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맹헌실(孟憲實)
기원전 399년, 고대그리스에서 70세된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선택했다. 다시 9년이 흘러서 동방의 중국에 상앙이 고고의 성을 지르며 세상에 태어났고, 52년후에 일세를 풍미했던 그는 피살되고 만다. 소크라테스는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지만, 그는 모두 포기하고, 그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선택한다. 상앙은 죽음을 앞에 두고 각종 수단을 강구해서 살 방법을 찾아보려고 하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한다. 죽음을 앞에두고, 소크라테스는 성공자이며, 상앙은 실패자이다.
이 세상에 죽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人生自古誰無死)? 누구도 사신과의 싸움에서 진정으로 승리한 경우는 없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와 상앙은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보여준 태도가 전혀 달랐다. 이는 지금까지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선례이다. 무엇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운명을 결정했는가? 제도인가? 문화인가? 인성인가?
1
소크라테스는 전사였다. 그는 여러번 그리스를 위하여 출정했고, 적군과 용감하게 싸웠고, 위험을 무릅쓰고 아군을 구해내기도 하였다. 그는 솔선하여 신체를 단련하라고 주장했다. 그는 건강한 신체는 전쟁시 적군을 죽이는데 유리할 뿐아니라, 평화시에 사고하는데도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당시의 그리스는 타락해가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사랑하는 도시국가가 쇠락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그는 가슴아파했고, 동방의 공자와 마찬가지로, 안되는 줄 알면서도 했다. 자신의 도시국가가 다시 일어서도록 노력했다. 그는 문제를 연구했다. 도시국가의 정치와 사회의 윤리를 연구했다. 그는 스스로를 사상의 조산원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러 곳을 다니면서 강연을 했고, 자신의 생각을 널리 알렸다. 그는 정치부패를 질책하고, 사회가 타락하는 것을 비판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재산에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면서 영혼을 상실하는데 대하여는 신경쓰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 만큼이나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더더구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지겨워하고 있었다. 그가 가장 사랑하던 민주제도는 그에게 최종심판을 내렸다. 그가 신을 믿지 않고, 아테네 청년들을 부패시킨다는 죄명이 성립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사형을 받는다(독주를 마시는 것)
소크라테스는 죽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는 죄를 인정하고 사죄하면서, 법정에 관용을 베풀어달라고 할 수도 있었다. 이런 저자세를 채택했다면 법정의 용서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고, 소크라테스의 생명은 구원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것은 생명을 위하여 영혼을 팔아먹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의 고귀한 머리는 생명을 위하여 숙여질 수 없었다. 그는 그렇게 사는 것을 거절했다.
소크라테스는 그래도 죽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속전을 납부할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이 그를 위하여 돈을 내겠다고 했다. 법정에 그 돈을 낸다면 생명은 유지될 수 있었다. 생명도 가격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목숨을 돈으로 사는 것은 아주 가치있는 행위이다. 이렇게 하면,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되고, 사죄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물질적인 손실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도 소크라테스는 거절한다. 그가 무엇을 걱정한 것일까? 혹시 다른 사람이 이렇게 공격하는 것을 우려했을까: 너는 사회가 금전때문에 타락한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결과적으로 금전이 너의 생명을 구해주지 않았는가?
그러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살 수 있는 희망이 있었다. 그것은 도망치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이 그를 위하여 모든 조치를 취한 다음, 간수를 매수하고, 그리스를 빠져나갈 배와 모든 비용까지 마련했다. 그 날을 햇볕이 찬란한 아침이었다. 소크라케스는 감옥의 뒷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걸어나온다. 모든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가 이제부터 도망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저 산보하러 나온 것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그리스도시를 훑어보고는 감옥의 문으로 다시 걸어들어갔다.
소크라테스는 분명히 일찌감치 다 생각을 해두었을 것이다. 그가 생사문제를 고민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리스인들은 투표로 그의 죽음을 결정했따.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리스민주제도의 옹호자였다. 그는 그리스의 타락을 반대하고, 그는 그리스의 민주제도가 더욱 완비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비극은 바로 이때 발생한다. 그의 이상은 그리스 다수인의 이해와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이다. 이와 반대로 그들은 소크라테스를 파괴자로 보았다. 그의 생명과 아테네의 제도의 사이에서, 소크라테스는 후자를 선택하고 전자를 포기한다. 사랑하는 국가가 자신에게 잘못을 범하는 때에 나는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아테네인들에게 나를 죽이라고 해라. 피해자로서 죽을 지언정 배반자로서 살아가지는 않겠다. 교육자로서의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죽음이 마지막 교육이 되기를 바랐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그리스의 살아있는 교재가 되기를 원했다. 이상을 위하여 죽는다는 것은 무서울 것이 없는 일이다.
