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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수양제)

중국인들은 왜 수양제(隋煬帝)를 싫어하는가?

by 중은우시 2007. 3. 15.

글: 장굉걸(張宏杰)

 

중국역사는 "전형적인 인물"로 구성되어 있다. 사관(史官)들은 일관되게 선험적으로 강청 동지의 지시를 관철하여 '중간인물'로 쓰지 않았다. 그저 '신'으로 만들거나, '귀신'으로 묘사했다. '신'계열의 인물로는 문무주소(文武周召, 문왕 무왕 주공 소공), 공맹정주(孔孟程朱, 공자 맹자 정호 주희)들인데, 이들은 신성하고 완벽하며 아무 흠이 없는 것으로 모셔진다. '귀신'계열의 인물로는 하걸상주(夏桀商紂, 하나라걸왕, 상나라주왕), 진시황, 조맹덕(조조), 진회등이다 이들은 머리위에는 종기를, 발바닥에는 고름이 흐르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런 "귀신"계열의 인물중에도 수양제 양광은 가장 추악하게 그려진 인물이다. 이 고금제일악인의 랭킹에서 Number 1을 차지하는 그에게는 인류에게 있어서의 거의 모든 사악한 아이템이 다 집중되어 있다: 음탕, 탐욕, 교활, 음험, 이기, 냉혈, 잔혹, 혈성, 혼란....그는 인류가 범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범죄를 범한다: 형을 죽이고, 모친을 간음하며, 부친을 죽이고, 동생을 유폐시키고, 하늘을 거역하며, 백성을 학대한다...

 

사실상, 당나라때로부터, 역사학자들은 여러번 이를 지적했다. 소위 "호색" "음일" "음모" "시부"의 절대다수는 대부분 야사의 작자들이 수양제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라고. 정사에서는 아무런 근거도 찾을 수 없다고. 만일 이런 허황하고 근거없는 사료들을 잘 읽어보면 우리는 바로 수양제 양광이 사실은 아주 웅재대략(雄才大略)을 가지고 상당히 근검하고 일에 몰수했던 군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14세때, 강남대족의 딸인 소씨와 결혼한다.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 이 본부인과 금슬이 아주 좋았으며, 서로 마음이 잘 통했다. 그와 같이 한 여자와 이토록 정을 나눈 황제는 중국의 역사상 드물다. 그는 일찌기 남조가 멸망한 이유를 "강동의 여러 황제들이 모두 지분(여자)를 가까이하고, 깊은 궁궐에 들어앉아 백성들과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라고 분석한 바 있다. 14년동안 재위하면서, 그는 넘치는 정력으로 궁중에 머물렀던 시간은 4년에 불과했고, 나머지의 대부분의 시간은 전국을 순유하는데 보냈다. 그는 일생동안 정치에 신경을 많이 썼으며, 새벽까지 일하고 식사도 거르는 워콜릭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대운하를 만들었는데, 진정한 목적은 통일되지 얼마되지 않은 남방과 북방을 연결시켜 소통시키는 것이었으며, 국가의 통일을 공고히 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고구려를 공격했는데, 이것도 변방의 위협을 제거하고 주변국가의 조공시스템을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사 실상 그의 통치기간 전반부는 공적이 아주 휘황하다. 비록 수양제가 연속 4번이나 전국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세금등 부담을 면제해주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국고는 충실했었고, 인구도 계속 늘어났다. 자치통감에서는 "이때 천하에는 군이 일백구십, 현이 일천이백오십오, 호가 팔백구십만여 있었다. 동서 구천삽백리, 남북 일만사천팔백일십오리였다. 수나라의 강성함은 이처럼 극에 달했다"

 

