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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전)

소림장군(少林將軍) 허세우(許世友)의 세번의 혼인

by 중은우시 2009. 10. 30.

글: 소린(小麟)

 

허세우 사령관은 문화수준이 높지는 않으나 유명한 무장이다. 그러나 거친 가운세 세심한 점이 있다. 그는 특수한 성격을 지니고, 특수한 경력을 지니고, 특수한 공헌을 한 특수한 인물이다.

 

그는 일생동안 세번 혼인했다. 그의 혼인을 통해서 그의 비범한 일생경력을 엿볼 수 있다.

 

그에게는 별명이 하나 있다. 바로 "소림장군"이다. 그는 실제로 출가해서 중이 된 적은 없다. 수계를 받지 않았다. 허세우가 소림사에 들어간 것은 8살때였다. 허세우의 할머니가 큰 병에 걸렸는데, 오랫동안 치료해도 낫지를 않았다. 그의 부모는 보살이 도와주기를 바랐고, 노인의 병이 좋아지면 손자를 출가시켜 부처님을 모시게 하겠다고 했다. 나중에 노인의 병이 낫자, 허세우는 소림사로 보내어진다. 그는 소림사에서 잡일을 했다. 그가 평소에 하는 업무는 스님들을 위해서 차를 끓이고 물을 떠오고, 침대를 정리하고 이불과 요를 깔며, 땅을 쓸고 탁자를 닦는 일이었다. 소림사에서 8년간 있는동안 그는 체력과 의지를 단련시킨다. 그의 의리있고 호방한 성격과 정의를 추구하는 사상은 이때 다듬어진다.

 

그가 16살이 되어 고향인 호북성 마성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하남성 신현이다. 그는 공산당이 이끄는 농민운동에 가담하면서 향농민의용대 대대장 겸 포대대장을 맡는다.

 

모친은 아들이 어른으로 성장한 것을 보자, 허세우를 위하여 주석명(朱錫明)이라는 이웃마을의 여자를 물색했다. 그녀는 마을의 부구회(婦救會) 회원이었다. 허세우는 효자였고, 거기다 부친이 일찍 돌아가셔서 모친의 명이라면 그대로 따랐다. 1924년 봄, 허세우는 꽃가마를 빌리고 나발을 부는 사람들을 모아서, 주석명을 부인으로 맞이한다. 결혼후 두 사람은 금슬이 좋았고,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허세우와 주석명이 결혼한지 3일후에, 작전명령을 받는다. 모친과 신부와 작별하고, 부대를 이끌고 전투에 돌입한다. 모친과 주석명은 집에서 군화를 만들어 전선에 보냈고, 어떤 때는 세의대(洗衣隊)를 이끌고 전선으로 위문을 갔다. 그러나 포연이 솟구치는 그 시절에 주석명은 그저 한밤중에나 겨우 남편과 만나볼 수 있었다. 주석명과 허세우는 모두 사내아이를 셋 낳는다. 아명은 모두 '흑아(黑)"라고 불렀는데, 앞의 둘은 요절하고, 셋째만 살아남는다. 허세우는 겨우 한번 얼굴을 봤을 뿐이다. 그는 부대를 이끌고 악예환근거지를 떠난다. 국민당군대와 지방무장세력이 미친듯이 보복을 하게 되며, 소비에트지구에 인간성을 잃어버린 살인방화약탈을 자행한다. 주석명은 아이와 허세우의 모친, 허세우의 여동생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사방을 유랑한다. 그후 소식이 끊긴다. 허세우는 소문으로 처와 아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는다. 모친은 허세우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하기 힘들다고 생각하여, 과감했던 허세우의 모친은 이를 악물고 스스로 나서서, 스스로 며느리를 다른 착실한 농민에게 시집보낸다. 주변사람들이 모두 권하여 주석명도 그 뜻에 따른다. 흑아만 할머니에게 남겨두어 고난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주석명이 개가한 후,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았다. 일이 있든 없든 자주 허세우의 모친 곁으로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고 집안일을 도와주었다. 십여년이 지났다. 흑아는 십여세의 아이로 성장한다. 허세우 모친의 머리카락은 모조리 하얗게 된다. 그녀는 더 이상 아들 허세우가 돌아오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고, 그냥 죽었다고 여긴다.

 

1952년 허세우는 산동군구 사령관을 맡는다. 그는 휴가를 내서 고향으로 모친을 만나러 간다. 모자 둘은 이미 20년간 만나지 못했었다. 허세우는 말에서 내려 자신의 집문앞을 걸어가는 할머니를 본다. 의복은 남루하고, 회백색의 난발은 마치 잡초더미같았다. 발에는 발가락이 다 나온 낡은 신발을 신고 있었고, 등에는 땔감을 매고 있었다. 허세우는 창노한 얼굴에서 20년 전의 기억을 되찾아보려고 했지만, 얼굴은 전혀 다르게 바뀌어 버렷다. 그래도 모친이 아들을 알아보았다. 허세우는 '털썩' 소리를 내며 모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모자는 서로 끌어안고 통곡을 했다. 허세우는 모친의 눈물을 닦아주고, 몸을 일으켰다. 모친의 작은 어깨에 매어져 있던 땔감인 나뭇가지를 내려주었다. 그는 자신의 나이많은 모친이 지금까지 이렇게 힘들게 살아왔다는 것을 알고는 참담한 생각이 들어, 다시 한번 '털썩' 모친의 앞에 무릎을 꿇는다. 모자는 다시 머리를 끌어안고 반시간을 통곡했다. 허세우모친은 떨면서 몸을 일으켰다. 집안으로 들어가서 물을 데워서 아들에게 먹인다. 땅위에 꿇어앉은 허세우는 모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대로 무릎을 꿇고 일어나지 않았다. 허세우는 모친을 모시고 제남으로 돌아온다. 모자 두 사람이 함께 생활할 때, 모친은 자주 아들에게 며느리가 얼마나 잘했고, 효성스러운지를 얘기했다. 허세우는 그 말을 듣고는 탄식을 금치 못했다.

