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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임칙서(林則徐)는 역사의 공신인가, 죄인인가?

by 중은우시 2010. 5. 28.

글: 마가중국(馬可中國)

 

청나라의 중국에 영향력이 있는 역사인물을 고르라면 아마도 금연공신(禁煙功臣) 임칙서 뿐일 것이다. 세계를 놓고 보더라도, 임칙서의 역사적 지위는 흔들릴 수가 없다.

 

그러나, 만일 문을 닫아걸고 말해보자. 임칙서를 중국인 자신의 역사에서 도대체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이것은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중국을 반봉건,반식민지로 몰고간 그 "아편전쟁(鴉片戰爭)"에서 임칙서는 중요한 당사자이며 참여자중 하나이다. 만일 역사의 '지엽말단(枝葉末端)'을 제거하고 본다면, 임칙서는 두말할 나위없는 민족영웅이다.

 

유감스러운 점은, 역사는 역사라는 것이다. 바로 이 주목하지 않는 '지엽말단'이 임칙서의 시비공과를 기록하고 있다.

 

그 영향이 컸던 전쟁에 대하여 오늘날 우리는 '아편'이라는 두 자를 덧붙여서 '아편전쟁'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자세히 사료를 살펴보면, 아편전쟁과 아편은 원래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편은 일찌감치 당나라때, 페르시아에서 중국으로 들어왔다. 아편은 중국에서 아주 듣기 좋은 중국식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아부용(阿芙蓉). 지금은 아편이라는 말만 들어도 얼굴색이 변하지만, 과거에는 진귀한 약품의 하나로 여겼다. 상류귀족과 문인아사들 사이에서 유행하였던 것이다. 왜 아편이 다른 나라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대, 청나라에서만 사회의 공해가 된 것일까? 이는 반드시 중국인들의 발명창조능력에 감탄해야 할 것이다.

 

아편은 원래 그 아편인데, 청나라인 중국에 들어오면 금방 '먹는 것'(食)에서 '들이마시는 것'(吸)으로 바뀌어 버렸다. 약품에서 사치품으로 신분이 바뀐 것이다. 바로 이러한 아편사용방식과 용도의 근본적인 변화로 인하여 아편은 중국에서 사회에 해를 가하는 마약이 된 것이다. 대다수의 할 일없는 청나라 고관귀족들은 여색, 도박에 지친 다음에 아편속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찾았다.

 

임칙서는 중국에서 아편을 금지한 첫번째 인물이 아니다. 아편이 중국에서 수백년간 정상적으로 유통된 후, 청나라 건륭연간부터 관청에서 금지하게 된다. 아편이 금지된 후, 아편은 각지 관리들이 돈을 버는 거리가 된다. 그들은 보호를 명목으로 고액의 뇌물을 받았다. 아편장사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커지게 된다. 영국아편판매상들은 고민에 빠졌다: 바다에서 그들과 만나는 사람들은 모조리 청나라정부와 해군의 관리들이다. 이것을 '밀수'라고 할 수 있을까?

 

관료사회의 부패가 극에 달하였고, 사회기풍도 문란하였다. 이것이 바로 청나라에서 아무리 금지하고자 해도 아편을 금지할 수 없었던 근본원인이다. 만일 도광연간이 아니어서, 청나라의 군대가 각지 의군들에게 궤멸당하여 '나라에 쓸만한 병사가 없었지' 않았더라면, 임칙서는 역사무대에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고, 나타나더라도 그렇게 큰 일을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임칙서가 처음에 광동에 왔을 때, 아무도 그가 진짜로 아편을 금지시킬 줄을 몰랐다. 현지관리들은 관례대로 돈을 집어주고, 이 흠차대신을 돌려보내려고 했다. 아편밀매상들도 더 많은 돈을 받아가려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임칙서에게는 온건책도 강경책도 모두 먹히질 않았다. 비록 중간에 어려움은 있었지만, 아편금지활동은 비교적 순조로웠고, 대량의 아편도 파기해버렸다.

 

그렇다면, 아편의 거액손실에 영국인들이 화가나서 전쟁을 벌이게 된 것일까?

