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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조조)

조조는 과연 여백사(呂伯奢)를 죽였는가?

by 중은우시 2007. 3. 21.

<<삼국연의>>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조조가 동탁을 찔러죽이려다 성공하지 못하자, 단기로 낙양을 빠져나와 고향인 초군으로 달려간다. 길가던 도중에 중모현에서 체포되는데, 현령인 진궁(陳宮)이 조조의 충의를 흠모하여, 관직을 버리고 함께 도망친다. 두 사람은 성고(成皋)고 가서, 조조의 부친의 친구인 여백사의 집에 투숙했으며, 열렬한 환대를 받았다. 여백사는 친히 서촌으로 술을 사러간다. 그런데, 조조가 들으니 칼 가는 소리가 들려서 자기들을 죽이려는 것으로 의심하여, 진궁과 함께 여백사의 집안사람 8명을 전부 죽여버린다. 사실 여씨집안 사람들은 돼지를 잡아 손님접대를 하기 위하여 칼을 갈던 중이었다. 조조와 진궁은 어쩔 수 없어 다시 도망친다. 도중에 술을 받아 돌아오던 여백사를 만나게 된다. 조조는 진상이 드러날 것이 두려워, 아예 여백사까지 죽여버리고 만다. 진궁이 놀라서 왜 그러냐고 묻자, 조조는 "녕교아부천하인, 휴교천하인부아(寧敎我負天下人, 休敎天下人負我, 내가 천하인을 등질지언정, 천하인이 나를 등지지는 못하도록 하겠다)" 나관중은 이 두 구절의 싯구에 이런 평가를 덧붙였다. "마음이 악독하니 선량한 선비가 아니다, 조조와 동탁은 원래 같은 유형의 사람이다"

 

조조를 극단적인 이기주의자로 보는 이미지는 이로써 형성되었다.

 

사실, 이 사건의 진실성은 아주 의문이 크다. 당연히 이 내용은 나관중이 전혀 근거없이 날조한 것은 아니다. 사실상, 조조가 여백사를 죽인 사건은 사서에도 이미 그 초보적인 모습은 나타나 있다.

 

<<삼국지위지무제기>>에는 "동탁이 태조(조조)를 효기교위로 삼겠다고 글을 올리고, 그와 함께 일을 도모하고자 했다. 태조는 성명을 바꾸고, 동으로 돌아갔다" 이 글의 아랫쪽에 배송지(裵松之)는 세 가지 자료를 인용하고 있는데, 아래와 같다.

 

(1) <<위서(魏書)>>에서 말하기를 : "태조(조조)는 (동)탁이 반드시 다시 패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받들지 않고 고향으로 도망쳤다. 여러 기(騎)를 몰고 아는 사람인 성고의 여백사의 집을 지나게 되었는데, (여)백사는 집에 없었다. 그 아들과 손님들이 함께 태조(조조)의 말과 물건을 빼앗으려 하였다. 태조는 손에든 칼로 수인을 죽였다"

 

(2) <<세설신어(世說新語)>>에서 말하기를 : "태조가 백사의 집을 지날 때, 백사는 바깥으로 나갔고, 다섯 아들이 모두 있었다. 손님으로 맞이하여 주인의 예를 다하였다. 태조는 스스로 동탁의 명을 어기고 왔으므로 그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것으로 알아서, 수검(手劍)으로 밤에 여덟명을 죽이고 갔다"

 

(3) 공성(孔盛)의 <<잡기(雜記)>>에서 말하기를 : "태조는 식기소리를 듣고, 자기를 죽이려는 것으로 생각해서 밤에 그들을 죽이고, 처량하게 말하기를 "내가 다른 사람을 등지더라도, 아무도 나를 등질 수는 없다(寧我負人, 無人負我). 그리고 갔다."

