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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언어

보통화(普通話)의 탄생과정

by 중은우시 2010. 4. 22.

글: 이원강(李遠江)

 

1845년 6월 15일, 영국의 선교사인 스미스는 오송구(吳淞口)에서 희극적인 장면을 목격한다: "나의 남자시종(닝보 사람)은 온갖 회화능력을 발휘하여 선원, 과일장사 및 다른 사람들과 얘기를 했지만, 그의 말을 절반도 알아듣지 못하자, 기운이 빠져있었다." 비슷한 광경은 다른 통상항구에서도 나타났다. 닝보에서 스미스는 "지방정부의 관리는 일반적으로 현지사람이 아니다. 관리들이 현지의 사투리를 말할 줄 아는 경우가 드물어서, 부득이 통역원을 고용한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 해에, 5개의 통상항구가 개방된지 3년이 되지 않은 때였다. 스미스가 본 것은 바로 고대중국에서 수천년간 지속된 언어분열의 현황이었다. 이 제국의 절대다수의 인구가 한어를 말하지만, 장기간 서로 봉쇄되고 격리되어 있다보니 각지의 방언은 천차만별이었다. 그리하여 같은 한족이라도 다른 동네에 살면 서로 자유롭게 얘기할 수가 없게 되었다.

 

스미스는 이번 여행의 목적이 5개 통상항구의 자연지리와 풍토인정을 살피는 것이었다. 영국 성공회에서 나중에 선교하는데 편리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가능한한 중국을 많이 이해하기 위하여, 그는 기회만 있으면 통상항구에서 가급적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보았다. 거기에서 그는 거의 정체된 사회를 본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중국언어의 분열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준다.

 

그곳은 소농경제의 천하였다. 대규모의 상품유통도 없고, 지속적인 인구유동도 없다. 지방관리의 수량은 아주 제한적이고, 행정기능도 세금징수와 질서유지정도였다. 관리는 이 동네에서 가장 주요한 외지인이었다. 그들은 현지에서 "관화(官話)"(즉, 수도방언, 청나라중기이후에는 북경어)를 아는 통역원을 통하여 현지주민들과 의사소통을 했다. 분명히 이런 정태적인 사회에서, 언어의 장애는 사람들의 생활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므로, 중국전통사회에 변화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방언이 서로 분리된 상황은 타파되기 힘들었다.

 

그러나, 통상항구에서는 스미스가 전혀 다른 광경을 목격한다. 수백수천의 배들로 남북을 오가는 상인들이 온갖지역에서 몰려들어 상업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상해에 갔을 때는 오송하의 북안에 "상인들이 거주하는 서양식주택이 막 지어지고 있었다." 그곳이 바로 나중에 세계에 이름을 날리는 상해탄이다.

 

1853년, 태평천국이 남경을 수도로 정한고, 장강하류의 부유한 지방이 전란에 휩싸인다. 십여년간, 강남의 유일한 안전지역으로서, 상해조계인구는 1845년에 수백명에서 급격히 팽창하여 1862년에는 50여만명에 이른다. 인구의 급증은 상해의 번영을 가져왔다. 동시에 각지의 방언도 가져왔다. 상해탄은 남북의 사투리(주로는 강소,절강,소주의 방언)의 짬뽕이었다.

 

어찌 상해뿐이겠는가?

 

서방열강에 계속 들어오면서, 개방된 도시가 갈수록 많아졌다. 해안선을 따라서, 강을 따라서, 중원의 요지에서 내륙의 변강까지, 거의 모든 중요한 도시는 차례로 통상개방도시가 된다.

 

전통적인 농경사회는 계속되는 무역의 파도에 완전히 타파된다. 외국선박이 계속하여 중국의 내하로 들어오고, 철로는 바이러스처럼 급격히 자랐다. 곧이어 근대공업이 일어난다. 발달한 통상개방도시는 점차 현대도시로 변모한다. 무역과 근대공업의 발달과 더불어, 인구유동도 가속화되여, 일찌기 고인 물과 같았던 중국에는 이미 파란이 일고 있었다.

 

방언의 벽이 허물어진다. 그러나 전국에 적용되는 표준음은 나타나지 않았다.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한가지 언어가 일부지역에서 통용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관화'이다.

