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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상군(湘軍)의 남경대도살은 일본의 남경대학살에 못지않았다.

by 중은우시 2010. 1. 4.

글: 촉인삼지안(蜀人三只眼)

 

1937년, 일본군이 남경 및 부근지역에서 진행한 수개월간의 대규모 학살은 중국인이라면 아무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지만, 74년전에, 증국전(曾國荃)이 상군(湘軍)이 우화대(雨花臺)를 공격하면서 '남경대도살'의 참극을 일으킨 바 있다.

 

1863년, 증국전이 우화대를 함락시킬 때, 수군이 호성하로 진격했다. 천경(天京, 남경)이 포위되었다. 곧이어 1864년 6월, 홍수전이 병사한다.

 

홍수전이 서거한 후, 이수성(李秀成)이 유천왕(幼天王) 홍천귀복(洪天貴福)을 보좌하여, 3,4천명의 전사를 이끌고 천경을 1달 반이나 굳게 지키고 있었다. 상군은 태평문에 가까운 성벽에 몰래 지하도를 파서, 폭약을 매설했다. 폭약으로 20여장을 무너뜨린 후, 무너진 틈으로 벌떼처럼 밀려들어갔다. 비록 태평군이 몇번 반격을 했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상군이 천경에 밀고 들어간 후, 바로 미친듯이 방화, 살인, 약탈, 간음의 대경연을 벌였다. "사람을 보면 바로 죽이고, 집을 보면 바로 불태우고, 자녀옥백(子女玉帛)은 모조리 상군이 차지했다." 이리하여 진회하는 시신으로 가득했다.

 

방화: 상군은 남경성에 들어가자마자 도처에 방화를 저질렀다. 닥치는대로 불을 질렀다. 그리하여 어두워질 때쯤, 온 성은 이미 불바다가 되었다. "연기가 수십 줄기 솟아오르고, 하늘에 뭉쳐서 흩어지지 않았다. 화산과 같았고, 붉은자주색(紫絳色)이었다." 상군은 방화를 진격수단으로 사용하는 외에, 불로 흔적을 없애는 수단으로 삼았다. 매번 왕부나 민가를 하나 약탈할 때마다, 바로 모조리 불질러버렸다. 이 불은 천경이 함락된 날로부터, 이곳저곳에서 연이어 일어나서 7,8일간 계속되었다. 27일이 되어 큰 비가 내리고서야 비로소 꺼졌다. 큰 불이 지나간 후, 남경성내의 십중팔구의 가옥은 불에 타버렸다. 각종 저명한 건축물과 문화재고적은 거의 모조리 불타서 사라진다. 그리하여 남경의 적지않은 고건축물은 그 이후에 다시 지은 것들이다.

 

살인: 이는 상군이 입성한 후의 '주요임무'였다. 그들이 먼저 살해한 것은 성내에서 계속 저항하는 태평군전사였다. 다음으로는 일반백성이었다. 그러나 살해당한 태평군전사야 한계가 있었다. 왜냐하면 성이 함락될 때, 천경성내에서 전투에 참가할 수 있는 태평군은 겨우 3,4천명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중 일부는 시가전을 벌여서 용감하게 희생당했고, 일부는 혼란중에 천경을 빠져나갔다. 또 다른 일부분 천여명은 이수성의 지휘하에 유천왕을 모시고 포위망을 뚫었다. 그리하여 피살된 대부분은 일반백성이었다. 사실, 천경이 함락된 그날 저녁에 상군은 기본적으로 도시 전부를 장악한다. 비록 몇개의 왕부에서 여전히 저항하고 있었고, 4,5일간은 지속되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전쟁상태는 끝난 것이다. 그러나, 이번 대도살은 10여일간이나 지속된다.

 

살인의 동기는 각각 다르다. 주요한 것은 재물약탈과 부녀자간음을 위한 것이었다. 이번 도살에 관하여 조열문(趙烈文, 증국번의 심복)은 당시 그의 일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성이 함락된 5일후에도 여전히 시신이 길을 가로막고,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성이 함락된 후, 건장한 장모(長毛, 태평군)은 항거하다 참살된 외에 죽은 자들이 얼마되지 않았다...길거리에 죽은 자들의 열에 아홉은 노인이었다. 어린아이로 2,3살이 되지 않은 자들도 장난으로 죽여서 길거리에 널부러졌다. 부녀로 사십세이하는 하나도 없다. 노인들은 상처가 없는 사람이 없다. 혹은 십여도, 혹은 수십도. 슬퍼하는 소리가 사방에 들렸다. 그 어지러움이 이와 같으니, 손가락질을 받을만한 일이다."

