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의화단 사건에서 전국각성, 주로 화북지방의 직예, 산서, 내몽고 및 동북지방에서는 외국인 심지어 중국의 기독교도에 대한 대규모 도살사건이 많이 벌어졌다.
교회측에서 제공한 사망자수와 부상자수에 대한 통계는 다음과 같다(중국은 공식적으로 사료로 확인해주지 않고 있다): 모두 241명의 외국인(천주교 선교사 53명, 개신교 선교사 및 자녀 188명, 그중 아동 53명), 중국기독교도 2만여명(천주고 18000명, 개신교 5000명)이 1900년 여름에 도살되었다.
산서성 전체에서 피살된 중국천주교도는 5700여명이며, 개신교도는 수천명이라고 한다. 그중 내지회(內地會)가 가장 많았고, 공리회(公理會), 영국 침례회등도 있었다
7월 9일, 태원순무아문의 앞에서 태원순무 육현이 천주교 각회 선교사 12명(이탈리국적의 艾士杰 및 富格辣의 주교 2명, 신부,수도사 3명, 수녀 7명), 개신교 선교사 및 그 가족자녀 34명(영국 침례교회 및 수양선교회에 속함, 아동 11명 포함), 합계 46명을 죽였다.
산서는 전국에서 외국인과 백성들을 가장 많이 죽인 성이다.
내몽고에서 7월 19일, 청나라군대는 몽골 서남교구 주교성당이 소재한 지역으로 공격해 들어가서 천주교도를 대거 살해했다.
벨기에국적의 한묵리(韓默理) 주교는 '손과 발을 같이 묶고, 대나무장대에 꽂았다' 그 후에 '쇠사슬을 어깨뼈에 뚫어넣고, 철장속에 가두었다' 그리고 사방을 끌고 다녔다. 7월 24일, 토크토성에서 피살된다. 몽골 동부교구에서는 난평현에서 신부를 생매장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몽골중부교구에서는 서만자(하북 숭례) 주교성당에서 5000명의 교도가 난을 당했는데, 절대다수(3200명)가 피살당한다.
직예(하북)는 총독 유록과 효사 정옹이 지지하여, 의화단이 전체 성에 퍼져 있었다. 이 성의 많은 천주교도(지금도 이 곳은 천주교도가 가장 많은 성이다)들은 돌연 사망의 위협에 처하게 된다. 그리하여 속속 천주교도들이 마을에 모여 보루를 쌓고 항거했다. 7월 20일, 진택림이 이끄는 청나라군이 경주 주가하촌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는데, 이 마을에 모여있던 3000여명의 천주교도와 두 명의 신부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조리 죽였다. 이는 1900년에 사망자수가 가장 많았던 도살사건이다.
주가하에 있는 50575명의 신도들 중에서 5153명이 죽는다. 헌현 장장의 예수성심주교성당만 보전된다. 보정 부근의 동여촌에는 9000명의 천주교도가 집중적으로 모여 피난했다. 이들은 4만명의 의화단의 공격을 격퇴시킨다. 그리하여 나중에 북방의 유명한 성모성지가 되고, 중국에서 천주교신도가 가장 많이 집중된 마을이 된다.
봉천(요녕)에서 피살된 천주교도는 1400여명이다 그 중에는 주교 1명, 신부 10명이 포함되어 있다. 절강의 구주(衢州), 태주(台州)에서도 집단도살사건이 벌어졌고, 호남의 형주와 섬서에서도 주교, 신부 피살사건이 벌어진다. 산동, 하남에서도 십중 칠팔의 교회성당은 파괴된다.
의화단의 행위는 무고한 외국인을 살해하는 외에, 무고한 중국인들도 많이 살해했다(수량은 서양인이나 천주교도보다 훨씬 많았다). 그 대상은 일룡(一龍, 광서제), 이호(二虎, 이홍장과 혁광), 경관대신(소위 十三羊, 혹은 三百羊, 의화단은 경관중에서 18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한다)에서부터 서양인, 신자, 보통백성(소위 十毛)에 이르렀다. 법도 하늘도 없었다.
