동의하지 않으면, 범부는 바로 지방의 공문서를 내놓고 강제로 사들였다. 이 범부는 확실히 여자를 많이 매입한 사람이다. 한꺼번에 13,4세의 여자아이를 8명이나 매입한 적도 있다. 여자외에 연동, 기녀도 강제매입했다. 그리고 그가 누구에게 팔아치웠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사를 하다보니, 왕홍서까지도 걱정이 들었다. 범부와 관련이 있는 중앙정부의 사람들을 찾아보니, '평소에 그와 알고 지내던 시위와 각 왕부의 하인들이 아주 많았다' 왕홍서마저도 그의 발이 넓음에 나중에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우려했을 정도이다.
비밀조사건에 대하여, 나중에 아무런 결과도 나오지 않는다. 강희제가 입건하지도 않았고, 누군가 처벌받지도 않았다. 범부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지나간다. 그러므로, 강희제가 이 비밀조사를 하게 한 목적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실제로 사학자들이 연구를 해서 밝혀낸 바에 따르면, 강희제가 왕홍서를 시켜 소주여자매매사건을 조사하게 한 일은 강희제의 당시 심정을 드러낸다. 일종의 초조하고 불안한 상태를 나타낸다. 아마도, 왕홍서의 이번 소주지방관리의 여자매매사건을 조사하게 한 배경은 어떻게 진상을 밝혀내고, 어떻게 위법한 일을 저지른 관리를 처벌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강희제가 이번 조사를 통하여 자신의 신변에 있는 사람들이 중앙에서 지방까지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알아보려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조사결과 강희제는 자신의 신변에 '누군가'가 암중에 활동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왕홍서는 비밀보고서에서 한가지 내용을 담았다: 범부는 한 친척에게 황제의 행렬을 맞이하러가고 싶지 않다고 밝힌 적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한족관리가 그를 좋게 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아주 득의만면하여 말했다고 한다: '환관이 아니라 어전 제1등인이 나와 서신을 주고 받는다' 그 '어전제1등인'이 도대체 누구인지에 대하여는 때려죽인다고 해도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사람은 보통사람이 아니다. 나는 죽어도 말할 수가 없다'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강희제의 이번 남순에 수행했던 황자(皇子)가 모두 5명이다: 각각 황태자 윤잉, 황장자 윤시, 그리고 황십삼자, 황십오자, 황십육자등이다. 앞의 두 황자는 이때 이미 강희제의 골치거리가 되어 있었다. 특히 황태자는 아마도 '어전제1등인'일 가능성이 높았다.
당시, 강희제와 황태자간의 갈등은 이미 천하에서 논의될 정도였다. 강희14년(1676년), 역대이래로 적장자를 후계자로 삼는 황위계승의 전통에 따라, 두 살도 되지 않은 적장자 윤잉을 황태자로 세운다. 그리고 그를 위하여 성대한 책봉전례를 행한다. 태자를 훌륭한 후계자로 키우기 위하여, 강희제는 큰 기대를 걸고, 마음을 많이 썼다. 그는 친히 태자에게 사서오경을 가르쳤을 뿐아니라, 장영, 이광지, 탕빈, 웅사리등 명신들을 태자의 스승으로 삼아주었다. 서법, 만주어, 말타기, 활쏘기등 수업을 받는 외에, 그는 특별히 태자에게 여러 차례의 단련기회를 부여했다. 그러나, 일은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진행되었다. 태자가 어려서부터 받은 교육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훈도였다. 그의 곁에는 아부하는 자들이 가득했고, 교만함과 발호하는 성격이 자연스럽게 배양되었다. 그의 주위에는 점차 무형의 '태자당'이 형성되었다. 이는 아직 황제위에 있던 강희에게 잠재적인 위협이 된다. 태자의 외조부, 대학사, 영시위내대신인 소어투(索額圖)는 태자당의 핵심인물이 되어, 태자를 위하여 각종 활동을 한다. 강희제는 이미 태자의 야심과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강희42년(1703년) 오월, 강희제는 기회를 잡아서 결단을 내린다: "국사를 의론하는데, 당파를 만들고 함부로 행동한다"는 죄명으로 소어투를 종인부에 구금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죽여버린다. 이를 통하여 태자의 당파에 타격을 가하고 태자당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때, 강희제는 어려서부터 책립해서 정성껏 키워온 태자에 대하여 아직은 완전히 신뢰를 잃지 않았었다. 여전히 태자가 잘못을 깨닫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태자는 전혀 고치지 않았을 뿐아니라, 부친에 대한 불만을 날로 키워갔다. 강희제의 마음 속은 갈등이 소용돌이쳤다. 그를 골치아프게 하는 일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강희와 황태자간의 갈등을 다른 사람들이 눈치챈 것이다. 그리하여 이미 장성하여 왕의 작위를 받은 황자들도 활동을 개시했다. 그리고 각자의 세력범위를 형성한다. 이때의 강희제는 이미 강렬하게 주위에 여러 황자들이 형성한 관계네트워크가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각 황자의 귀와 눈이 되어 수시로 노황제의 언행을 관찰하고 몰래 바깥에 전달했다. 그리고 지방관리들도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남순의 기회를 잡아서, 황자들과 결탁하고, 잘보이려했다. 강희제는 자신이 아주 고독하게 되었다고 느꼈다. 어디를 가든 배후에는 자신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는 눈이 있다고 느꼈다. 왕홍서는 비밀보고서에서 강희제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요즘은 시절이 다릅니다. 그중에서 지존의 동정을 몰래 살피는 자들이 있으니, 엎드려 바라옵건데, 황상께서 확실하게 대비하시옵소서"
1년후, 강희제는 태자 윤잉을 축출한다. 그 죄명중 하나는 바로 윤잉이 강희제의 출순시에 강희가 거주하는 장막에 몰래 가까이 가서 구멍을 뚫고 안을 들여다보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강희제가 두려움에 불안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짐은 오늘 독약을 먹을지, 내일 해를 당할지 알지 못하여 밤낮으로 경계하고 조심하며 편안한 적이 없다" 이를 보면 강희는 동행하는 태자를 경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 강희제가 공개적으로 이 일을 추궁하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그 스스로도 꺼리끼는 점이 있어서일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 자신이 강남여자를 가장 많이 사들인 매입자중 하나라는 것이다.