 

몇년후, 저명한 학자 반미평이 영국의 자료를 조사하다가 발견한다. 영국정부는 아편손실로 인하여 간섭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영국정부는 청나라정부가 아편무역을 제지할 권리가 있다고 보았다. 1838년 6월 15일, 영국 외무대신 Henry John Temple Palmerston이 주중국상무감독 Charles Elliot에게 보낸 훈령에는 이런 말이 있다: "아편밀수무역에 관하여 영국의 신민이 다른 나라로 가서 무역국가의 법률을 파괴하는 것은 여왕폐하정부가 간섭할 수 없는 일이다. 이들이 입은 손실은 반드시 스스로 부담해야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편밀매꾼의 보호자'인 영국주중국상무감독관 Charles Elliot도 아편무역의 반대파이다. 그는 Palmerston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말한다: "영국신민이 아편밀수무역을 하는데 대하여 마음속으로 미워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아편밀수는 영국이 중국에서의 합법적인 무역을 확대하는데 위해가 된다고 보았다.

 

바로 이 Elliot가, 영국여왕에게 요청하지도 않고, 임칙서와 협상을 하지도 않고, 아편무역상들에게 영국정부가 아편상의 손실을 물어줄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영국상인들에게 모든 아편을 낸호게 한다(2만여상자). 이 조치에 임칙서도 아주 의외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있지도 않은 국제법의 조항을 들먹여서 임칙서를 속인 것을 보면, 공과가 서로 비겼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Elliot를 아편밀매업자와 같은 반열에 두는 것은 확실히 타당하지 못하다.

 

원래 요란하게 시작했던 아편금지운동이 큰 성과를 거두고 끝난다. 그러나 이어진 두 개의 사건은 중국과 영국을 전쟁으로 몰고 간다. 이것은 바로 "감결(甘結)"고하 "임유희(林維禧)사건"이다.

 

호문에서 아편을 소훼시킨 후에, 임칙서는 아편을 근절하기 위하여, 공고를 내서, Elliot와 영국상인들에게 "감결"을 체결하도록 요구한다.

 

이 "감결"은 성격이 오늘날의 보증서와 같은 것이다. 내용에 청나라의 법령을 규정하는 외에 아편무역이 발견되기만 하면, "물건은 모조리 몰수하고, 사람은 법에 따라 처벌한다"는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외상에게 대청의 율령에 따라 '연좌'로 처리하겠다고 하였다. 즉, 영국상인 1인이 위법을 저지르면, 영국의 다른 상인 및 다른 나라의 상인들도 마찬가지로 징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연좌'라는 중국고대의 율령은 중국인의 마음 속에 깊이 뿌리잡고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위법을 하면, 단위의 동료와 친구들도 무서워하게 된다. 왜 그런가? 바로 이 '연좌'가 남겨놓은 후유증인 것이다.

 

임칙서는 이번에 대청국의 야만적인 '연좌'법령을 문명국가의 상인들에게 강제로 요구했다. 동서방의 사고방식의 차이가 여기서 격렬하게 부딛친다.

 

Elliot의 신분은 영국의 주중국상무감독이다. 정부의 전권대표는 아니다. 영국여왕을 완전히 대표할 수도 없고, 영국상인을 대표할 수도 없다. 그가 영국여왕을 대표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영국여왕은 영국상인을 대표할 수 없다. 이 말의 뜻을 임칙서는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황제와 백성을 대표할 수 있는데, 너는 왜 안된다는 것이냐? 혹시 잔꾀를 부리는 것이 아니냐?

 

쌍방은 서로 다른 얘기를 했다. 전체 영국상인은 어쩔 수 없이 광동을 떠나 마카오에서 사업을 하게 된다. 이때 임칙서는 대청국의 국위를 선양하는 큰 일을 하나 벌인다. 네덜란드인이 거주하는 마카오로 가서, 대청왕조의 존엄, 주권과 영토는 침범받을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어서 Elliot에게 명령한다: 돌아와서 '감결'을 하거나, 아니면 중국에서 나가라. Elliot는 분명히 따를 수 없다고 밝히고, 임칙서에게 스스로가 제기한 무리한 요구를 다시 한번 돌아보라고 말한다.

 

"감결' 건이 다 끝나기도 전에, '임유희사건' 벌어진다.

