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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전)

모안영(毛岸英)은 어디에 묻혔는가?

by 중은우시 2009. 10. 12.

글: 촉인삼지안(蜀人三只眼)

 

최근 들어 2년전의 <<안휘시장보>>에서 '단독보도' 하나를 발견했다. 그 내용은, "모안영이 희생된 그날 밤에 유체는 중국으로 운구되어 왔고, 먼저 심양북릉공원에 매장했다"는 내용이다. 만일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는 아는 사람이 드문 것이고, 50여년동안 잡지, 신문, 사료, 회고록등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이 될 것이다.

 

모안영의 매장에 관한 주장은 최근들어 여러 신문잡지에서 보도한 바 있다. 주장이 서로 다르다. 2005년 3월 <<인민정협보>>에서는 이에 관해서 정리해서 보도한 바 있는데, 널리 알려진 주장을 모아보면 대체로 3가지이다:

 

첫째 주장은, 모안영이 희생된 후, 조선의 김일성 장군은 모택동에게 전보를 보내어, 위문하는 동시에 모안영을 영원히 조선에 안장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둘째 주장은, 모안영이 희생된 후, 모주석은 지원군사령관 팽덕회의 전보를 받았는데, 모안영의 유체를 중국내로 운구할 수 있게 특례를 허용해달라는 것이었다. 동시에 김일성도 모택동 주석에게 전보를 보냈는데, 모안영을 조선에 안장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셋째 주장은, 모안영이 희생된 후,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전보를 보낸다. 그런데, 비서 섭자룡(葉子龍)은 전보를 보고는 마음이 초조해졌다. 주석이 지나치게 슬퍼하거나, 전투를 기획하는데 정력을 집중하지 못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주은래 총리와 협의하여, 잠시 전보를 보고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1951년 2월중순이 되어서 팽덕회가 귀국하여 업무보고를 할 때, 모택동은 비로소 모안영이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지원군사령부가 모안영의 유체를 중국내로 운구하여 안장할 것인지를 묻자, 모택동은 모안영의 유골을 조선에 안장하라고 지시했다.

 

<<인민정협보>>는 정확한 주장은 요녕성 단동시의 항미원조기념관과 열사능원에 진열된 두평회고록을 보면 된다고 한다. 거기에는 팽덕회 총사령관이 주은래 총리에게 보낸 서신의 원문이 남아 있다:

 

"총리. 어제 24일 뇌전주 동지가 전보를 작성했습니다. 모안영 동지의 유골을 북경으로 운구하는 것입니다. 내 의견은 조선에 매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지원군사령부 혹은 지원군사령관의 명의로 비석을 세워서, 자진해서 전쟁에 참여해서 희생된 경위를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모택동의 아들에 부끄럼이 없다고 밝히고, 그와 동시에 희생된 또 다른 참모 고서환과 한 곳에 합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조선인민에 대한 교육적 의미고 좋고, 다른 사망한 열사가족들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원래의 전보는 총리께 보내어졌지만, 위의 의견은 쓰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보완하여 말씀드립니다. 타당한지 여부를 고려해 주십시오. 팽덕회 올림"

 

주은래 총리는 팽덕회 총사령관의 서신을 받은 후, 즉시 서신에 회신했다: "팽의 의견에 동의함" 그리고 이 서신을 유소기, 등소평에게 돌려서 열람하게 했다. 유소기, 등소평도 팽덕회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렇게 하여 팽덕회 총사령관은 중앙의 인가를 받은 것이다.

