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증원(曾園)
1740년(건륭5년) 10월 9일, 네덜란드인은 바타비아(Batavia, 지금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화교들의 거처를 수색하도록 명령했다. 이로 인하여 3일에 걸친 대학살이 일어나고 만여명의 화교들이 자신의 집에서 피살당한다. 이전에 체포된 자들은 감옥이나 병원에서 피살당했다. 이것이 바로 역사상 유명한 "홍계참안"이다.
화교의 동남아에서의 활동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구식민세력이 동남아에 도달하기 전에, 화교상인의 동남아에서의 지위는 아주 높았다. <<송사>>에 따르면, "중국상인 들이 도착하면 손님으로 대접하고 음식을 풍성하고 깨끗하게 내놓았다." "무릇 중국인이 그 나라에 오면, 아주 공경했다. 술에 취하면 부축하여 집으로 데려가서 재워주었으며, 마치 옛친구를 만난 듯이 대접했다." 진랍에서는 "토착인들이 아주 순박하여, 중국인들을 아주 공경했고, 부처라고 불렀으며, 바닥에 엎드려 절하고 예를 표했다." 섬라에서는 "나라사람들이 중국에 대한 예절이 아주 진지했고, 다른 나라사람들보다 배는 더 했다. 만일 처가 중국인과 잘 지내면, 술과 음식을 내놓고 같이 식사를 하고 잠을 잤다. 그리고 그 남편은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내 처가 예뻐서 중국인이 좋아한다고 말했다." 중국인들은 비교적 높은 기술과 지식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현지에서 관료가 되기도 하고, 일부 법적 면책특권을 누리기도 하였다. 진랍에서는 법률로 현지인이 중국인을 죽이면 사형에 처하고, '중국인이 현지인을 죽이면 벌금을 중하게 매기며, 만일 돈이 없으면, 몸을 팔아서 그 돈을 낸다"고 되어 있었다. 문랑, 칼리만탄에서는 남녀가 간통을 하면 사형에 처한다. 그러나 중국인과 현지여자가 간통을 하면 죄를 면제받는다. 다만, "머리를 깍고, 그 여자를 처로 삼아야 하며, 이를 듣지 않으면 돌려보낸다"
서구식민자들이 동남아에 도래한 후, 중국인들의 지위는 내려간다. 네덜란드식민자들이 바타비아를 개발하는데, 많은 일들을 중국인(화교)들에게 도급주었다. 네덜란드당국은 중국인들의 벽돌제조기술등에 아주 만족했다. 바타비아를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로 만들기 위하여 네덜란드당국은 중국인들을 많이 모집했다. 1682년, 중국인들이 3,101명에 달한다. 1684년, 청나라정부가 해금을 해제하면서, 중국인들이 속속 바타비아시로 몰려들었다. 당국에서는 이때부터 인구유입을 제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화교는 반드시 허가를 받은 후에만 들어올 수 있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그 효과는 아주 미미했다. 중국인을 고용한 고용주는 관리들에게 뇌물을 바치면서 계속 중국인 쿨리(苦力)들을 데려왔다.
1719년, 바타비아시내의 화교인구는 이미 초기의 800여명에서 4,608명까지 늘어난다. 교외에 있는 화교인구는 7,550명에 달했다. 1720년, 유럽의 사탕시장이 포화상태가 되면서, 자바의 사탕수수농장은 더욱 값싼 브라질사탕수수와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그러면서 많은 농장주가 파산을 하고, 일부 절망한 실업자들은 폭도로 변한다. 당국은 이들을 강제로 실론(스리랑카)으로 이주시킬 것을 준비한다.
1727년 6월 10일, 최근 10년 내지 12년내에 바타비아시에 거주하는 중국인으로 정부에서 발급한 거주허가증을 받지 못한 자들은 모조리 축출하겠다고 규정한다. 바타비아시에 거주한 화교가 쓴 <<카이바역대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1740년, 도적이 사방에서 생겨나고, 경찰이 붙잡은 범죄자의 대부분은 검은 상의에 검은 하의를 입은 중국인이었다. 당국은 상의를 거친 후 검은 상의, 검은 하의를 입은 사람은 모조리 체포하도록 명령하였다. 그 결과 실업상태인 쿨리들 뿐아니라, 시내의 부유한 중국인들까지 재앙을 입게 되고, 화교와 네덜란드당국의 갈등은 더욱 격화된다.
실론으로 보내는 쿨리는 배에서 바다로 던져버린다는 소문이 돌아, 쿨리들이 배를 타는 것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간다리아 사탕수수공장부근에 모인 쿨리가 5천명을 넘어섰고, 이들은 황반(黃班)을 우두머리로 추대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지키고자 한다. 그런데, 화교중에 임초(林楚)라는 배신자가 나타난다. 그는 식민당국에 이를 고발하고, 식민당국은 화교들이 바타비아시로 쳐들어오려고 한다는 이유를 들어, 대규모의 학살을 시작한다.
황반의 부대는 무기가 너무 형편없었기 때문에, 바타비아시를 7일간 공격했지만, 점령하지 못하고, 패퇴한다. 식민당국은 무기를 수색한다는 명의로, 도시내의 화교들에게 모든 무기를 내놓도록 명령한다. 네덜란드군인은 집집마다 수색하여,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조리 체포하여 죽였다. 시내에서 피살된 화교가 만명을 넘어선다. 요행으로 탈출한 사람이 겨우 150명이었다. 불에탄 화교의 주택이 6,7백채에 이르고, 재산손실은 계산할 수도 없었다. 이것이 바로 당시 자바, 중국 및 유럽을 깜짝 놀라게 만든 바트비아대학살이었다. 바트비아시의 서쪽에 강이 하나 흐르는데, 이름이 '홍계(紅溪)'였다. 그리하여 사건발발지점의 이름을 따서, '홍계참안'이라고 불린다.
참안이 발생한 후, 네덜란드총독은 체포되어 감옥에서 목숨을 잃는다. 네덜란드 사료에 따르면, 당시 네덜란드 의회는 이 사건에 대하여 토론을 벌이는데, 청나라의 건륭정부가 군사보복을 하고, 무역거래를 중단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내용이 있다.
복건총독인 책릉, 제독인 왕군은 이 일을 조정에 보고한다. 나중에 조정에서 토론을 거친 후에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피살된 화교들은 '스스로 왕화(王化)를 버리고, '다른 땅에서 살았으니, 실로 오랑캐와 다를 바가 없다.' '다른 땅의 한족들은 스스로 '성화(聖化)'를 포기한 것이다' 그러므로 화교들이 학살을 당한 것에 대하여, '실로 스스로의 자초한 것이다.' 그러니, '성조(聖朝, 청나라정부)'는 이에 대하여 책임을 물을 필요가 없다. 그저 피차간의 통상무역을 중단하면 된다.
이로 인하여 바트비아의 경제는 불경기에 빠진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이라면, 이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1603년 스페인식민자들이 필리핀의 화교 2만명을 학살한 사건이 벌어졌었다. 명나라정부는 이에 대하여 군사적인 보복을 하고 죄를 추궁하지 않았다. 그저, 스페인 사신에게 말로써 엄히 질책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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