 

그렇다면, 상군이 입성한 후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을까? 영국인인 Augustus F Lindley가 쓴 <<태평천국혁명친력기>>를 보면 개략 3만여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부분 무고한 남, 녀, 아동이었다. 증국전은 자신의 논공행상을 위하여 숫자를 허위보고하였는데, 성을 함락시킨 후에 피살된 사람은 수만이라고 하였다.

 

약탈: 천경의 재물에 관하여 상군은 일찌감치 침을 흘렸다. 그들은 천경을 포위한 이래, 양식이 부족하고 한여름의 더위를 견디면서 전투를 한 중요한 이유는 바로 성을 함락시킨 후에 횡재를 노리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성에 들어가자마자, 아무런 거리낌없이 재물을 약탈했따. 그들은 먼저 왕부를 털고, 다시 지하창고를 털었다. 곧이어 집집이 돌아다니면서 주민들의 재물을 빼앗았다. 분묘도 도굴했고, 심지어 적지 않은 건축물의 목재까지도 철거해서 가져갔다. 성벽위에서 내려보내고 배에 실어서 호남남부까지 운송했다. 재물을 약탈하기 위하여, 그들은 대거 주민들을 죽여버린다. 약탈과정에서, 사병들간에도 계속하여 투쟁이 발생한다. 성이 함락된 후 십여일간, 길거리에는 상군사병들이 집단으로 몰려다니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공성부대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사방에서 약탈을 자행했다. 심지어 성밖에 남겨졌던 노약병들까지도 병영을 떠나 성내로 들어와서 약탈에 가담했다. 심지어 증국전의 총사령부를 경비하는 병사들과 잡역부등 비작전인원들까지도 모두 성으로 들어가서 재물을 긁어모았다. 어깨에 매고 손으로 들고, 집단으로 몰려다니면서 하루에도 여러번 왕복했다. 일부 문관, 막료들은 그래도 문관이므로 약탈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병사들이 재물을 허리에 가득차고 손에 가득 든 것을 보면 눈이 벌개졌다. 그리하여 속속 저가로 사병들이 빼앗아온 장물을 매입했다. 

 

간음: 상군은 방화, 살인, 약탈과 동시에 부녀자들을 간음했다. 그들은 아무렇게나 민가에 들어가서 부녀를 간음했다. 백주대낮에 공공연히 길거리에서 젊은 여자를 희롱하니, '통곡하는 소리가 차마 듣기 어려웠다' 40세이하의 부녀는 거의 모조리 그들에게 간음당하고 호남남부로 끌려가서 매매되었다. 일시에 장강의 상하에는 도처에 상군들이 장물과 부녀를 가득 실은 선박이 오갔다. 경천동지할 곡소리와 욕설속에 호남으로 향했다. 많은 노인들은 자신의 딸이나 며느리를 구하려다가, 많은 어린아이들은 곡을 하면서 모친과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천경의 겁난을 만든 사람과 괴수는 증국번과 그의 동생인 증국전 그리고 그의 심복장수들이다. 그들은 전체과정에서, 부하들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적지 않은 이들은 친히 가담했다. 증국전은 그 과정에서 수천만의 재물을 얻었다. 약간을 정부에 바친 이외에 나머지는 모조리 집으로 실어갔다. 이 겁난을 거치면서, 천경은 거의 폐허로 바뀐다. 무너진 담장과 벽이 있고, 곳곳에 깨어진 기왓장과 벽돌이 있었다. 증국번 자신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계이후 생령이 도탄에 빠진 것이 오늘만한 경우가 없었다고. 이홍장은 양강총독서리를 맡은 후, 이 파괴적인 현상을 보고, 손쓸 도리가 없다고 탄식했다. '일좌공성, 사주황전(一座空城, 四周荒田, 텅빈 도시로 사방이 황량해진 밭뿐이다)", "관리할 집도 없고, 사람도 없고, 돈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