 

위에 얘기한 마지막 세번째 주장이 비교적 권위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필자는 <<안휘시장보>>의 주장도 마찬가지로 근거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신문의 기자는 당시 지원군사령부에서 전보번역작업을 담당했던 대위경(戴爲庚)을 인터뷰했다. 지원군 사령관인 팽덕회가 중앙에 모안영이 희생된 것을 보고한 전보는 바로 그가 번역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1950년 11월 25일 저녁, 기요처의 한종호 부처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나에게 사무실로 와서 임무를 맡으라는 것이었다. 기요처에는 한부처장이 한 남자를 나에게 소개했다: 이 사람은 사령부의 성보(成普) 참모이다. '기밀문건번역'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가 비문을 만들어보지 못했으니, 나에게 그를 대신하여 이 번보를 중앙과 동북군구에 보내라고 했다. 그리고 전보를 비문으로 만든 후에 원고는 직접 사령부로 갖갔다. 그리고 절대기밀을 요한다고 하였다" 대위경에 따르면, 성참모가 그에게 비문으로 만들라고 준 문건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전보문서의 내용은 대략: "총리 및 고강: 날이 밝은 후에 8기의 F-86적 전투기가 지원부 사령부 상공을 지나갔다. 이상한 모습은 없었다. 오시에 모안영과 참모 고서환 두 사람이 동굴을 떠나 사무실로 일하러 갔다. 그때 적 전투기가 기총소사를 하고 포탄을 떨어뜨렸다. 모,고 두 사람은 도망치지 못하고, 장렬하게 희생했다. 광산동굴내의 사람들은 구할 수가 없었다. 모,고 두 사람이 희생된 외에, 다른 손실은 없었다. 두 사람의 유체는 이미 모두 새카맣게 타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 모안영이 차고 있는 시계는 스테인레스스틸이었고, 아직 모안영의 손목에 차여 있었으므로, 두 사람의 유체를 구분할 수 있었다. 모안영의 유체는 백포의(白袍衣, 白帆布로 만들었으며, 첼로가방과 비슷한 모양이었다)로 싸서, 염을 했다. 오늘 밤에 XX기차역에서 기차에 싣고, 심양으로 운송하며, 북릉공원에 안장한다. 뒷사람들이 참배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총리께서는 잠시 주석에게는 보고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적당한 시기에 다시 주석에게 보고하는 것이 좋겠다. 팽덕회. 11월 25일."

 

"글자는 팽덕회 총사령관의 친필이었고, 붓으로 썼다. 글자체는 정자였고, 그가 개인으로 서명했다. 등화와 홍학지등 지휘관들도 이 전보의 원고를 보지 못했다. 전문은 기요처를 거치지 않았다. 전보가 발송된 후 원고는 직접 사령부로 되돌려 보냈다. 이는 지원군이 출국하여 작전을 한 3년동안 유일한 한번의 특수상황이었다. 그리고 지원군사령부 기요처의 오고간 전문을 보관하는 자료에도 이 전보가 빠진 원인이기도 하다"

 

대위경은 이렇게 말했다. 그가 비문으로 만들어 발송한 '절대기밀' 전보이후에 그는 기요처의 계장으로 승진되었다. 1958년 5월, 대위경은 대대장급으로 전역하여 안휘성 농공부에서 간부심사업무를 맡았다. 나중에 안휘성면화연구소 소장이 된다. 1973년 3월,안경지구 농림국의 부국장이 되고, 1984년 12월에는 안경지구 녹화위원회 부주임이 된다. 1985년 12월에 은퇴했다.

 

확실히 위의 두 전보에 대한 주장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한가지는 공통된다. 모안영이 희생된 후 유체는 먼저 귀국시켰다는 것이다.

 

조선의 평안남도 회창군의 지원군열사능원에 있는 모안영 열사의 묘와 관련하여, 대위경은 이렇게 말한다: 모안영의 유체는 최종적으로 조선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그가 당시에 비문으로 만들어 발송한 '절대기밀'전보와 나중에 찾아본 <<팽덕회전전>>의 관련내용을 보면, '모안영은 희생된 그날 밤에 유체를 중국내로 운구했었고, 먼저 심양북릉공원에 묻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당연히,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는 못한 사실이다. 두 매체의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이 역사의 수수께끼가 비밀해제된 후에야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