 

허세우의 두번째 결혼은 자유연애결혼이었다. 군이상의 간부는 혁명반려를 찾아서 가정을 이룰 수 있었다. 허세우는 연안에 도착한지 얼마되지 않아, 연안으로 온 사천 달현의 열혈여청년 뇌명진(雷明珍)에게 호감을 느낀다. 금방 두 사람은 연안에서 혼례를 올렸다. 결혼후 두 사람은 서로를 아꼈다. 허세우가 홍사방면군의 기병사령관으로 나갈 때, 명을 받아 소와 양을 끌어다가 부대에 식용으로 공급했다. 세심했던 뇌명진은 양털을 모은다. 그리고 시간을 내서 이것을 가지고 양모로 가공한다. 그후 허세우에게 평생 첫번째의 털옷을 만들어준다. 허세우는 홍군대학에 입한한 후, 뇌명진은 중앙조직부에 의하여 연안현에 파견되어 부녀공작을 한다. 이때 장국도의 분열주의를 비판하는 '비장'투쟁이 확대되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허세우는 위축된다. 정치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던 허세우는 이때 부대를 이끌고 사천으로 돌아가서 유격전을 벌일 생각을 하고, 그 준비를 하기에 이른다. 허세우와 홍사방면군의 10여명의 고급장군들이 감금된다. 이것은 그의 일생에서 자유를 상실한 가장 길었던 순간이다. 허세우는 사람을 시켜 처에게 소식을 전한다. 그녀에게 오면서 그 털옷을 가져오라고 한다. 고난의 와중에 허세우는 더욱 자신의 처를 생각했고, 이해와 안위를 원했다. 그러나, 반달이 지나서, 그가 마지막으로 받은 것은 헤어지자는 서신과 털옷의 조각을 담은 소포였다.

 

이때 뇌명진은 이미 연안현의 부녀부장으로 승진해 있었다. 뇌명진은 서신에서: "허세우 나는 네가 밉다. 나는 절대 반혁명분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혁명의 순결성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 둘은 관계를 일도양단하자. 나는 이혼을 결연히 요구한다. 서명해달라."

 

나중에 모택동이 친히 간여하여, '비장'확대화는 시정된다. 허세우도 다행히 화를 면했다. 그리고 다시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나간다. 뇌명진은 자신의 일시적 충동에 후회막급이었다. 여러번 허세우에게 잘못을 뉘우치며 재혼하자고 한다. 그러나, 허세우는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다. 뇌명진은 나중에 스스로 항일전선에 나가겠다고 요청한다. 태행산에서 진갱, 진석련은 허세우와 뇌명진을 한 방안에 한동안 가두어둔 적도 있다. 그들 둘이 잘 얘기해서, 서로 이해하게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허세우는 문을 깨고 나와서 떠나버렸다.

 

허세우가 산동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세번째 인연을 만난다. 이는 그의 평생 마지막 결혼이다. 교동(膠東)아가씨의 이름은 전명란(田明蘭)인데, 나중에 전보(田普)로 개명한다. 집안은 가난했다. 부대에서 그녀는 교동군구 물자조달공장에 근무했다. 전방지원업무를 한 것이다. 오래지 않아, 조직에서 전보에게 임무를 부여해서, 허세우의 생활비서를 맡게 한다.

 

전보와 허세우는 결혼후 40여년을 함께 하면서 6명의 자녀를 낳았다. 허세우는 생전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전보는 나의 일생에서 충실한 반려이다" 그리고 내세에도 반려로 맞이하고 싶다고 말했다. 해방후, 전보는 남경군구 정치부간부부 부부장등의 직위를 역임했고, 현재는 북경에서 은퇴하여 지내고 있다.

 

1959년, 허세우가 고향으로 찾아갔는데, 모친은 이미 작고했다. 허세우는 모친의 묘 옆에 꿇어앉아서 말했다: "어머니, 충과 효를 다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어른이 살아계실 때는 제가 모시질 못했으니, 제가 죽은 후에, 반드시 돌아와서 당신의 묘를 지키겠습니다"

 

등소평은 특례로 허세우는 고향에 매장하도록 허용해주었다. 허세우의 묘는 부모의 묘 바로 곁에 있다. 그리하여 그는 죽어서 효를 다하겠다는 마지막 바램을 이루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