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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대외관계

중국과 아랍과의 교류

by 중은우시 2009. 7. 22.

글: 조달명(趙達明)

 

아랍과 중국의 과학문화교류는 제국이 건립되기 전부터 이미 오랜 기간동안 존재해왔었다. 이슬람문명을 특징으로 하는 아랍제국기 들어선 때는, 때마침 중국역사상 과학기술이 발달했던 당, 송 시대였다. 그러므로, 두 문명의 교류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이슬람의 창시자인 모하메드(Mahammed, 570-632)는 일찌기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지식은 비록 멀리 중국에 있더라도 가서 구해야 한다" <<구당서. 서역전>>의 기록에 따르면, 당고종 영휘2년(651년)에 대식국(大食國, 즉, 아랍제국)의 세번째 칼리프인 오스만(Uthman ibn Affan, ? - 656)은 사절을 장안으로 보내어 당나라와 우호관계를 건립한다. 당고종은 무슬림 사절을 위하여 청진사(淸眞寺, 이슬람사원)를 칙명으로 짓게 한다. 그후 쌍방은 빈번하게 왕래한다. 중국사서에 기록된 것만 대식국의 사절이 중국으로 온 횟수가 37회에 달한다. 안사의 난이 발발한 후, 757년에 당나라는 대식국에 지원을 요청하고, 대식국은 수천명의 병사를 보내어 안사의 난을 평정하도록 도와준다. 이들은 나중에 대부분 중국에 남아서 중국의 회회인의 선조가 된다.  8세기중엽, 중국의 두환(杜環)은 아랍지역으로 가는데, 그의 족적은 북아프리카 마그리브(Maghrib)의 모로코에까지 미친다. 그리고 그가 보고 들은 것을 책으로 쓰니, <<경행기(經行記)>>이다. 이는 중국-아랍문명교류에 고귀한 기록이다.

 

중국의 "사대발명"중 가장 먼저 외부로 전래된 것은 제지술이다. 8세기, 즉, 대식국의 세번째 칼리프인 오스만이 당나라에 사절을 보낸 100년후에, 외부세계에서 첫번째 제지공방이 사마르칸트(Samarkand,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부근)에 출현한다. <<여정과 왕국>>이라는 책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종이는 포로에 의해 중국에서 사마르칸트로 도입되었다" 시간적으로 서로 차이가 얼마 나지 않게, 바그다드에도 제지공방이 출현한다. 바그다드도 좋고, 사마르칸트도 좋지만, 제지기술은 모두 중국의 장인들에 의하여 전수된다. 제지술은 나중에 유럽에까지 전래된다.

 

제지술에 이어, 일부 중국의 다른 발명품들도 저명한 비단길을 통해서 아랍제국에 전해진다. 나중에는 제국판도에 들어있는 스페인, 시칠리와 프랑스의 일부지역을 거쳐 유럽전체로 퍼진다. 이는 서방문명에 큰 영향을 미친다.

 

과학과 문화교류가 발전함에 따라, 이슬람교가 중국에 전래될 뿐아니라, 아랍제국의 선진적인 수학, 천문역법과 항해, 지리지식을 중국인들도 습득하게 된다.

 

해상 비단길은 개략 9세기초에 나타난다. 이것도 두 문명교류의 유대를 이어준다. 10세기, 아랍상인인 슐레이만(Suleiman)이 항해가인 이븐 와하브(Ibn Wahab)와 같이 상선을 바스라(Basra)에서 시라(Siraf)에서 해로를 따라 중국의 광저우항으로 들어온다. 그후 그들은 중국의 풍토와 인정에 대하여 대량의 서술을 한다(이는 Abu Zeid Hassan이 정리했다). 당시 아랍세계는 중국에 대하여 더 많이 이해하게 된다. 이런 이야기는 아마도 아랍의 유명한 책 천일야화(the Arabian Nights)에 중국과 관련된 많은 소재를 제공하였을 것이다.

 

이븐 바투타(Abu Abdullah Muhammad Ibn Battuta, 1304-1369)는 중국인들이 잘 아는 저명한 모로코여행가이다. 그는 21세때 고향인 Tangier를 떠나, 이때부터 30년에 걸친 여행을 하게 된다. 이븐 바투타는 아마도 증기기관차가 나타나기 전에 여행거리가 가장 긴 여행가일 것이다.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의 모든 이슬람국가를 방문한 외에 그의 여행족적은 사하라(sahara)이남과 동부아프리카, 인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몰다이브, 비잔틴, 러시아남부에까지 미친다. 중국도 그의 여행에서 아주 중요한 장소중 하나이다. 중국의 항저우(杭州), 췐저우(泉州), 베이징(北京, 당시는 원의 대도)등지에 모두 이 위대한 여행가의 여행, 고찰의 족적을 남겼다.

 

이븐 바투타는 여행을 마치고 모로코로 돌아간 후, 여행견문을 구술했다. ibn Juzay Al'Kalbi가 3개월에 거쳐 기록하고 정리한 다음 <<이븐 바투타 여행기>>(Travels of ibn Battuta)를 만든다. 이 여행가의 기록은 풍부하고 사실적인 자료를 담고 있다. 그리하여 중세기 지리, 역사, 민족, 종교, 민속등에 있어서 가치가 아주 높은 저작이다. 또한 아랍제국 및 서방의 사람들에게 중국을 이해하게 하는 창구였고, 오랜 기간동안 학자들에 의하여 인용되었다.

 

그들의 선진적인 의약지식은 중의약의 내용을 아주 풍부하게 해준다.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중약은 상당한 부분이 당시 무슬림상인과 의학자들이 아랍, 페르시아 및 인도등지에서 도입한 "해약(海藥)"이었다.

 

이븐 나딤(ibn al'Nadim, ?-999)은 <<과학색인(Fihrist al'Ulum, 영문명은 the Index of Sciences)>>이라는 책에서 저명한 의학자 라치(al'Razi, 유럽인들은 Rhazes라고 부름, 865-925)가 한 중국의약학자를 도와준 이야기를 싣고 있다. 바그다드에서 공부하고 라치의 집에 머물던 중국의약학자는 귀국전에 라치에게 그가 고대그리스의 의학자 갤런의 의학저작 16권의 아랍번역본을 읽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중국의 속사법으로 그 전문을 기록하여 중국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Joseph Needham(1900-1995)의 <<중국과학기술사>>에서도 이 이야기를 싣고 있다.

 

중화문명과 아랍문명은 서로 융합되고 통하며, 서로 보완했고, 서로 배우면서 공동으로 인류문명의 발전을 이끌었다. 이런 문명의 교루는 인류역사상 문화교류의 모범이라고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