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석술사(石述思)
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남은 문제는 그저 어느 자살방식을 선택하느냐이다.
단지 이들 은 너무 젋었다. 나이가 18-24살 사이이다. 원래 그들은 충만한 격정과 세상에 대한 커다란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비애를 발견했다. 이 세상을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들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모든 젊은 상처받은 마음들처럼, 포로수용소같은 공장에 쭈그리고 있다. 이들은 죽음으로서 세계에 자신의 생각을 일깨우고 싶었다. 설사 그것이 자그마한 조각에 불과할지라도. 도시의 사랑을 잃은 아이들처럼 그들은 건물꼭대기로 올라가서,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눈길을 들어 콘크리트숲, 차가운 기계를 한번 훑어보고, 새처럼 날았다. 마침내 자유를 얻었고, 생과 사는 갈렸다.
금년 1월이래로 남방의 폭스콘(Foxconn, 富士康)이라고 불리우는 세계적인 기업에서, 9명의 젊은 목숨이 연속으로 그리고 극단적인 방식으로 이 세계와 이별했다.
관례에 따라, 생전에 아무런 사랑을 받지 못했던 생명도 사후에는 애도를 받는다. 그러나, 이미 죽은 자를 안위할 수는 없다. 기업에서 고승을 불러서 독경을 하고, 이들 아직 피어보지도 못하고 지어버린 생명에 대하여 비교적 행복하고 체면을 살릴 수 있는 윤회를 기원할 뿐이다.
이들 생명을 버린 젊은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가슴아플 정도로 젊다는 것이외에, 모두 농촌의 가난한 집안출신들이다. 직장에 들어온지도 얼마되지 않는다. 전문가들의 추산에 따르면 도시와 농촌을 시계추처럼 오가는 농민공이 1.2억명가량이다. 그리고 때마침 세대교체를 이루는 중이다. 윗대의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희망도 없고, 방법도 없이 표류생활을 마친 후, 더욱 독립적이고, 더욱 개성있으며, 더욱 존엄을 중시하는 젊은세대들이 등장했다. 참혹한 취업경쟁과 단조롭고 엄청난 노동과 보잘 것없고 늘어날 희망도 없는 수입이 이들 앞에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자살로 몰고가는 치명적인 단서들이다.
현재 매체들은 전체 사건을 조사하고 반성하는데 열심이다.
기업에서의 설명은 삶을 가볍게 여기는 경우는 세 가지유형인데; 하나는 개인감정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고, 둘째는 생리적으로 질병문제가 있는 사람이며, 셋째는 사회방범의식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숨은 뜻은 그들은 신체나 심령이 강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현대사회의 정글법칙에 부합한다. 적자생존이고 약자는 죽어야 한다. 그다지 신선할 것도 없고, 그저 성공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이다. 이에 호응하여, 어떤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80년대,90년대생들은 현대 대도시에서 일하고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독생자녀이고, 스트레스를 견디거나 고생하는데 익숙하지 못하다. 원대한 꿈이 현실의 거대한 벽에 부닥쳤을 때, 이들의 미성숙한 심리의 노동자들이 견디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분석에 따르면 문제는 쉽다. 이들 사회하층에서 온 자살자들이 반박할 여지가 없다. 그들의 죽음에 슬퍼하는 유가족들도 할 말이 없다. 책임져야할 많은 사람들도 이런 말을 들으면 안심할 것이다.
그러나, 자살사건이 이처럼 연속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게다가 알려진 바에 따르면, 폭스콘공장지역에서 자살미수에 그친 사건들이 2,30건이나 있다고 하니, 우리는 스스로의 시야을 열고 사고를 더욱 깊이있게 해보아야 한다.
자살을 시도하거나 성공한 노동자들은 노사관계에서 가장 약한 지위에 있는 자들이다. 어떤 때에는 여러가지 불합리하거나 심지어 모욕적인 내규도 지켜야 하고, 자신의 시간과 체력으로 겨우겨우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는 급여를 받아내야 한다. 그것도 많은 경우에 공제당하거나 체불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기업주가 보기에, 그들과 차갑기 그지없는 기계는 다를 바가 없다. 모두 이익을 창출하는 도구일 뿐이다. 모두 원가라고 불린다. 사회로부터의 심리적인 지원은 경제성장과 기업효율을 중시하는 사고하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들 빈곤한 2세들은 생산라인에서 열심히 일하는 외에, 거의 자신의 운명을 바꿀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빌게이츠나 리카싱같은 사람들이 노력한 것을 얘기하지는 말라. 현재의 제도하에서 다단계가 오히려 나은 방법일 것이다.
이 글을 쓰는 것은 자살자들의 나약함을 변명해주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사회를 견책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저 비극이 다시 발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이다.
아마도, 이익지상의 요즘 시대에, 집단적으로 이익을 넘어서는 추구를 생각해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하층민들에게 있어서는 공평이고 정의이며, 인간적인 배려이고, 희망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아래서>>를 생각한다. 시대의 수레바퀴 앞ㅇ레서, 우리는 반드시 더욱 속도를 올려서 달려야 한다. 어떤 때에는 마음먹은대로 힘이 따라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때에는 조급하고 초조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반드시 적응해야 한다. 그것은 가볍게 낙오한 자들을 멀리 버려버린다. 심지어 갈아서 흙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가장 해서는 안되는 일은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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