도살뿐아니라, 간음약탈도 행해졌다. 그 비인도적인 만행은 2차대전의 일본군보다 훨씬 심했다. 중국의 도덕관념이나 서양의 도덕관념으로 볼 때, 의화단의 행위는 야만적이고 잔혹하며 인성을 상실한 것이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이런 내용들이 있다:
"성안에 낮에는 불지르고 약탈하며, 불길이 밤낮으로 이어졌다...마음에 들지 않는 자가 있으면, 바로 신자라고 지목하며, 온 집안을 살륙했다. 경사에서 죽은 자가 십수만명이다. 그들이 사람을 죽일 때는 칼과 창을 함께 내리쳐서 사지를 절단하는데, 영아들 중 태어난지 한 달도 되지 않는 자도 있었다. 살인의 잔혹함은 인간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이다."
"경사가 흥성할 때는 거주하는 사람이 4백만이었는데, 권비의 난이 일어난 후 도적이 날뛰며, 약탈을 하여, 그 해를 입지 않은 자가 없다. 도시가 적막해지고, 여우 이리가 낮에도 출몰하는데, 마치 폐묘 사이를 다니는 것같았다."
"의화단이 교민과 백성을 죽이는데, 여러가지 잔혹한 도구를 준비했다. 절구로 찧기, 불태워서 갈기, 산채로 매장하기, 불로 지지기, 사지를 분리시키기, 허리를 자르기등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다. 경서의 천주교 묘지에서는 묘지를 발굴하여, 마테오 리치(利瑪竇), 방적아(龐的我), 탕약망(湯若望), 남회인(南懷仁)등 여러 유명한 서양선교사들의 유골을 파내었고, 하나도 화를 입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이전 왕조와 현 왕조의 어비들도 모두 파괴되었다. 보정에 속하는 장등이라는 곳에 신도가 많았는데, 의화단은 그 부녀들을 붙잡은 후, 구덩이를 파고 거꾸로 묻어서 흙을 묻어 하체가 드러나게 하고는 이를 보고 웃고 즐겼다."
홍콩사람, 마카오사람, 타이완사람 및 해외화교들은 의화단에 대한 평가가 아주 나쁘다. 의화단은 이미 미신, 폭력, 금수의 상징이 되었다. 더더구나 사람을 욕할 때 쓰는 말이 되었다.
의화단은 거의 무고한 사람을 붙잡아서 분을 풀었다. 외국인들이 무고하게 피해를 입었을 뿐아니라, 많은 중국인들도 피해를 직접 입었다.
당덕강은 의화단을 문화대혁명때의 홍위병과 비교하는 것은 홍위병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홍위병은 최소한 온 집안을 살해하고, 시신을 파내고, 부녀를 강간하고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지는 않았다.
한가지 주목할 점은 2000년 바티칸에서 '성인'으로 봉한 일이 있는데(명단은 대만성당에서 추천했다), 대부분 성인으로 봉해진 사람들은 의화단의 난때 순교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대륙에서는 여전히 이들 순교자는 제국주의의 방흉(幇凶)이라고 공식적으로 취급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식입장은 여전히 의화단운동은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중국민족의식을 각성시킨 사건으로 중국근대민족주의의 남상이라고 본다.
1949년이후의 중국인민공화국 역사교과서의 평가는 역겨울 정도이다:
"의화단애국운동이 제국주의침략에 항거했으나 실패했다는 것은 다음을 증명한다. 정확한 지도사상이 없으면 인민혁명의 승리가 없다는 것을. 청나라말기의 의화단운동 및 중화민국시대에 21조에 반대한 5.4운동, 5.30운동은 근대이래 중국이 제국주의침략에 항거한
3대 군중성민족주의운동이다. 그중 5.4운동은 주로 제국주의정치침략에 반대했고, 의화단운동과 5.30운동은 제국주의정치,경제 및 문화침략에 반대한 운동이다. 지속한 시간이 더욱 길고, 영향도 더욱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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