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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남북조)

탁발홍(拓跋弘): 중국역사상 가장 젊은 태상황

by 중은우시 2009. 5. 25.

글: 유병광(劉秉光)

 

3살때 황태자가 되고, 12살때 등극하여 황제가 되고, 14살때 아들을 낳고, 18살때 황제자리를 선양하고, 23세에 급사하였다. 이 인생의 숫자는 소년천자 탁발홍의 휘황하면서도 비분한 일생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탁발홍이 중국역대황제중 가장 나이어린 부친이었는지는 전문적으로 고증해본 바 없다. 그러나, 그가 중국역사상 가장 나이어린 태상황이었고, 중국황제중 아주 위대한 부친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탁발홍(454-476), 문성제 척발예의 아들로, 북위의 다섯번째 황제이다. 집권초기에, 탁발홍은 우선 권신 을혼(乙渾)으로부터 온갖 핍박을 받았다. 나중에는 태후인 풍씨(馮氏)로부터 억압받았다. 비록 탁발홍이 "어려서부터 용맹하고 총명하여 오성이 뛰어났지만" 권력욕이 컸던 풍태후로부터 여러 방면의 제약을 받아, 그의 재능은 발휘될 수가 없었고, 능력도 펼칠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관계는 물과 불처럼 서로 갈라졌고, 갈수록 관계는 악화되었다.

 

황흥4년(470년) 십월, 탁발홍은 풍태후가 후궁에서 음란한데 반감을 품고, 그녀가 가장 총애하던 면수(面首, 男寵을 가리킴) 이혁(李奕)을 꼬투리잡아 주살해버린다. 이혁의 죽음은 순식간에 탁발홍과 풍태후간의 원래부터 날카로웠던 긴장관계가 더욱 첨예화되도록 만든다. 분노와 부끄러움으로 풍태후는 탁발홍을 폐위시키겠다고 공개적으로 말한다. 화를 피하고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하여, 평소 황로지학과 불경에 심취해 있던 탁발홍은 속세의 무상함을 깨닫고 스스로 나서서 황제위를 선양하게 된다.

 

황흥5년(471년) 팔월, 18세된 탁발홍은 황제위를 아들 탁발굉(拓跋宏)에 양위하고 스스로 태상황이 된다. 풍태후는 다시 수렴청정을 시작한다. 어린 탁발굉을 자신의 허수아비로 키우고자 풍태후는 여러가지 잔혹한 수단으로 그를 개조하고 괴롭혔다. 한번은 풍태후가 추운 겨울날 척발굉 혼자 어둡고 낮은 골방에 가두어 버린다. 그리고 삼일 밤낮을 먹을 것도 주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탁발홍은 두눈을 멀거니 뜨고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로서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남자가 다른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게 되면, 그는 아뭇소리 않고 꾹 참으면서 이를 회피하고 물러나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아들이 다른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게 되면, 아무리 유약한 부친이라도 반드시 가슴을 펴고 일어서게 되어 있다. 정치적으로 노련한 풍태후를 대적하기 위하여, 그리고 나이어린 아들이 허리를 펴고 살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탁발홍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풍태후와의 정치적인 수싸움에 돌입한다. 대외적으로 그는 남북으로 전쟁에 참여해서 영토를 넓혔다; 대내적으로 그는 군대를 열병하고, 업무를 시찰하고, 관료사회를 정돈하고, 현명하고 능력있는 자들을 뽑아올렸다. 이 모든 조치는 북위의 국력을 강성하게 만드는 동시에 탁발홍의 국내에서의 위신도 크게 드높였다.

 

태상황을 맡는 기간동안이 탁발홍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휘황하고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능력이 있으면 있을 수록, 노력을 하면 할수록, 공을 세우면 세울수록, 위신을 세우면 세울수록, 풍태후라는 이 여성정치강자의 경계심을 드높이게 된다. 탁발홍이 재기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리고 권력을 자신의 한 손에 움켜쥐기 위하여, 연흥6년(476년) 육월 갑자일, 풍태후는 비밀리에 정변을 일으켜, 탁발홍을 구금시킨다. 칠일 후인 신미일에 탁발홍은 풍태후에게 독살(일설에는 칼에 찔려 죽었다고 함) 당한다. 향년 23세이다. 탁발홍이 죽은 후, 묘호는 "현조(顯祖)", 시호는 "헌문제(獻文帝)"로 하였다.

 

원래 만년을 편안하게 보내면서 천수를 누릴 수 있었던 부친은 아들의 성장과 운명을 위하여 호랑이에게 가죽을 내달라고 하는 위험한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문에 젊은 목숨을 잃었다. 풍태후는 계속하여 북위의 조정대권을 장악하고 있다가 태화14년(490년)에 병사한다. 부친의 영향을 받아, 북위의 효문제인 탁발굉은 친정을 시작한 후, 정치에 정력을 기울이고, 날카로운 혁신을 진행하고, 교육을 보급하고, 한화(漢化)를 받아들이면서, 선비족을 포함한 서북각 민족과 중원 한족과의 융합을 이루어낼 뿐아니라, 그 스스로 중국역사상 탁월한 정치가이자 개혁가가 된다. 이 성과는 바로 그의 부친 탁발홍에 대한 가장 큰 위로이고 보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