 

1845년, 스미스가 닝보에서 이러한 것을 발견한다: "지방방언이 아주 많아서, 경성방언이 널리 쓰였고, 제국각곳의 정부기관간의 교류에서 통용언어가 되었다."

 

사실은 이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마찬가지의 관화이지만, 각자 짙은 지방특색을 나타냈다. 예를 들어, "북경관화" "천진관화" "산동관화" "남경관화" 내지 "소흥관화" "광동관화"등이 있었다. 이처럼 순수하지 않은 관화는 "남청관화(藍靑官話)"라고 불리웠다. 이는 북경발음과 지방방언이 융합한 산물이다. 비록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그래도 북경말에 가까운 형태였으며, 의사소통에 크게 곤란을 느끼지는 않았다.

 

사실상, 1844년에 이미 스미스는 광주에서 북경관화를 배우는데, 그때 희극반의 단원들이 쓰는 말은 남경말(그는 이것을 구관화라고 불렀다)이었는데, 듣는데 크게 장애가 없었다.

 

그러나, 관화는 모든 사람이 할 줄 아는 것이 아니었다. 한자는 표음문자도 아니다. 자음을 하나하나 죽어라 외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학습의 난도가 상당했다. 그러므로, 방언지역에서, 관화는 기본적으로 상류계층의 전용물이었다. 인구의 대다수를 점하는 일반백성은 차이가 큰 방언의 앞에서 그저 스미스의 그 남자시종처럼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방언으로 곤란을 겪는 것은 일반백성들 뿐만이 아니었다. 일찌기 1728년, 옹정제는 방언때문에 정부의 명령이 전달되는데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관리들에게 관화를 보급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각지에 "정음서원(正音書院)"을 설립하게 하고 방언이 가장 알아듣기 힘든 복건, 광동성등에 먼저 관화를 보급한다. 8년이후에 복건, 광동의 두 성에서 거인, 수재, 공생, 동생중 관화를 못알아들으면 일률적으로 과거시험에 참가할 수 없도록 했다. 그러나, 보급결과는 결국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힘든 복주관화, 하문관화, 광동관화를 만들어냈을 뿐이다. 복건광동의 두 성에서 관화를 보급한 일백여년후 과거출신인 유신파영수 양계초(광동 신회 사람)는 관화를 할 줄 몰라서 광서제와 정상적인 의견교환을 할 수가 없었다. 이를 보면 언어통일은 한마디로 처리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유성기, 전화, 라디오등의 언어매체가 탄생하기 전에, 문자는 여전히 정보전달의 중요한 형식이었다. 청나라정부는 한자의 '서동문(書同文)'의 편리에만 만족했고, 언어를 통일하는데 그다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만일 새로운 역량이 개입되지 않는다면 관화의 판도에 큰 변화는 발생하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서방열강의 침략은 중국에 승리한 결과만이 아니라, 일부 개명한 중국지식인들은 서방을 배우기 시작한다. 위원(魏源)의 "오랑캐의 장점을 배워서 오랑캐를 이긴다"는 것에서부터, 양무운동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다시 유신의 사조가 일어나면서, 서방현대문화를 보급하는 것이 지식인계층의 컨센서스를 이루게 된다. 이때 번잡하고 어려우며, 직접 읽을 수 없는 한어는 신식교육보급에서 첫번째 골치덩이였다.

 

1892년, 한자를 읽을 수 없는 곤란을 해결하기 위하여, 하문사람인 노당장은 절음자 전문서적 <<일목요연초계>>를 출판하여, 첫번째 한어병음자모방안을 만든다. 이 책의 서언에서 그는 첫번째로 '언어통일'의 구호를 내걸고, 남경관화를 한어의 표준음으로 하자고 주장했다.

 

남경관화는 남경어를 기초로 한 중국관방표준어였다. 남경은 춘추시대에 오나라에 속했고, 현지언어는 오어(吳語)이다. 진나라때 중국의 한민(漢民)이 남으로 건너가서 남경에 수도를 정한 후에, 중원의 아음(雅音)이 남경상류계층의 언어가 된다. 그후 중원은 전란에 빠지고, 한족들이 여러차례 남하하여, 남경어에는 비교적 중원의 고음이 많이 남아 있다.

