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일본의 "개국"과 중국의 "치욕"

중은우시 2010. 3. 3. 08:49

글: 장명(張鳴)

 

일본사에 대하여 약간의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일본근대의 개방에 대하여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미국 페리함대의 함포때문이었다. 1853년 7월, 미국의 해군제독 페리는 4척의 군함(나중에 일본인의 전설 속의 大黑船이다)을 이끌고, 동경만으로 들어왔고, 당시 일본을 통치하던 도쿠가와(德川)막부에 국문(國門)을 개방하도록 요구했다. 막부는 허장성세로 저항을 하는 모습을 보인 후, 페리의 함포아래 미국인들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이 사건은 바로 일본의 "개국"이다. 쇄국상태에서 대문을 열게 된 것이다. 중국인들이 현재 말하는 개국(開國)과는 사뭇 다르다.

 

재미있는 것은 앞장서서 국문을 개방했던 막부는 나중에 자신의 개방으로 인하여, 조슈(長州), 사쓰마(薩摩)번의 지사들에게 약점이 잡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도막(倒幕, 막부타도)의 구호는 바로 존왕양이(尊王攘夷)였다. 그 의미중 하나는 막부가 대외적으로 투항한 것은 이이변화(以夷變華, 오랑캐가 화족이 된 것)이므로, 타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 이 주장은 사람들에게 먹혔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소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시작한 주도자들은 처음에 전혀 새롭지 않았었다. 오히려 소위 '왕정복고'를 주장했다. 새로운 것은 오히려 그들이 타도하려는 막부였다. 그러나, 막부를 타도한 후, 통치권을 장악한 조슈, 사쓰마번의 사무라이들은 감히 정말로 양이(攘夷, 오랑캐를 물리치다)를 하지 않았다. 약간 시도해본 후에 바로 웅크렸다. 막부의 개방의 깃발을 물려받아 진정으로 서방을 배우고, 유신을 시작한다.

 

나중에 1901년, 일본은 서방국가와 함께 팔국연합군에 가담하여 북경을 점령한다. 그 해에 페리제독이 상륙했던 동경만 구리빈에 일본인들은 기념비를 하나 세운다. 거기에는 "북미합중국수사제독백리상륙기념비(北米合衆國水師提督伯理上陸記念碑)"라는 16자의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다. 이것은 이토 히로부미의 글씨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막부를 타도한 지도자중 하나이다. 그는 소위 메이지유신의 삼걸(三傑)이라고 부르는,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과 나란이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확실히, 일본인들의 눈에, 무력협박에 의해 나라의 문을 열어제친 것이 더 이상 '국치'가 아니게 되었다. 오히려 기념할만한 일이 되었다. 명예로운 것인가? 그건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기념할만한 적극적인 사건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팔국연합군에 참가하는 것을 일본인들은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전에 여러해동안 해온 "탈아입구(脫亞入歐,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에 들어가다)"의 노력이 결실을 거둔 것이다. 변법, 변제, 구토를 참으면서 서방사람을 배우기 위해 우유를 마시고, 소고기를 먹고, 양복을 입었다. 심지어 서방인종을 도입해서 일본인의 체질을 개선해야한다고까지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다. 서방인들의 중국에 대한 전쟁에 참가함으로써, 마침내 첫번째 결실을 얻었다. 전쟁에서, 일본인들은 특별히 더욱 '문명'적인 것을 드러내고자 애썼다. 군대의 규율도 서방인들보다 나았다. 그리하여 이 시기를 택해서 기념비를 세운 것은 의미가 있다. 당연히 일본인들에 대하여 서방인들이 괄목상대하게 되는 것은 1904년이 되어서이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를 격파한 이후부터이다.