프랑스의 화가인 자끄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는 1787년에 유화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창작한다. 햇볕이 감옥에 비쳐들고, 사망의 신이 공기 속에 떠돈다. 친구와 제자들이 근심어린 표정을 하고, 눈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리고 있을 때, 그저 소크라테스만이 여전히 강연을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왜 이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한 손은 높이 들고 있는데, 이는 그가 죽어도 꺽이지 않을 의지를 가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다른 한 손은 가볍게 독주가 담긴 잔을 받아든다. 인성의 고양은 태양보다도 뜨겁다. 2천여년후에, 다비드는 확실하게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주는 의미를 이해했던 것이다.
2
소크라테스가 죽은 63년후, 동방의 진나라에는 풍운을 질타하던 상앙이 생사의 갈림길에 선다. 상앙은 위(衛)나라에서 온 사람이다. 일찌기 위(魏)나라에도 몸을 담았다. 그러나 중용되지 못하자 진(秦)나라로 가버렸던 것이다. 마침 진효공이 천하에서 인재를 모으고 있을 때였으므로,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죽이 맞았다. 진효공은 즉시 상앙을 중용했고, 진나라는 개혁을 진행한다. 역사에서 상앙변법(商鞅變法)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상앙은 귀족의 특권을 취소시키고, 정전제를 폐지한다. 농업과 수리를 개발하고, 경전(耕戰)을 장려한다. 인민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고 군현제와 잔혹한 연좌제를 추진한다. 진나라는 신속히 강성해지고, 이웃나라인 위(魏)나라는 진나라의 창끝을 피하기 위해서 대량(大梁)으로 천도한다. 주나라 천자마저도 앞장서서 진나라에 잘보이려고 했다.
상앙은 신법을 관철하기 위하여, 귀족들과 공개적으로 얼굴을 붉히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태자의 사부까지도 엄벌에 처한다. 진나라가 강대해지자 상앙도 이익을 얻는다. 그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대신이 되고, 진효공은 상앙에게 상(商)의 땅 15개읍을 하사한다. 그리하여 그는 상군(商君)이라 불리운다. 명예, 지위, 이익이 모두 최고봉에 도달한 것이다.
상앙이 진나라에서 일한지 18년이 되었다. 진나라는 상앙의 집정시기에 전국칠웅의 최강자로 떠오른다. 그러나, 상앙의 개혁으로 인하여 집적된 모순은 날이갈수록 늘어났다. 상앙의 진정한 기반은 사실 바로 진효공의 신임과 지지였다. 즉 한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기반은 아주 취약한 것이다. 종횡가인 조량(趙良)은 일찌감치 상앙의 잠재적인 위기를 간파했다. 그는 상앙에게 물러날 것을 권했다. 조량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총신으로 진왕에 연결되었다. 징왕의 지지에 의지하여 이렇게 많은 명예와 이익을 챙겼다. 당신은 백성들에게 너무 가혹하게 대하였고, 백성들에게 덕을 베풀지는 않았따. 제후든 백성이든 모두 당신의 적이다. 만일 당신이 지금의 지위를 계속 탐한다면, 아침햇살아래의 이슬과도 같다. 오래가려고 해도 갈 수가 없다. 그러나, 상앙은 일생동안의 노력으로 얻은 성공을 그렇게 간단하게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여러가지 희망을 그래도 품고 있었다.
조량의 말은 진효공의 병이 위중했을 때 한 것이다. 그는 상앙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산이 무너지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렇게 권한 것이다. 상앙이 만일 물러났더다면, 그의 정적들은 그를 용서해주었을까? 아마도 상앙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이 올 때까지 기다리게 된다. 진효공의 목숨이 끊어지고, 태자 사(駟)가 즉위하니 혜문왕(惠文王)이다. 그들은 많이 생각지도 않았다. 아마도 오래전부터 생각해온 일이었을 것이다. 공자 건(虔)이 상앙을 모반죄로 고발하고, 정부는 바로 그를 추적체포한다.
상앙은 당연히 모반을 꾀한 적이 없다. 그는 이것은 정치적인 적수들이 자신을 음해하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는 심지어 결과거 어찌할지도 다 예견했다. 일찌기 자신에게 당한 바 있는 공자 건의 일파가 현재 자신에 대하여 복수를 꾀한다는 것도 알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정치적인 음해에 그대로 당하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살수 있는 기회를 붙잡으려고 노력할 것인가? 상앙은 지금 소크라테스와 같은 처지에 놓인다. 삶과 죽음이라는 두 극단을 놓고 선택해야 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선택했고, 상앙은 삶을 선택했다.