강희제때 강남여자들이 매매되어 북경으로 오는 것은 유행처럼 되어 있었다. 이를 시작한 것은 다름아닌 강희제 자신이다. 강희제는 한족문화를 숭배했고, 한족여자를 특히 좋아했다. 그리고 한족여자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다. 순치연간에는 자금성 신무문에 효장황태후의 이런 말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전족한 여자가 궁에 들어오면 참형에 처한다"
서양전도사 마국현(馬國賢)의 <<경정십이년>>에서 강희제때 한족비빈들의 생활상황을 언급한 적이 있다. 열하 피서산장에서 그는 가까운 거리에서 강희제의 전족한 한족비빈들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아주 흥미있어하며 이렇게 썼다:
"어떤 때에는 폐하가 높은 자리에 보좌처럼 생긴 자리에 앉아서, 그가 좋아하는 유희를 구경하곤 했다. 몇몇 환관이 옆에 시립해있고, 보좌의 앞에 있는 카페트에는 비빈들이 가득 모여있다. 돌연, 폐하가 가짜 뱀, 두꺼비등 사람들이 싫어하는 작은 동물을 비빈들의 중간에 던진다. 그녀들은 재빠르게 피한다. 폐하는 이를 보며 아주 즐거워했다."
"그리고 또 어떤 때에는, 폐하가 일부러 나무위에서 자라는 과일을 먹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비빈들에게 부근의 작은 산에 올라가서 따오라고 시킨다. 그가 재촉하자, 가련한 절름발이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소리치며 산으로 달려간다. 그러다가 어떤 여인은 넘어지기도 한다. 그러면 강희제는 가가대소를 한다."
소위 '절름발이' 비빈은 바로 전족을 한 한족여자를 말한다. 만주여자들은 전족을 하지 않았다. 확실히 이들 전족한 한족비빈들은 강희제의 총애를 받았다. 왜냐하면, <<경정십이년>>에 이런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강희제가 이들 '절름발이' 비빈들과 과일을 따러가기도 하는데, 가는 돌연 어떤 한족후궁이 생각나서 그녀를 쫓아갔다. 그 한족후궁은 한편으로 날카롭게 소리치면서, 한편으로 '절름발이'발로 도망을 갔다. 그러다가 강희에게게 붙잡혔다. 그후에 강희제는 가가대소를 하며, 놀이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이번에 강희제를 수행한 다섯명의 황자들 중에서 15세의 황십오자 윤우와 13세의 황십육자 윤록이 황제를 따라올 수 있었던 것은 주로 그들의 생모 왕씨(王氏) 덕분이다. 왕씨는 비빈으로 봉해진 여인들 중에서 황자를 여럿 낳은 유일한 한족여자이다. 그녀는 어려서 소주에서 자랐다. 즉, 윤우, 윤록, 여기에 윤개(6살이 되지 않았으므로, 강희를 따라 남순하지 못했다)는 모친때문에, 모두 강남한족의 혈통을 지니고 있었다. 자료상 왕씨가 황제의 이번 남순에 따라갔는지여부는 불분명하다. 아마도 그녀가 낳은 황자들과 함께 금의환향하였을 것이다. <<홍루몽>>에 나오는 '원비성친(元妃省親)"은 아마도 여기서 따온 이야기일 것이다.
궁중의 한족비빈들 외에, 강희제의 곁에는 오락성 일에 종사하는 한족여자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한족 사내아이도 있었다. 이들 여자들은 대부분 내무부가 강소절강에서 사온 것이다. 비밀성이 강했으므로 소수인만이 참여했다. 강남의 삼직조(三織造, 강녕, 소주 및 항주)가 가장 주요한 집행자이다. 예를 들어, 강희32년 십이월에 소주직조 이후(李煦)는 이렇게 비밀보고를 올린 일이 있다: "....이번에 몇몇 여자아이를 구해서, 희극을 가르켜서 보내드리오니, 황상께서 한번 보고 웃어주시면 합니다....."
여기서 몇몇 여자아이를 구했다는 것은 결국 사들였다는 말이다. 내무부의 용어로 하면, "채매(采買)"이다. 어떻게 사왔는지는 아마도 왕홍서의 비밀보고서에 나온 범부 및 어전시위들이 한 것과 같을 것이다. 당연히 이 모든 일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 > 역사인물 (강희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희제, 건륭제와 강남미녀 (0) | 2010.02.10 |
---|---|
강희대제(康熙大帝)와 피터대제(Pyotr Veliky) (0) | 2009.12.19 |
강희 61년 11월 13일 (0) | 2009.09.03 |
강희제의 돌론노르회맹에 대한 두가지 시각 (0) | 2007.04.24 |
강희제때의 라이벌: 소어투(索額圖)와 밍주(明珠) (0) | 2006.1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