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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조광윤)

조광윤: 나도 살고 남도 살도록, 나도 말하고 남도 말하도록...

by 중은우시 2009. 1. 10.

글: 사식(史式)

 

송태조 조광윤(趙匡胤)은 개국후 3년이 되는 해에, 비밀리에 비(碑)를 하나 만들어, 태묘의 침전에 있는 협실(夾室) 안에 세워두었다고 한다. 평소에는 금황색천으로 가려 두었다. 황제가 매년 제사를 지낼 때와 신황제가 즉위할 때, 비로소 비에 써둔 서사(誓詞)를 읽었다. 이전에는 모두 감히 비밀을 누설하지 못하여, 심복대신조차도 서사의 내용을 몰랐다. 정강지변이후에 금나라사람들이 태묘안의 예기를 모조리 약탈해 가버렸다. 태묘의 문이 열리자, 일반백성들도 마침내 들어가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소위 "서비(誓碑)"는 높이 7,8척이고, 너비는 4척가량이었다. 위에는 서사가 새겨져 있었는데, 모두 3조문이었다.

 

1. 시씨(柴氏, 주세종)의 후손들은 죄가 있어도 형을 가하지 말라. 비록 역모의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옥중에서 자진하도록 해주고, 시중에서 공개처형하지 말라. 그리고 다른 지속(支屬)에 연좌시키지 말하.

 

2. 사대부 및 상소하여 말하는 자를 죽이지 말라.

 

3. 자손으로서 이 맹서를 어기는 자는 하늘이 반드시 그를 죽일 것이다.

 

필자는 위의 서사를 보면서, 조광윤이 치국이념에 있어서 전황조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바로 일종의 관용(寬容)정신이다. 이런 관용정신은 두 가지로 표현이 되었다. 하나는 "나도 살고 남도 살도록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도 말하고, 다른 사람도 말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진시황때부터 오대(五代, 후량, 후당, 후진,후한,후주)까지 1000여년의 전제왕조시기에 치국자는 전제독재를 할 줄 알았지, 관용정신은 조금도 몰랐다. 진나라 이전에는 황제가 없었고, 진이세(秦二世)는 음모로 황제위를 차지한 후, 자기의 자손이 황제위를 독점하기 위하여, 자기의 형제자매, 영씨일족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그리고 혹형을 써서 죽인다. 나중에 제왕들은 전황조의 황족에 대하여 모조리 풀을 뽑을 때는 뿌리까지 뽑아버리는 정책을 썼다. 그저 많이 죽이고, 적게 죽이고, 공개적으로 죽이고, 암암리에 죽이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죽이느냐 안죽이느냐의 차이가 아닌 것이다. 이것은 바로 "나만 살고, 남은 살지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진나라때의 "우어기시(偶語棄市)"부터 명, 청시기의 문자옥(文字獄)까지 근본적으로 백성들이 입을 열지 못하도록 막았다. 입을 열거나, 입을 열려고 하는 자는 모조리 죽여버렸다. 이것은 "나만 말하고, 남은 말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전제정치하에서, 사상이 진보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생산에서도 발전이 없다. 어쨌든 모든 것은 정해진 규칙대로만 해야 하는 것이다. 조금도 개선이 없다. 조광윤은 단지 직업군인이었다. 지식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책읽기를 좋아하고, 머리쓰는 것을 좋아했다. 일부 중대문제를 처리할 때는 관용의 정신에 근거하여 처리했고, 실제상황을 더 많이 이해했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더 많이 들었다. 그리하여 더욱 전면적이고 더욱 주도면밀한 해결방법을 만들어낸 것이고, 여러 방면에 모두 좋은 것이었다. 진교병변이래로, 그는 이 관용정신에 따라, 크지않은 댓가를 치르고, 총명하고 이성적으로 크고 작은 일들을 이루었다.

 

북송의 개국초기에, 영토는 협소하고, 북으로는 요나라의 압박을 받으며, 남으로는 할거정권으로부터 견제를 받았다. 단기간내에 군사대국이 될 여건은 못되었다. 조광윤은 그리하여 방향을 바꾼다. 중화자녀의 총명재지를 발휘하여 생산발전에 노력하고, 경제대국과 문화대국을 지향한다. 양송시대에 군사는 약세였지만, 1인당 생산가치로 보면 전세계에서 가장 앞선 편이었다. 세계의 절대다수의 국가가 칼과 창만을 알고 전쟁에 의지하여 발전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조광윤은 "봉장고"를 설립하여 돈을 모아서, 과거에 잃었던 땅인 연운십육주를 "돈을 주고 사오려는 계획(贖買)"을 세운다. 경제수단으로 국제적 난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요나라사람, 금나라사람, 몽골사람이 아직도 창과 칼을 휘두르며 패권쟁탈을 하고 있을 때, 송나라사람들은 이미 비단, 자기, 활자, 인쇄술, 나침판, 해선, 화약, 총포, 석유채굴, 지폐사용등 새로운 시대의 문명을 창조했다. 그리고 전인류가 근대사로 들어서도록 이끌었다.