상앙은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는 진나라를 도망쳐서 빠져나가서 산동6국에서 살 길을 찾고자 하였다. 상앙이 함곡관에 도착하기 전에 함곡관은 이미 닫혀 버렸다. 상앙은 할 수 없이 숙소를 찾아서 투숙했다. 다음 날 바로 함곡관을 빠져나가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상앙은 스스로가 만든 제도때문에 곤경에 처하게 된다. 그는 도망치는 사람이고, 정부에서 발급한 증명문건이 없이는 숙소에서 손님으로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만든 법률이다. 만일 증명문건이 없는 손님을 받으면 처벌받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객잔에서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이때 상앙은 탄식했다고 한다. "오호라, 법의 폐해가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그는 후회했다. 그가 만든 법률에 이처럼 폐해가 컸던 것이다. '함곡관의 아래에서 어느 여관도 그를 재워주지 않았다 .이는 그가 만들어 놓은 법률이 너무나 잘 집행되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역사를 읽는 사람들은 이 곳을 보면서 모두 웃음을 짓는다. 운명의 장난이라 아니할 수 없다.
상앙은 그래도 방법을 강구하여 위나라로 도망친다. 그러나 위나라는 상앙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상앙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얘기한다. 상앙은 현재 진나라의 반란자이고, 이 진나라는 상앙의 노력으로 이렇게 강대해졌다. 그래서 각국은 감히 상앙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도 상앙이 만들어놓은 것이다. 상앙의 생존의 길은 다시 한번 스스로가 만들어놓은 장애물에 걸리게된다.
위나라는 진나라에 밉보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상앙을 가지고 진나라에 잘보이려고 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위나라는 상앙을 붙잡아서 진나라에 돌려보낼 수도 있었지만, 위나라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상앙은 할 수 없이, 위나라에서 다시 진나라로 되돌아온다. 그는 구석에 몰린 맹수처럼 싸웠다. 약간의 살 길이 보이면 백배 노력했다. 그는 자신의 봉읍으로 되돌아갔고, 자신의 사람을 조직해서 군대를 만든다. 그는 이 군대로 진나라에 대항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그는 진나라의 국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 군대를 가지고 정(鄭)나라를 쳤다. 이것은 아주 기이한 결정이다. 그의 머리 속에는 도대체 무엇을 생각한 것일까? 정나라를 치고 스스로 한 지역을 차지하려는 것일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진나라가 좌시하고만 있을 것인가? 정나라의 도시를 차지한다면, 진나라를 위하여 공을 세우는 것이니, 그러한 공으로 죄를 사해보려는 것이었을까? 이같은 국제분쟁을 일으키는 것이 자신이 살 길을 찾는데 도움이 된다는 말일까? 과연 진나라는 상앙의 잔꾀에 넘어가지 않았다. 바로 병력을 일으켜 상앙을 공격한다. 상앙은 전투에서 패하여 죽는다. 진혜문왕은 그래도 멈추지 않고, 여전히 상앙에게 차열(車裂)의 형을 가한다. 그리고 세상사람들에게 고한다: "상앙처럼 모반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모두 같은 죽음을 당할 것이다."
상앙은 생명의 최후순간에,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는 지금도 잘 모른다. 다만, 상앙이 죽어라고 목숨을 연장시키고자 한 것 자체가 문제있는 것은 아니다. 이 노력도 존중을 받아야 할 것인가?
3
소크라테스이건 상앙이건 모두 후인들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사람이 한번 살면서 목숨보다 귀중한 것이 없다. 상앙은 고개를 숙이지 않고 죽었다. 온갖 노력을 다하였지만 결국은 실패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 자체는 고귀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소크라테스에서 상앙까지 그들이 한 인생의 최후선택은 무엇을 의미할까? 생사를 눈앞에 두었을 때의 자연스런 반응인가? 동서방문화의 차이를 드러낸 것인가? 아니면 인류사회와 제도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일가?
소크라테스는 본질적으로 학자이다. 그는 도처에서 강연을 하고, 제자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이념을 보급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그리스의 도시국가에 민주제도개혁이 일어난 후, 사회기반을 확대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 도시국가의 영역내로 들어오게 하고자 했다. 민주기초가 확대되었지만, 이어서 새로운 문제들이 나타났다. 집정자의 자질이 떨어지고, 직권을 이용하여 개인이익을 챙기는 현상이 보편화된다. 그리스의 세상에 대한 오만은 도시국가세계의 좋은 관계도 파괴한다. 이것들은 모두 소크라테스가 우려하던 문제이다. 그는 큰 소리로 호소했다. 정부의 자질을 끌어올리고, 민주제도를 개선하자고. 그는 현재제도의 잠재적인 위기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를 자신의 기득권에 대한 위협을 주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게 된다.
