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동사도(東沙島): 청나라말기 대일외교전의 승리

중은우시 2010. 6. 8. 22:46

글: 설이(雪珥)

 

군대의 나팔소리가 들리면서 완전무장한 광해(廣海)함의 관병은 정렬을 했다.

선명한 황룡기(黃龍旗)가 동사도의 상공에 높이 올라갔다. 광해호에서 바람을 맞던 황룡해군기가 멀리서 호응했다. 귀를 찢을 듯한 대표소리가 광해함에서 울렸다. 이것은 21발의 예포였고, 막 하강한 일본국의 태양기와 청나라의 품에 다시 안긴 동사도를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1909년 11월 19일, 선통원년, 청나라가 처음으로 열강의 수중에서 자신의 영토를 회수한 기념비적인 날이다.

광동후보지부 채강(蔡康)과 일본주광저우부영사 굴의귀(掘義貴)는 양국정부를 대표하여 이양의식에 참가했다. 겨우 1.8평방킬로미터에 불과한 남해의 문호인 작은 섬 위에 서 있던 두 사람의 심정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남해상공의 예포성은 전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이전에 1년동안 서방의 신문은 청나라와 일본간의 Pratas라고 불리는 이 작은 섬을 둘러싼 분쟁을 대거 보도했다. 지금 톤수나 화력에서 예전의 북양함대에 비견할 수 없을 정도인 광해함이 전세계에 북양함대에 전혀 손색없는 기개를 보이고 있다.

 

1909년, 재건중이던 대청해군은 자신의 약소함에도 불구하고 황해에 거북이처럼 웅크리고 도광양회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깊은 바다로 나아갔다. 일찌기 7년전에 대청해군은 남해를 순시하고, 깃발을 꽂고, 비석을 세우고, 주권을 선언했다. 해군의 남진에 관련된 정부문서에는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군함이 바다로 나가는 것은 위로는 위엄과 덕을 휘날리고, 아래로는 상인교민을 위문하기 위함이다. 군정(軍政)과 상정(商政)은 서로 보완하여 상호이익을 찾을 수 있다. 청나라는 이미 전세계를 놓고 국가이익을 추구했던 것이다.

 

자그마한 동사도는 1909년 외교와 군사의 촛점으로 등장한다.

이 섬은 5000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해역을 지배하는 전략요충지이다. 어민들의 눈에는 돈을 버는 보고이다.

이곳에 와서 물고기를 잡던 청나라의 어민들 중에는 갑부들이 적지 않게 탄생했다. 그리하여 남해일대에는 '돈을 벌려면 동사로 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런 보고는 당연히 대만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인들도 끌어들이게 된다.

니시자와 기치지(西澤吉次)는 일본상인이다. 1901년 상선이 폭풍을 만나 항로를 벗어나서 이곳에 표류하게 된다. 그런데, 그는 섬에 인산염 광물(새똥)이 풍부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는 동사도의 인산염광물은 15-20피트두께에 달하였다고 한다.

 

다음해(1902년), 니시자와 기치지는 다시 배를 타고 와서, 대량의 인산염광물을 캐내어 대만으로 가져가서 판매한다. 이것은 그가 동사도에서 얻은 첫번째 큰돈이었다. 이 해에 남오총독 이준은 "복파"호, "주항"호, "광금"호의 세 척의 군함을 이끌고 서사, 동사군도를 순시한다. 그리고 주요한 도서(동사도 포함)에 석비를 세우고, 주권을 선언한다. 이번 순시에서 대청해군은 처음으로 일본인들이 동사도를 욕심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니시자와 기치지는 동사도를 대규모로 개발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얼마후 러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의 해상운송능력이 부족하여, 그의 웅대한 계획은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전후, 니시자와는 마침내 1907년 여름, 120명의 노동자를 이끌고 동사도에 상륙하여, 이 '무인도'를 '니시자와섬'으로 명명하고, 일본국기를 올린다.

 

니시자와가 남긴 문헌에서, 동사도를 개발하는데 대하여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고의로 몇 가지를 감춘다: 이 '무인도'에서 일하던 중국어민을 그는 폭력으로 강제추방시켰고, 용왕묘, 형제소(사당)은 모조리 철거했다. 그리고 수백개의 중국인묘도 없애버리고, 유골은 화장하여 바다에 뿌렸다.

이해 겨울, 일본군함은 동살도로 오고, 상선 "이진환(二辰丸)"호를 호송한다. 그리고 일본이민자와 군사물자를 가득 실었으며, 동사도에 장기간 주둔할 계획이었다. 당시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타임즈는 일본의 구축함이 동사도에 들어간 것은 아주 중요한 외교적 조치라고 보도했다.

 

대청정부의 반응도 상당히 신속했다. 양강총독 단방(端方)은 먼저 이 소식을 듣고, 신속히 외무부에 상황을 보고한다. 그는 전문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민월(복건,광동)의 사람들중에서 오래 항해한 사람들이나 지리학에 밝은 사람들은 모두 이 섬이 우리나라의 영토라는 것을 알고 있다" 동시에, 단방은 양광총독 장인준(張人俊)에게 통보하여, 이 섬은 '확실히 중국의 땅이니 그냥 놔두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이치대로라면, 양강총독이 양광의 일에 간여하는 것은 관료사회의 금기에 속한다. 그러나 단방이든 장인준이든 이것을 따지지 않았다는 점은 높이 살만하다. 두 사람은 빈번하게 전문을 주고 받으며 자원을 준비하고, 자료를 찾고, 근거를 마련했다. 그리고 1908년 년말, 공동으로 남양해군에 현지조사를 요구한다. 1909년 구정이 지난 후, 남양해군의 부장 오경영은 비응호를 이끌고 동사로 항해한다. 그리고 이 섬이 확실히 일본인에 점령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사진을 찍어서 증거로 한다.