그러나, 아주 불행하게도, 수양제에 관한 야사전설이 그렇게 황당무계하고, 헛점이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는 천여년간 그대로 얘깃거리로 전해져 내려왔다. 그의 일생동안의 공적을 언급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것은 당연히 "성공하면 왕이요, 실패하면 도적" 혹은 "담장이 무너지면 사람들이 다 와서 밀어버린다"(한번 세력을 잃으면 누구나 공격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수양제라는 이 사람의 기질과 성격이 중국민족이 좋아하는 것과는 차이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수양제는 전통사가들이 아주 싫어하는 '일을 벌이기 좋아하고, 공을 드러내기 즐기는' 황제이다. 수양제는 수문제가 그에게 남겨준 안정되고 부유한 통치기반을 물려받는다. 그러나, '수성(守成)'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천하가 평안한지 오래되고 국토와 인구가 모두 성하니 진시황과 한무제와 같은 일들을 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삼재(천.지.인)를 겸하여 극에 이르고, 육합(동서남북상하)을 하나의 집안으로 만드는" 왕조를 만들고자 하였으며, 역사책에 자기의 위대한 이름을 남기고자 하였다. 이로써 자손만대에 감히 비길 사람이 없는 천고의 최고황제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살아있을 때 이러한 이상을 완성하기 위하여, 그는 통치기간동안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기획하고 걔혁하였으며, 하루도 공사를 벌이고, 바깥을 순시하고, 전쟁을 진행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낙양으로 천도하고, 대운하를 파고, 장성을 수리하고, 사방오랑캐를  굴복시키는 등 그의 모든 조치는 경천동지한 것들이었다. 동시에 그는 호기심이 강했고, 탐구욕도 컸다. 그는 일생동안 다른 황제들이 감히 시도하지 못하거나 하지 아니한 일들을 해냈다. 그는 십여만의 대군을 이끌고 해발 4천미터의 기련산 대발두곡을 넘었는데, 이것으로 그는 중국역대제왕중 유일하게 서부의 딸을 밟아본 사람이 된다. 그는 외부세계에 대하여도 호기심이 충만하였다. 여러 지방의 사람을 만나고, 구석진 곳에 있는 나라에까지 사신을 보낸다. 멀리 중앙아시아, 페르시아등지에도 사신이 갔으며, 그들은 마노배(瑪瑙杯), 사자피(獅子皮), 화서모(火鼠毛), 오색염(五色鹽)등을 가지고 돌아온다. 남쪽의 거대한 바다에도 관심이 많아, 일찌기 세 번이나 당시에는 미지의 도서인 대만을 탐험하게 한다.

 

이 모든 일들은 중국전통문화의 금기를 건드리는 것들이었다. 중국문화는 세계에서 가장 욕망을 두려워하고 욕망을 적대시하는 문화의 하나이다. 중국문화의 저변은 빈곤(貧困)이었다. 수천년동안 빈곤과 인구압력의 사이에서 겨우겨우 헤쳐살아온 이 토지는 확실히 너무 많은 욕망을 담기에는 부족했다. 순자는 이렇게 말했다. "바라지만 얻을 수 없으면 얻으려는 것이 생긴다. 얻으려는 것이 한도가 없게 되면 서로 싸우지 않을 수 없다. 싸우면 어지러워지고, 어지러우면 가난해진다" 욕망, 여러가지를 하려고 하는 것, 일벌이기 좋아하는 것은 사회불안정의 위험한 요소라고 보았다.

 

천하를 잘 다독거리고, 경쟁을 방지하고, 혼란을 예방하려면, 중국문화는 욕망을 적대시하여야 했다. 주희는 일찌기 이렇게 단언한 바 있다. "먹는 것은 하늘의 이치이다. 맛있는 것을 원하는 것은 사람의 욕망이다" 즉, 자기의 배고픔을 해결하려는 것은 한 사람의 권리이다. 그러나, 배부른 후에 맛있는 것을 찾는 것은 죄악이라는 것이다. 빈곤문화는 일종의 진취심이 없는 문화이다. "개혁" "흥작(興作)"은 중국문화에서 아주 위험한 단어였다. 대부분의 중국인에게는 정치의 정수는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고 안정이 최고의 가치이며, 일을 안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청정무위(淸靜無爲)"는 정치의 최고가치였다.

 

만일, 사회속박을 고정된 궤도에 놓을 수 있다면, 천하의 자손만대에 불변하는 성인이 규정한 예법의 원칙에 따라 돌아가게 하는 것이 왕조의 가장 이상적인 정치모습이었다. 현실이 아무리 엉망진창이더라도, 일 하나를 더 만드는 것은 일 하나를 줄이는 것만 같지 못했다. 미루고 안하는 것이 위기를 터뜨리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개혁같은 것은 하지 않고, 백성을 괴롭히는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전통적인 정치에서 아주 중요한 원칙이었다. 비록 수양제의 등극시에 수왕조의 재정실력이 역대왕조중 최고였고, 축적한 것만으로 5,60년을 버틸 수있는 풍부한 재정적인 기초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 자신이 수왕조를 위하여 사용하고, 이것이 제국에 더 큰 이익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역사가 수양제를 용서할 수 있는 사유가 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중국민족이 수양제를 싫어하는 것은 그가 실패하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성격과 기질이 주류문화에 배치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싫어하는 것은 의식적인 것만이 아니고, 무의식적이거나 잠재의식적인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수양제가 진시황보다 더욱 불공정한 대우를 받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