 

1839년 7월 7일, 한 영국해군이 구룡 침사초이에서 술을 마신 후 촌민과 충돌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촌민 임유희가 죽어버리게 된다. 사건발생후, 영국해군은 즉시 돈을 주고 화해를 하고, 가족들에게 입을 다물도록 요구한다. 이틀후 임칙서가 그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영국인을 대청률에 따라 처벌하겠다고 요구한다. 해군 1명의 목숨을 내놓으라고 요구한 것이다. Elliot는 사망자의 가족에 배상하는데 동의하였고, 사람을 때린 해군을 처벌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청의 율법에 따라 처리하도록 내놓을 수는 없다고 우겼다. 그는 영국식의 아문을 만들어 이 사건을 심리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임칙서에게 와서 보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임칙서는 거절한다. 중국에는 자고로 '사람을 죽이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가법이 있다고 요구한다. 이렇게 하여 영국의 법률과 중국의 대청률이 서로 부닥치게 되는 것이다.

 

쌍방이 대치를 하는 동안에, 임칙서는 8월 15일 명령을 내린다: "모든 무역을 금지한다. 그리고 전선을 보내어 영국선을 봉쇄한다." Elliot는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즉시 영국상인과 가족들에게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도록 통지한다. 임칙서는 그래도 그만두지 않고 다시 명령을 내린다: "촌민들이 영국선박에 일용품을 공급하는 것을 엄금한다. 외국인이 해안에 상륙하면 일률적으로 그자리에서 처결한다."

 

반달 후, 영국상선은 물자조달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Elliot는 임칙서에게 봉쇄를 풀어주고, 무역을 회복시켜줄 것을 요구한다. 임칙서는 바로 거절한다.

 

영국인이 구룡에서 담수를 찾을 때, 현지 관리들은 5,6시간이나 시간을 끌면서 미루었다. 이번에는 영국인들이 화가 났다. 그리하여 최후통첩을 보낸다: 담수를 계속 주지 않으면, 눈앞에 있는 중국선박을 모조리 격침시키겠다. 아편전쟁의 단초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를 근거로, 아편전쟁은 '담수전쟁(淡水戰爭)'으로 불러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이건 복잡한 문제이니, 나중에 논의하기로 하자.

 

아편금지는 아편금지이고, 임칙서의 방식은 생각해볼 점이 있다. 임칙서는 아편을 흡입하거나 아편을 매매하는 중국인을 처벌하는 외에 영국의 아편상을 주타격대상으로 생각했다. 아편무역을 보호해주는 관리들은 터럭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결국 그도 청나라의 관리였다. 그는 청나라관료사회의 '숨은규칙'을 어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근본을 건드리지 않는 조치였다. 임칙서가 가고난 후에 아편무역은 즉시 부활하고, 아편을 흡입하는 행위는 민국시대까지도 전혀 근절되지 않았다.

 

임칙서가 이렇게 한 것이 혼자 그렇게 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영국상선을 쫓아내기 전에, 그는 영국을 '연구'해보았다. 영국인의 '기본입장'도 파악했다. 영국인은 절대로 대청국과 전쟁을 벌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유감스러운 점이라면, 그가 얻은 정보는 모두 우매하고 편견이 있는 것들이었다. 예를 들어, 영국은 작은 나라이고, 국왕도 여인이라는 것이다. 영국인은 날고기, 치즈등 소화가 잘 안되는 식품을 먹고, 중국의 차를 먹어야 비로소 소화가 되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영국과는 거리가 멀어서 물자조달이 안되므로 영국인들이 장기간 전쟁을 벌일 수 없다고 보았다. 전쟁을 하려면 차공급만 끊으면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당시 영국은 이미 중국최대의 무역파트너였다. 영국의 사절단이 두번이나 중국에 온 적이 있다. 무역관계를 개선하려고 시도했었다. 이것들을 그는 모두 알고 있었다. 만일 아편금지운동을 통하여, 동서무역대화의 플랫폼을 마련했더라면, 중국의 역사는 아마도 다시 쓰여져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편금지를 하는 흠차대신이었으므로, 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하여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가 아편금지와 무역금지를 동일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중국은 평등하게 대화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중국인의 아편금지투쟁과 영국인의 무역자유보호노력은 원래 통일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정 반대로 갔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오늘날 많은 중국인들은 여전히 대청관리와 같은 머리수준을 지니고 있다. 아무 생각없이 청나라정부의 입장에서 말한다. 그러므로 임칙서에 대하여 결론을 내리는 것은 여전히 시기상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