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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조광윤)

양송(兩宋) 황제전승의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07. 12. 24.

송태조 조광윤

 

송태종 조광의

 

 

글: 장경위(張敬偉)

 

송나라는 남북으로 나뉘어 합하면 319년간 존속했고, 남북에 각각 9명의 황제가 있다. 양송은 중국인들에게 아주 감정이 복잡한 황조이다. 한편으로는 경제가 번영했고, 문화가 발달했으며, 감히 문신치세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고, 지금까지도 문인선비들이 칭송하는 왕조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양송은 진정한 의미에서 통일왕조도 아니고, 북송은 거란(요), 서하와 정립했고, 남송은 여진(금)과 남북을 나누어 통치했다. 그리하여, 양송은 역사학자들에 의하여 "적빈적약(積貧積弱)"으로 평가받았다.

 

더욱 기괴한 일은, 양송황제의 세계전승이 아주 재미있다는 점이다. 태조가 죽은 후 남겨진 "촉영부성(燭影斧聲)"은 천고의 수수께끼이며, 형으로부터 동생이 황위를 이어받고, 아들이 황위를 잇지 못하는 형국을 낳았다. 이러한 황위계승은 역사학자들 사이의 논쟁거리일 뿐아니라, 민간에서 송태조의 후대를 동정하고 이에 따른 소설등 야사를 많이 낳게 된다. <<양가장>>의 전통희곡에서건 <<삼협연의>>의 평서에서건 모두 위풍이 당당한 "팔현왕(八賢王)" 조덕방(趙德芳)이 나오는데, 그는 태종, 진종, 인종연간에 활약했고, 황제를 적절히 견제하는 현명한 왕으로 묘사된다. 심지어 하남예극(豫劇), 곡극(曲劇), 월조(越調)등의 희곡에서는 그리고 전통희극인 <<회룡전(回龍傳)>>에서는 인종이 아들이 없어, 팔현왕의 민간에 떠돌던 아들인 왕화(王華)로 하여금 대통을 잇게 하였고, 이리하여 송황조는 제5대부터 다시 송태조의 지계(支係)가 잇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민간전설이라는 것은 황당하기 그지 없다. 그러나 많은 진실한 역사성분도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어, 조덕방은 확실히 송태조의 아들이다. 그리고 송고종 조구(趙構)가 남으로 이전한 후 자식이 없어서 조덕방의 6세손인 조 를 태자로 세운다. 그가 바로 송효종이다. 송영종에 이르러, 황위는 또 다시 송태조의 또 다른 아들인 조덕소(趙德昭)의 일맥에 전해진다. 조덕소의 구대손이 송이종(宋理宗)이다. 그래서, 송나라는 남북양조에 태조, 태종형제들이 돌아가면서 황제위에 앉았는데, 중국역사상 유례가 없는 경우이다.

 

바로 황제를 돌아가면서 맡았다는 특이한 점으로 인하여, "촉영부성"이라는 천고의 수수께끼사건을 다시 해석해볼 필요도 생긴다. 필자는 정사이건 민간전설이건 모두 송태종의 황위계승을 너무 음모적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진실한 역사를 확인해서 이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송태조의 두 아들 조덕소, 조덕방의 후손이 황실의 특권을 대대로 누리고, 남송에 이르러서는 다시 황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송태종 및 그 후손들이 송태조와 그 후손에 대하여 무슨 경계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중국의 각황조에서 황위쟁탈전은 왕왕 부자간에도 일어났고, 형제간에도 일어났다. 승리자는 패배자을 참초제근(斬草除根)하여 뿌리를 뽑아버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점에서 천고의 성군이라는 당태종 이세민도 마찬가지였다. 만일 송태종이 송태조를 모살하는 대역무도한 일을 저질러 황제위를 찬탈하였다면, 이미 명성은 더러워질대로 더러워졌는데, 왜 굳이 송태조의 후손을 그대로 두었을까? 황제위를 찬탈했던 사람 예를 들어 명나라 영락제 주체가 건문제에 어떻게 잔혹하게 대했는지등은 분명한 증거이다. 송태종과 그 후손이 송태조의 후손을 잘 대해주었다는 것은 인정의 면에서나 상식의 면에서나 송태종이 황제위를 찬탈하지 않았다는 하나의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다.

 

