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초기)

아담 샬: 중국에서 가장 성공한 서양선교사

중은우시 2008. 12. 27. 22:41

 

 

 

글: 우야강금(雨夜鋼琴)

 

아담 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 湯若望 1591-1666)은 명말청초에 중서문화교류를 촉진하는데 걸출한 공헌을 세운 선교사이다. 16,7세기에 중국에 온 선교사들은 처음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의 식민통치자의 자금지원을 받았었다. 그들이 중국으로 오기 전에 정신으로 정복하겠다는 자세를 가진다. 마테오 리치(利瑪竇)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예수의 용감한 병사가 되어, 그를 대신하여 전쟁터에 나거 이 우상숭배의 중국을 정복하겠다" 그러나, 그들은 중국에 도착한 이후, 중국의 국가상황을 이해하고, 중국의 전통문화를 접촉하면서, 중국은 유가사상이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한 국가이며, 종교신앙이 뿌리깊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리고 여러 종교에 대하여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도 안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선교사들은 전략을 바꾸어, 중국의 습속을 존중하고, 중국의 정치규범을 따르며, 중국전통문화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며, 이를 통하여 중국에서 천주교를 전파하는 뿌리를 내려갔다. 아담 샬은 마테오 리치 식의 선교방법을 추진하고, 중국에 서양학문을 도입하며, 중서문화교류를 촉진하는데 공헌을 세운다. 그는 명나라의 천계제, 숭정제와 청나라의 순치제, 강희제의 네 황제를 겪는다. 그리고 대순정권(大順政權, 이자성의 정권)과도 교류가 있었다. 그는 중국에서 근 반세기를 선교하면서 보냈다. 이것만 보더라도 선교사들 중에서 보기 드문 경우이다. 마테오 리치는 한학(漢學)에 뜻을 둔다. 그는 천인감응(天人感應) 사상에 지배되는 중국정치에서는 하늘과 사람간에 사람의 군주가 하늘의 뜻을 얻느냐의 여부가 봉건정권통치를 안정시키는 관건이고, 민심을 얻는 중요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마테오 리치는 포르투갈이 예수회 부회장에게 서신을 보내어, 신속히 역법(曆法)에 정통한 선교사를 중국에 보내달라고 한다. 아담 샬은 이러한 임무를 띠고 중국에 불려온 것이다.

 

아담 샬은 1630년 명을 받아 북경으로 와서 수력(修曆)의 직위를 받는다. 아담 샬은 학식이 광범위하여, 그는 여러 나라의 언어에 정통했다. 그리고 3000권의 유럽도서를 가진 서고를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적지 않은 천문역법의 서적이 있었다. 금방, 아담 샬은 그의 탁월한 천문역법지식을 가지고 월식계산을 정확히 함으로써 호부상서의 신임을 얻는다. 1634년 그는 역서를 수정하는데 참가한다. 이 역서는 <<숭정역서(崇政曆書)>>라고 하는데, 일명 <<서양신법역서(西洋新法曆書)>>라고도 불렀다. 이를 통하여 최고통치자의 인정을 받는다. 이제 천주교세력은 궁중에까지 뻗치게 된 것이다. 황제는 궁중의 태감, 궁녀들이 천주교를 믿는 것을 허용했다. 숭정제 본인이 천주교에 귀의할 생각이 있었는지 여부는 사료에 명확히 기재되어 있지 않다. 다만, 최소한 그는 불교 도교와는 등을 졌다. 심지어 황제는 그의 후궁들까지 천주교에 귀의하도록 한다. 아담 샬은 역서를 수정하여 큰 명성을 얻었기 때문에,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에도 금방 새로운 통치자의 신임을 얻고, 즉시 흠천감(欽天監) 감정(監正)의 직위를 받는다. 1645년 11월, 아담 샬은 보완한 역서 <<신역전서(新曆全書)>>를 바친다. 그리하여 도르곤의 인정을 받는다.

 

순치8년(1651년) 푸린(福臨)이 친정을 하니, 그가 바로 순치제이다. 이는 아담 샬의 정치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즉 이해 8월의 어느 날 하루만에, 통의대부(通議大夫), 태복시경(太僕寺卿), 태상시경(太常寺卿)의 직위를 받고, 삼품(三品)의 관등에 오른다. 이후 접견할 때 황제는 삼궤구고의 예를 면해준다. 그후 몇년간, 그는 광록대부(光祿大夫)등의 봉호를 받고, 조상3대가 1품의 은전을 받는다. 그는 서양인으로써 3대에 은상을 받는다는 것은 역대왕조에서도 아주 보기 드문일이다. 아담 샬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1656년과 1657년의 두 해동안 순치제는 그의 집에 24번이나 찾아왔다. 가장 융중했던 것은 황제가 아담 샬의 집에서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는 신하들의 예를 받겠다고 한 것이었다. 어떤 저술에서는 아담 샬이 1651년부터 1660년까지 10년간 실제로 섭정왕의 지위에 있었다고도 말한다. 이런 주장은 아마도 과장된 것이겠지만, 아담 샬이 당시 조정에서 얼마나 중요한 지위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담 샬은 청나라가 들어선 후, 그 세력을 궁중에까지 뻗친다. 한번은, 효장태후가 질녀의 병을 고쳐준 것에 감사하는 기회를 틈타, 태후에게 두 개의 십자가를 선물한다. 태후는 당연히 십자가의 실제의미를 몰랐다. 다만, 최소한 아담 샬의 의도가 천주교를 지지해달라는 것임은 알았다. 그래서 태후는 십자가를 가슴 앞에 걸어둠으로써 천주교를 인정한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리고 거액을 기부하여 아담 샬이 교회 앞에 대리석 패방을 세우고 싶다는 바램도 들어준다. 오래지 않아, 순치제도 아담 샬의 천주교 교리설명을 열심히 듣는다. 한번은 친히 성당으로 가서 성상앞에서 예수에게 예를 표했다. 사회에서 기근이 발생했을 때, 아담 샬은 널리 창고를 열어 구휼하여 백성을 곤궁에서 구해줄 것을 건의한다. 아담 샬은 황제에게 계속 권하여, 황제가 계속하여 스스로 회개하도록 하고,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도록 하게 했다. 사서를 보면, 순치제는 집정기간동안 시종 스스로를 질책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은 천주교의 회개와 같은 점이 있다.

 

순치제는 집정후기부터 종교적으로 점차 선종(禪宗)에 기운다. 그러면서, 아담 샬은 총애를 잃는다. 종교적인 각도에서 보자면, 아담 샬은 최종적으로 실패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확실히 성공했다. 강희제가 친정을 한 후에, 아담 샬의 학설은 다시 인정받는다. 그의 서양학문조예와 서양화포에 대한 소개와 제조는 모두 강희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아담 샬은 그의 심후한 서양학문기초와 정명한 정치두뇌로 중국역사상 독특한 지위를 누렸다. 나중에 중국에 온 서양선교사들 중에서 그 어느 누구도 그와 같은 정도에 이르지는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