 

진수(陳壽)는 <<삼국지>>의 본문에서 이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은 분명히 믿지 않는다는 의사표시이다. 조조가 중모현이 들러 체포된 사건에 대하여는 비록 유사한 기재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현령이 진궁인지도 명확히 기재되어 있지 않고, 그 현령이 조조와 함께 도망친 것에 대하여는 더구나 쓰여 있지 않다. 나관중이 쓴 조조가 여백사를 죽인 사건은 분명히 공성의 <<잡기>>에서 유래되어 변화한 것이다.

 

사실, 배송지가 인용한 세 가지 자료는 경향이 서로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 중 <<위서>>의 기재가 조조에게는 가장 유리하다. 그 곳에는 "태조가 손칼로 수인을 죽인 것"은 순전히 정당방위이므로 질책받을 이유가 없다. <<세설신어>>는 조조가 "밤에 8명을죽인 행위"를 오살(오인하여 죽인 것)이라고 결론내리고 있어, 실질적으로는 조조에게 유리한 내용이다. 이와 비교하자면, <<잡기>>에서의 묘사는 조조에게 가장 불리하다. 공성은 사람됨이 '호기심이 강하고, 말을 제대로 할 줄 모른다'  그의 저작에는 믿을 만한 역사로 보기는 어려운 내용이 많다. 비록 공성도 '처량'이라는 말을 쓰기는 했지만, 이것은 오살이라는 것은 인정하고 있다. 이외에 이 세가지 자료에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여백사 본인을 죽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연의>>에서는 나관중이 굳이 여백사 본인까지 피살된 것으로 그렸다.

 

<<삼국연의>>에서 쓴 여백사사건의 내용을 보면, 나관중은 분명히 이 세가지 자료를 자세히 읽어본 것같다. 그리고 그것을 종합해서 <<삼국연의>>에 반영한 것같다. 왜냐하면 그가 쓴 여백사 집의 위치인 성고는 분명히 <<위서>>에서 가져온 것이다. 조조가 죽인 사람의 숫자가 8명인 것은 <<세설신어>>에서 가져왔다. 그리고 조조의 두마디 말은 바로 <<잡기>>에서 변형시킨 것이다. 이상의 세 가지 자료는 모두 오살을 전제로 하고 있고, 여백사 본인은 언급하고 있지 않은데, 나관중은 이렇게만 써서는 조조의 사악함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다고 본 것같다. 그래서 여백사도 피살자의 명단에 포함시켰고, 아홉번째 '원귀'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세 책에 그려진 여백사사건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정리에 부합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1) <<위서>>에서는 "(여)백사는 집에 없었다. 그 아들과 손님들이 함께 태조(조조)의 말과 물건을 빼앗으려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정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조조는 황급히 낙양에서 도망쳤으므로, 몸에 그다지 재물을 가지고 오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일부 돈과 비단을 가져왔다고 하더라도, 말을 타고 몇 사람이 같이 왔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탈하려 했다면, 반드시 성공하지 못할 일을 굳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여백사가 조조와 잘 아는 사람인데, 그 아들이 손님들과 공모하여 강탈한다는 것도 정리에 전혀 맞지 않는다. (2) <<세설신어>>에서는 조조가 "스스로 동탁의 명을 어기고 왔으므로 그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것으로 알아서, 수검(手劍)으로 밤에 여덟명을 죽이고 갔다"는 것인데, 내용이 너무 간단하고, 조조를 의신의귀, 환득환실하는 무능지배로 그렸는데, 이것은 조조의 이미지와 전혀 맞지 않는다. (3) 공성의 <<잡기>>에 쓴 기재는 헛점이 너무 많다. 그는 조조가 식기소리를 자기를 죽이려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인데, 너무 유치하다. 그리고, 조조가 말했다는 "내가 다른 사람을 등지더라도, 아무도 나를 등질 수는 없다(寧我負人, 無人負我)"는 말은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없는 말이다. 그 때는 아무도 조조의 곁에서 '기거주(起居注, 황제의 곁에서 황제의 일거일동을 기록하는 책)'를 작성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 말은 공성의 말이지, 조조의 말은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