둘째, 오대의 난세의 상황을 보면, 송태종이 송태조를 승계한 것에는 역사이성이 충만하다. 오대의 난세에 십국이 들고 일어났다. 조광윤(송태조)은 당시 북주의 어린 황제 시종훈의 손에서 황제위를 빼앗아 왔다. 이것이 유명한 "진교병변" "황포가신"이다. 그런데, 이 전체적인 권력쟁취의 과정에서 동생인 조광의(송태종)는 큰 역할을 한다. 석수신과 같은 부장들은 그저 보조적인 역할을 했을 뿐이다. 이것들은 모두 조씨의 송왕조권력구조의 독특한 점을 보여준다. 그래서, 시씨의 어린 아들로부터 빼앗아온 황제위의 교훈 및 조광의 본인의 노력으로 태조, 태종형제는 황위에 관하여 형이 죽으면 동생이 승계한다는 양해가 있었고, 이것은 어느 정도 합리성도 있다. 당태종의 "현무문의 변"과 명나라 영락제가 일으킨 "정난지역"으로 보면, 송태조는 역사적인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역사기록으로 보면, 태종이 황제위에 등극하면서 일찌감치 마음에 거리끼는 점이 있었다. 그러나 그도 형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게 떠밀려서 황제가 되었다. 사마광의 <<속수기문>>에 따르면, 송태조가 붕어할 때 송태종은 현장에 없었다. 태조황후는 내시 왕계은에게 명하여 진왕 조덕방을 입궁하도록 한다. 그러나 왕계은은 오히려 조광의를 찾아온다. 조광의의 태도는 그의 형이 "황포가신"할 때와 비슷하게 놀란다. "나는 집안 사람들과 논의해봐야겠다"고 한다. 왕계은등의 종용에 따라, 조광의는 황제위에 오른다. 필자는 사마광의 기재에 대하여 그다지 의심하지는 않는다. 한편으로 사마광은 역사를 아주 엄격하게 기록했고, 다른 측면으로 그의 기록은 비교적 객관적이기 때무이며, 송태종을 위하여 감추려는 뜻은 없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필원의 <<속자치통감>>도 이러한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촉영부성"의 문제에 대하여 야사인 <<속상산야록>>을 보면: "황상이 태청각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았다...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지고, 날씨가 급변하여, 눈보라가 내려, 태청각에서 내려왔다. 급히 궁에 전하여 단문을 열게 하고, 개봉왕을 불렀다. 즉 태종이다. 두 사람은 대작을 했다. 환관과 궁녀들은 모두 물러나 있었다. 그러나 멀리 촛불그림자아래에 태종이 자리를 피하면서 견디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술마시는 것을 마친 후에 이미 삼경에 이르렀고, 대전에는 눈이 수촌(數寸) 내렸다. 황제는 주부(柱斧)를 끌여 눈을 자르며, 태종을 보고 말했다: "잘한다. 잘한다". 이어 허리띠를 풀고 잠에 들었으며, 코고는 소리가 벽력과 같았다. 그날 저녁에 태종은 궁내에 유숙했고, 5경이 되어, 지키는 자들이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가보니 황제는 이미 사망했다. 태종은 유조를 받아 관앞에서 황제위에 올랐다" 이 기술은 지나치게 문학화되어 있고, 구체화되어 있어서, 오히려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마찬가지로 야사에 속하는 <<진여록>>은 더더구나 <<속상산야록>>을 바탕으로 더욱 소설화하였다. 송태종이 조광윤의 비인 화예부인을 희롱하다가 송태조에게 발견되자 아예 옥부(玉斧)로 형을 시해하였다고 적었다.

 

또 어떤 사람은 송태조의 아들인 조덕소의 자살사건을 송태종이 형을 시해하고, 태종의 후대를 시기한 증거로 제시한다. 사실은 이렇다. 태평흥국4년(979년), 조덕소는 송태종을 따라 출정했으나, 패저했고, 군대와 조정의 어떤 사람들은 송태종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여 조덕소를 옹립할 뜻이 있었다. 조덕소는 이로써 송태종에 대한 금기를 범한 것이다. 그러나, 조덕소는 이러한 잘못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송태종에게 출정한 장군들에 대한 논공행상을 아�었다. 조덕소는 너무 많이 관여한 것이 분명하다. 송태종은 화가나서, 조덕소에게 네가 황제가 되고난 후에 네맘대로 해도 늦지 않지 않느냐고 소리쳤다. 이로써 볼 때, 조덕소의 행위는 송태조의 아들이라는 세력을 등에 엎고 숙부의 권한을 침해한 잘못이 있다. 조덕소가 자살한 것은 송태종이 핍박한 것이라기 보다는 조덕소가 죽음으로 자기의 분함을 나타낸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러한 사건을 보고, 세상사람들은 더욱 조덕소를 동정하고, 송태종은 자기의 오명을 더욱 씻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태종이 형을 시해하였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본다. 다만, 이것이 송태종이 황제위를 노리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형에게 용포를 입혀준 행위를 보라. 당연히 송태종은 송나라의 중원통일과정에서 커다란 공로를 세웠다. 왕계은등이 태조가 위중하거나 서거했을 때 조광의라는 실권자에 의하지여 자기의 이익을 보호받고자 한 것도 이해가 된다. 당시의 역사배경에 익숙하다면, 송태종은 사실 송태조의 길을 다시 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송태조는 시씨의 고아로부터 강산을 빼앗은 것임에 반하여, 송태종이 빼앗은 것은 형제의 자리였던 것이다.

 

기이한 것은 송태종은 너무 총명하였던지, 조보와 함께 "금궤지맹(金櫃之盟)"이라는 것을 조작해서, 태조태종의 모친인 두태후의 의지(懿旨)에 근거하여, 나라에는 나이든 군주가 있어야 사직기강이 선다는 것등을 운운하며 태조가 태종에게 "형종제급(兄終弟及)"의 합법적인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조광의는 후에 동생인 조정미(趙廷美)를 핍박하여 죽음에 몰아넣음으로써, "금궤지맹"이 허위라는 것을 오히려 드러내게 된다.

 

그래서, 남북양송의 태조, 태종의 두 계통이 돌아가며 황제의 보좌에 앉은 역사를 볼 때, 태종이 형을 시해하였다거나 태조의 후예는 모조리 싹을 잘랐다는 것은 믿을 바가 못된다. "촉영부성"이 천고의 수수께끼가 된 것은 한편으로 봉건궁궐내의 이야기를 대외에 공개하지 않았다는 데서 비롯되었고, 더욱 중요한 점은 송태종 본인이 도덕화를 위하여 화사첨족의 소위 "금궤지맹"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옛날 말을 그대로 증명해준다. 너무 총명해서 머리를 많이 쓰게 되면, 오히려 명성에 득이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