 

조광윤은 관용정신이 있었으므로, 그리고 약간의 경제적인 머리가 있었으므로, 송나라의 많은 정책에서 아주 좁지만 틈을 둔다. 많은 과학기술의 맹아는 모두 이 틈을 뚫고 나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농촌에서 도시로 들어오고, 점차 농업노동력이 수공업노동력으로 바뀌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점차 육지에서 해상으로 향했고, 중세기에서 근대화로 향했다는 것이다. 당송의 양대는 모두 300년가량 존속했다. 다만, 이 300년은 서로 많이 다르다. 당나라의 300년동안에는 제자리걸음을 했지만, 송나라이 300년간에는 큰 발걸음으로 근대화를 향해 나아갔다.

 

조광윤은 관용정신이 있었기에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경제발전과정에서 그는 더욱 많은 관용정신을 요구했다. 그리고 민주의식이 나타났다. 그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거대한 역사의 금현을 울렸다. 그는 자신의 관용정신에 의거하여 한번 또 한번의 협상탁자에서의 승리를 예견하고 있었다. 송나라를 위하여 백년이 훨씬 넘는 기업을 세웠던 것이다. 전혀 생각도 못한 일이라면, 이 관용전신이 인류물질문명의 발전을 이루게 되고, 정신문명의 발전도 이루게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것은 정말, 쇠신발이 닳도록 다닐 때는 찾을 수 없더니, 얻으려니 전혀 힘을 들이지 않는다는 식이다.

 

"나도 살고, 남도 살수 있도록" 이 원칙은 절대로 정확하다. 잘살든 못살든 모두 살아갈 수 있다. 어쨌든 상대방을 참초제근(斬草除根)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나도 말하고, 남도 말하도록" 이 원칙도 절대로 정확하다. 모두 말을 할 수 있어야, 이말 저말이 나와야 비로소 협상이 되고, 논쟁이 되는 것이다. 그래야 새로운 사물의 탄생을 기대할 수 있다. 그래야 인류의 진보를 이끌 수 있다.

 

군인출신으로 나중에 군벌이 된 조광윤은 군벌의 악습이 남아 있다. 그가 남당(南唐)으로 진격하려고 할 때, 남당의 사신 서현(徐鉉)이 그에게 왜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느냐고 묻자 그데 대한 대답으로 한마디를 던진다: "어찌 침상 옆에서 다른 사람이 단꿈을 꾸는 걸 용납할 수 있겠는가?" 이 말을 정말 야만스럽고 막무가내식이다. 상대방은 그저 두려워하며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한번은 조광윤이 황궁의 후원에서 마작을 하고 있었다. 한 가까운 신하가 급한 일이 있다고 뵙기를 청했다. 조광운은 즉시 접견한다. 그런데, 이 자는 이 말 저 말 쓸데없는 말만 계속 하고 있고, 전혀 급한 일도 아니었다. 조광윤은 그에게 왜 거짓말을 하느냐고 질책한다. 그러자 그가 말한다: "이 일은 어쨌든 폐하가 마작을 하는 것보다는 급한 일입니다" 조광윤은 대노하여, 손에 들고 있던 주부(柱斧, 일종의 문방용구)로 때려서 그 신하의 이빨 2개가 부러지게 된다. 그 신하는 묵묵히 이빨을 주워서 주머니에 넣는다. 조광윤이 그에게 말했다: "어떠냐. 너는 가서 나를 고발할 생각이냐?" 그러자, 그 신하가 즉시 대답했다: "소신이 어찌 감히 고소하겠습니까. 다만 천자의 언행은, 누군가는 기록할테니 그것이면 됩니다." 조광윤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바로 그에게 속죄하고 배상을 해주겠다고 한다. 이를 보면, 조광윤은 몸에 군인의 악습이 적지는 않지만, 그는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남다른 점이다. 조광윤은 성인도 아니고, 완벽한 사람도 아니다. 그저 생각을 많이하고, 용감하게 잘못을 고칠 줄아는 보통사람이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