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오효파(吳曉波)
부동산문제는 오늘날 중국을 괴롭히고 있다. 위로는 정부에서 아래로는 청년까지 이것때문에 고뇌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 그 원인은 각양각색일 것이다. 오늘은 그 중에서 한 가지를 논하기로 한다. 그것은 바로 공상자본의 투기화이다.
필자는 예전에 전답조사업무를 한 적이 있다. 안휘남부 농촌에서 수많은 저택들을 보았다. 모두 화려하고 휘황하여 놀라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놀라는 와중에 필자는 한가지 문제에 골몰하게 되었다: 이들 대저택의 주인은 예전에 회양일대의 아주 유명한 염상, 차상으로 소금과 차를 판매하는 것은 명청 두 왕조때 가장 폭리를 취할 수 있는 사업이었다. 정부의 라이센스가 필요하기 때문에 오늘날로 말하자면 전매품의 성격이 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들 염상, 차상은 자금을 가지고 확대재생산을 하지 않고, 돈을 궁벽진 고향으로 가지고 와서, 보기에는 좋지만 그다지 쓸모는 없어보이는 대저택을 짓고, 효율도 그다지 좋지 않은 땅을 사는데 쓴 것일까?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해석한다. 이것은 중국인들의 낙엽귀근의 전통이라고. 고향의 종족을 빛내려는 사상에 물들었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상인들은 원래 국경도 없다. 돈만 벌 수 있다면, 국가도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인데, 하물며 고향은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다시 한번 사마천의 <<사기>>를 읽어보고는 사마천의 토지관에 사로잡혔다. 중국의 역사가중에서, 사마천은 가장 상업을 중시한 사람이다. <<사기>>에 <<화식열전>>을 별도로 두어 선진시기와 한나라초기의 여러 대상인들을 소개했다. 나중에 사가들의 역대사서에는 모두 <<식화지>>가 들어가는데, 거의 상인들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대를 내려갈수록 더 못해졌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것이다. 사마천은 '부'를 세 가지로 나누었다. 본부(本富), 말부(末富), 간부(奸富). '본부'는 농사로 돈을 번 것을 말한다. '말부'는 공업상업으로 돈을 번 것을 말한다. 소위 '본부를 최고로 치고, 말부를 그 다음으로 치며, 간부가 가장 낮다' 그러나 사마천은 곧이어 이렇게 말한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려면, 농사는 공업만 못하고, 공업은 상업만 못하다."
이것은 이상하다. 농사를 지어서 돈을 버는 것을 '본부'라고 하면서, 왜 돈을 버는데 있어서는 '말부'보다 못할까? 만일 모두 '본부'를 추구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손해보는 길이 아닌가? 좋다 곧이어 사마천이 내놓은 세번째 결론을 보자. 이것은 '재산관리제안'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익을 얻는데 있어서, '말'로서 재물을 모으고, '본'으로서 이를 지킨다' 오늘날의 말로 하자면, 상업이나 공업을 통하여 돈을 번 다음에, 돌아와서 집과 땅을 사고, 집과 땅을 통해서 재산을 굳건히 지켜라는 말이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하지 않는가? 중국의 집값은 이렇게 하여 오르고 있지 않은가? 민중의 고뇌도 여기서 생기지 않는가?
그러나, 비판은 비판이고, 사실은 얼음처럼 차갑다. 역사학자인 이검농이 <<선진양한경제사고>>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마천의 관념이 이러했고, 진한시대 대다수인사의 관념도 이러했다. 심지어 진한이래 오늘날까지 중국의 대다수사람들의 생각은 여기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모든 사농공상의 활동은 마지막에는 대량의 토지를 취득하여 부자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검농 선생이 이 글을 쓴 것은 1950년대이다. 반세기가 흘렀지만 철칙은 철칙이다.
사람들은 물어볼 것이다. 왜 모두 고수익의 공상업에서 돈을 번 다음에, 다시 저수익의 토지에 투자를 굳이 하느냐고. 사마천은 이 문제에 직접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필자가 그 최후의 비밀을 풀어보겠다. 중국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은 전세계에서 IQ가 가장 높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가장 먼저 공상업이 농업보다 돈벌기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일찌감치 이들 산업을 국유화했다. 얼마나 일찌감치 그러했는가? 들으면 아마도 놀라자빠질 것이다. 기원전770년이다. 제나라의 관중이 소금과 철을 국유화하였다. 그때, 유럽의 철기는 아직 보급되지도 않았다. 아메리카대륙도 아직 사냥이나 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이후, 진한당송명청민국을 거쳐 돈을 벌 수 있는 공상업은 국가가 국영으로 수용해버렸다. 소금과 철에서, 차와 술, 조운까지, 대외무역까지, 광산철로까지, 은행전신까지, 현재 중국에는 국자위라는 부서가 있어서 이들을 관장하고 있다.
국가가 공상업을 통제한 후에, 개인자본의 역할은 아주 미묘해진다.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서 농업보다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아무도 거기서 크게 사업을 벌이지 못한다. 왜냐하면 천년이래의 교훈은 우리에게 말해주기 때문이다. 조금만 크게 사업을 벌이면, 반드시 국가이익과 충돌하게 되고, 국가이익과 싸우게 되면 멸문이나 가산몰수를 당하게 된다. 필자는 한번 계산을 해본 적이 있다. 사용용도가 가장 많은 철기공장을 예로 들어, 선진때부터 청나라말기까지, 최대규모의 개인기업은 천명이 넘지 못했다. 2000년간 규모는 이보다 더 커지지를 못한 것이다.
프랑스의 연감파 사학자인 Braudel은 그의 저작에서 이렇게 쓴 바 있다: 중국이건 이슬람사회이건 정부의 권력이 너무 컸다. 부유한 비통치자는 진정한 안전을 누릴 수 없었다. 그리하여 가장 성공한 상인들이 부닥치는 영원한 문제는 어디에 그들의 이윤을 재투자할 것인가였다. 그는 최후에 이렇게 말했다: "중국상인은 언제든지 몰수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시종 떨쳐버리지 못했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사마천의 세번째 말이 유령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무릇 공상업으로 돈을 번 사람이라면, 바로 토지를 구매한다. '말로서 돈을 벌고, 본으로 이를 지키는 것'이다.
여기까지 읽으면 분명히 느낄 것이다. 천년중국에서 토지는 사실 흙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화폐의 역할을 했다는 것을. 자산계급이 정부역량에서 도피하는 리스크헷지용의 도구였다는 것을.
오늘날을 보자. 중국의 집값은 왜 이렇게 계속 올라가는가? 도시화운동, 지방재정이 토지에 볼모로 잡혔다는 등의 원인뿐아니라,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바로, 최근 들어 대량의 공상업자본이 부동산업에 속속 밀려들고 있다는 것이다. 기업가들은 국유화조치등으로 실업생산에 싫증을 느끼고, 투기심리가 커졌다. 이런 배경하에서, 부동산세를 징수하든 토지공급량을 늘이든 그 어느 것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해결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시장화개혁이다. 공상업경제를 활성화시켜, 공상업자본이 공상업분야에 머물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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