중국고대에는 공평하고 공개된 재판제도가 없었다. 법률은 집권자의 손안에 든 무기였지, 사회의 공기는 아니었따. 이에 대하여 상앙은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확연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상앙은 일단 고발되면 재판은 하나마나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는 법률의 유죄무죄 변호의 문제가 아니라 생사선택의 문제에 놓인 것이다. 그래서 일찌기 제도를 만들고 옹호했던 그는 제도에 위배되는 길을 선택한다. 살아남기 위하여, 그는 특히 노력했다. 심지어 기존 법률의 폐해까지도 언급하게 된다.
아쉬운 점이라면 상앙이 만든 법률의 가혹함인가? 아니면 상앙의 법률관념인가? 법령을 제정하는 사람이 만일 마음 속으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법령을 만든다고 생각한다면 바로 상앙과 같은 딜레마에 빠지게 될 것이다. 상앙의 탄식은 자신의 편리여부를 가지고 법률의 폐해를 논하는 것이다. 그가 백성들을 위하여 법령을 만들 때, 자신에게도 증명문건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백성들을 토지에 꼭 묶어놓겠다는 생각만 했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법률에 만족해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이 똑같은 법률의 구속을 받게 되자, 바로 법률의 헛점을 공박하기 시작한다. 그는 왜 백성들이 그가 만든 법률을 엄격하게 집행하는 것을 보고 자부심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는 왜 상앙이 가더라도 상앙이 만든 법률은 남아있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왜 상앙이 만든 법률이 상앙 자신보다 긴 생명력을 지녔다는데 기뻐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상앙은 정치가였던 것같다. 정치 자체에 투신한 것은 사회이상을 가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신영달을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런 정치가의 눈에는 법률도 좋고 제도도 좋고, 모두 정부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살아가는 수단에 부과한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인생목표는 아니다. 그래서 자신이 위협을 받게 되면, 그는 제도를 포기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상앙이 모반했다는 것은 어거지이다. 소크라테스가 그리스청년들을 부패시켰다는 것도 어거지이다. 그러나, 감옥에 앉아서도 당당한 소크라테스가 있는가 하면, 함곡관의 앞에서 갈곳을 몰라서 헤메고 있는 상앙도 있다. 그들은 각각 서로 다른 선택을 하였고 노력분투한 것이다.
상앙은 상대방의 동기가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정치의 희생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소크라테스는 달랐다. 그는 희생자가 되고자 했다. 상앙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무수한 죄명을 뒤집어 씌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자신을 위하여 변호해줄 사람은 없다고 보았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생명으로 아테네인들에게 마지막 강의를 한다. 한 사람의 억울한 죽음은 한 세대의 사람들에게 반성하게 하는 기회가 된다.
그러나, 상앙이든 소크라테스이건 그들이 정말 후세인들로부터 이해를 받았는가?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아테네에 교육효과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소크라테스가 가장 바라지 않던 일은 그리스민주사회가 계속하여 쇠락하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우선은 제자들이 계속하여 그를 숭상했기 때문이고, 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는 위대한 희생자로 인정받게 된다. 비교하자면 상앙은 나은 편이다. 왜냐하면 그는 당초에 이해받기를 기대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승패를 가지고 영웅을 논하는 근성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 아무도 진혜문왕의 조치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상앙이 차열형을 받은 것을 죄값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상앙에게 동정심을 표시한다. 진나라를 위하여 그렇게 큰 공헌을 하였는데, 마지막은 그렇게 비참했다니.
상앙이 죽으려고 하지 않은 것은 혹시 그의 나이가 아직 육십도 되지 않아서일까?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칠십이 넘은 노인이어서 죽음을 받아들인 것일까? 그러나, 이것은 이유가 되기 힘들다. 생명의 가치는 연령과는 무관한 것이니까. 그러나, 근본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두 사람은 모두 희생자이다. 한 사람은 주동적인 희생자이고, 한 사람은 피동적인 희생자이다. 그러나, 비극의 특징은 동일하다. 사람과 제도의 사이에, 소크라테스는 그가 사랑하는 제도를 위하여 생명을 희생했다. 상앙은? 그는 정치의 희생물이다. 왜냐하면 그는 패전자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어쨌든 이상의 기치를 남겼다. 그러나 상앙은? 그저 생명의 본능만 남겼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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