 

장인준은 곧 동사도에 관한 각종 문헌, 영국,프랑스해군의 해도, 비응호의 사진까지 포함하여 북경이 외무부로 보낸다. 공문에서 장인준은 일본인들이 '사사로이 점유하였으니, 이를 회수해오지 않으면, 여러 나라들이 서로 땅을 차지하는 선례가 될 것이니, 이를 쫓아내는 일은 작은 일이 아니다" 그리고 외무부에서 '신속히 일본 공사와 교섭하여 일본의 상인과 백성을 모조리 철수시키고, 우리가 파견한 인원이 접수하여 관장하도록 하며, 다른 한편 조치를 통하여 주권을 널리 알리기"를 희망했다.

 

1909년 초여름, 비응호는 세관순시선과 함께 다시 동사도로 가서 증거를 수집한다. 그리고 가는 길에 서사군도도 순시한다. 장인준은 북경에 보낸 보고서에서 동사, 서사는 '유럽에서 중국으로 오는 요충지이고, 남양의 가장 중요한 문호이므로 이것을 버려두고 다스리지 않으면, 단순히 지리적인 이점을 포기하는 것으로 애석할 뿐아니라, 영토를 중시하고 해상권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된다." 미국의 크리스쳔 사이언스 모니터지는 청나라의 특별파견함대의 '오사령관'(오경영)은 조정에 거주가능한 모든 남해도서에 하루빨리 이민을 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고 보도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즈는 심지어 계급이 그다지 높지 않은 오경영의 화상을 게재하기도 했다.

 

크리스쳔 사이언스 모니터지는 보도와 동시에 북경정부가 광동지방당국에 이 사실을 공표하지 말도록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제불매운동을 자극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청나라 중앙정부가 동사문제에 있어서 언론을 통제했다는 여하한 사료도 찾아볼 수 없다.

동사도사건은 1909년 정치의 촛점이 된다. 이때의 민의의 주류는 여전히 일제불매운동이었다.

1년전(1908년), 동사도로 이민자와 군사물자를 운송했던 '이진환'호는 대량의 군수물자를 밀수하여 혁명당에게 제공하다가 마카오해상에서 대청해군에 저지당했고, 그 자리에서 대량의 탄약을 압수당한다. 분노한 중국해병은 선상의 일본국기를 찢어버린다. 그러나, 일본, 포르투갈의 양국의 외교압력하에, 그해 3월 19일, 청나라정부는 이진환호를 석방하고, 21발의 예포를 발사하여 사죄를 표시한다. 월상자치회는 그날을 '국치일'로 선언하고, 일제불매운동을 호소한다. 이에 응하는 자들이 전체 광동성, 상해, 홍콩, 남양군도에까지 이르렀다. 이는 중국역사상 첫번째 일제불매운동이었다. 일본무역의 하락폭은 1907년에 비하여 6%에 이르렀다. 결국 일본은 배상금요구를 취소하였고, 마카오 포르투갈 당국은 군사물자의 밀수를 엄격히 단속하겠다고 약속하며, 중국정부와 국경선협상에 들어간다.

 

이진환호 사건이 막 끝나자마자 동사도사건이 터졌다. 광동의 각계와 월상자치회의 기획하에, 연속하여 수천명의 군중집회가 열린다. 중앙의 섭정왕 재풍에게 글을 올려, '중국어민과 섬의 재산을 보호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정부가 포기하더라도, '국민들의 능력을 모두 동원하여 이를 구해내겠다'고 선언한다.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는 보도를 통하여 이때 중앙정부가 선명한 기치를 내걸고 주권을 선언하지 않으면, 민중들이 정부를 겁쟁이이자 무능한 자로 보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최초의 외교교섭에서 일본정부는 동사도가 '무인도'라는 주장을 계속했다. 그러나, 장인준등이 충분히 준비하여, 대량의 역사자료와 증인, 물증을 제시했다. 일본인들은 결국 중국이 동사도에 대하여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후 일본인은 니시자와 기치지가 이미 건설한 인프라시설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다. 중국측에서는 이에 대응하여, 일본상인은 중국정부에 납부하지 않은 어업세와 광산세를 납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일본측은 안봉철도를 개축하여 중일양국간에 만주에서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만주와 화북에서 일제불매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일본인들은 할 수 없이 동사도에서 손을 떼어 양쪽에 전선이 형성되는 것을 피한다.

그후 몇번의 설전끝에 중일쌍방은 1909년 10월 11일 동사문제조약을 체결한다. 여기에서 동사군도는 중국의 고유영토임을 분명히 하고, 일본인들은 즉시 철수한다; 중국은 광동호은16만위안으로 섬에 이미 건설한 시설을 매입하고, 동시에 일본인은 각종 세금과 재산파괴에 대한 배상으로 광동호은 3만위안을 납부한다.

 

동사도사건에서, 청나라정부는 민의존중의 측면이나, 각 부서간의 업무협력측면에서 모두 아주 뛰어났다. 더욱 고귀한 점은 군사력이 강하지 못했던 대청정부에서, 과감히 용기를 내어 간여하고, 뛰어난 담판수단을 보였다는 점이다.

1909년, 대청의 사병이 동사도등 남해각섬에 무장주둔하기 시작한다. 그 효과는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