 

일본인들은 교묘했다. 그리하여 근대화의 여러 시점에서 그들은 중국인들보다 운이 좋았다. 나라의 문을 열어제킨 다음 미국총영사가 일본에 온다. 일본인들은 큰 돈을 들여서 여자를 찾는다. 그리고 그 여자를 하녀 겸 시침을 하도록 보낸다. 이런 일을 중국인이라면 절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체면상 말이 안된다. 중국은 나라의 문을 열고 한참이 흐른 이후까지 기녀조차도 외국인을 상대하면 '함수매(咸水妹)'로 조롱받았다. 새금화(賽金花)가 자신의 몸으로 나라를 구한 것을 찬미하게 된 것은 팔국연합군에 완전히 깨져서 자존심이라고는 터럭만큼도 남아있지 않았을 때여서 비로소 가능했다.

 

마찬가지 이유로, 중국인들은 근대의 굴욕의 역사에 대하여 평정한 마음으로 대하지 못한다. 원부(怨婦)같은 애척(哀戚)이 아니면, 발부(潑婦)같은 분노(憤怒)이다. 영국인 매카트니도 오고, 애머스트도 왔다. 그들도 함대를 데려왔다. 그러나, 그들이 요구한 것은 평화적인 통상이었다. 그러나, 성과는 없었다. 황제는 폼을 잡으면서 나라의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나라의 문은 나중에 영국인이 아편전쟁으로 강제로 문을 부수고 연다. 이런 '개국'을 중국인들은 지금까지고 크나큰 치욕으로 여긴다. 어쩔 수 없다. 강요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문을 연 것과 상대방이 문짝을 부수고 연 것은 다르다. 중국인들은 평화적인 사명을 지녔던 매카트니와 애머스트가 상륙한 지점에 기념비를 세울 수도 없고, 아편전쟁시의 영국함대사령관을 위하여 기념비를 세울 수도 없다. 이 사건은 생각만 해도 모두 죄악이다.

 

그러나, 중국이 나라의 문을 열지 않는 것이 가능했었겠는가?

 

서방은 근대에,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길을 걸었다. 공업문명을 건립한다. 이 길은 중국계 미국인인 장광직의 주장에 따르면, 아마도 인류발전의 특수한 사례일 것이다. 인류의 전체적인 발전을 보자면 지금까지도 화인지 복인지가 분명치 않다. 다만, 이 길은 한번 시작하면 전체 지구상의 사람들이 모두 따라가야 한다. 모든 사람이 빠르든 늦든 모조리 서방인의 세계 속으로 끌려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 세계 혹은 세계체계는 사람들을 따라오게 만드는 구조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항거할 수 없는 침략성이 있다. 저항하고 항거하는 것은 비장하고, 도덕적이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따라가야 한다. 후발국가의 앞에 놓인 두 갈래의 길에서 억지로 끌려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스스로 걸어가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모택동은 말했다. 중국인은 왜 스승이 항상 학생을 때리는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사실, 때리는 사람은 반드시 가르치려는 생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맞지 않으면 절대로 학생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아편전쟁에서 팔국연합군까지, 중국인들은 60년이라는 시간을 들여서 겨우 철저히 알게 되었다. 아니, 실제로는 서양놈(일찌기 깨달은 동양놈 포함)들에게 맞아서 알게 된 것이다. 한가지 이치를 확실히 알았다. 우리는 나라를 개방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따라가야 한다. 따라가다보며 언젠가, 우리는 그들을 따라잡을 수도 있고, 추월할 수도 있다. 비록 일부 환경보호론자들이 보기에, 서방이 시작한 공업문명, 혹은 현대화의 길은 인류에게 돌아올 수 없는 불귀의 길일지 모르지만, 고대 그리스 신화는 우리에게 말해준다. 판도라의 상자는 한번 열리면 인류가 따라갈 수밖에 없다.

 

만일 우리가 오늘까지 걸어와서 서방이 열어놓은 길을 이렇게 멀리 걸어왔는데, 아직까지도 원부나 발부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의 선조들이 감당한 댓가는 최소한 절반이상 헛것이라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