 

명나라가 건국되었을 때, 주원장이 남경을 수도로 정한다. 남경말이 정식으로 중앙정부의 공용언어가 된 것이다. 명성조 영락제가 북경으로 천도한 후, 남경 및 부근일대에서 130여만의 인구를 데려간다. 이것이 바로 명나라 북경인의 기초이다. 그들은 주로 내성에 거주했고, 원래 내성에 거주하던 현지주민은 성밖으로 쫓아냈다. 그리하여 북경인들이 말하는 것도 여전히 남경관화가 된다.

 

청나라초기, 명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여, 남경관화를 '정음'으로 한다. 1728년, 옹정제가 정음관을 설립하고, 북경관화를 국어정음으로 삼는다. 남경관화는 이로써 중앙정부관방언어의 사명을 다한다. 300여년의 시간 속에서 정권의 힘을 빌어, 남경말은 광범위하게 전파되고, 각지의 관화 내지는 방언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다.

 

남경관화는 첨단음이 분명하고, 입성이 있다. 이런 특징은 모두 순수한 중원의 아어에서 유래한다. 즉 송나라이전의 중원관화이다. 노당장은 남경관화를 표준어로 하자고 주장했는데, 바로 남경관화가 한어고음을 비교적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중국의 관방언어였고, 영향을 미친 지역도 비교적 많았기 때문이다.

 

다만, 노당장의 한어병음자모방안은 하문방언을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전국의 병음방안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그리하여 그가 남경관화를 표준어로 하자고 한 주장도 그다지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와 반대로, 한자식 병음방안으로 중국에 유명한 하북사람 왕조(王照)는 오히려 반대의견을 내놓는다. 즉, 북경말을 표준음으로 하자는 것이다.

 

남경관화가 중원고음을 많이 보류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왕조가 제창한 북경관화는 북방유목민족 특히 만주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만주인들이 중원에 들어온 후, 만주어는 새로운 생활의 필요에 적응할 수 없어서, 부득이 한어를 빌려쓰게 된다. 다만, 만주인들은 첨단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입성을 발음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만주귀족이 말하는 북경관화는 만주화된 한어였다. 이것은 놀려서 "오음부전(五音不全)"의 한어라고 불렀다.

 

1728년, 옹정제가 북경관화를 관방언어로 확정하자, 그 지위는 급속히 상승한다. 청나라말기 민국초기에 북경과화의 영향력은 이미 남경관화를 넘어섰다. 그리하여 전국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언어가 된 것이다.

 

이뿐아니라, 절강사람 장태염은 호북말이 고하성(古夏聲)에 가깝다고 하면서 호북 황피어을 표준음으로 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번 논쟁은 학술의 범위를 넘어서게 된다. 동맹회 회원인 강소사람 오치휘(吳稚暉)는 민족주의 입장에 서서, '개소리(狗叫)"인 북경말에 강력하게 반발한다. 동시에 다른 방언을 표준음으로 하는 것도 반대한다. 그리고, "남강북조(南腔北調)의 다수인들이 쓰고 이해할 수 있는 음으로 하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주장한다. 일시에 표준음이 논쟁이 이어지고, 각자 자기의 주장을 펼치니, 서로 의견이 달랐다.

 

민간의 논쟁이 불붙자, 청나라정부도 언어통일의 정치적의미를 이해한 듯하다. 1903년, 청나라정부는 <<학당장정>>에서 "각국의 언어는 전국이 모두 일치한다...중국민간에 각각 지방사투리를 쓰는데, 한 성의 안에서도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아, 일처리가 어렵다. 관음(즉, 북경관화)으로 전국의 언어를 통일하여, 사범학교 및 고등소학당에서 모두 국문 과목을 두고 관화 과목을 넣어야 한다." 1911년, 청나라왕조의 최고교육기구인 학부에서 중앙교육회의를 소집한다. 거기서 "통일국어방법안"을 통과시키고, "국어조사총회"를 설립하여, 북경의 발음을 위주로 하여 표준음을 심의한다.

 

이에 이르러, 북경관화는 정치적으로 한어표준음의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다만, 청왕조의 멸망은 북경관화의 표준음 지위에 대하여 의문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한어의 표준독음을 하루빨리 확정하기 위하여, 민국정부는 독음통일회를 개최한다.

 

1913년 2월 15일, 교육부는 북경에서 독음통일회를 개최한다. 회의에서는 오치휘를 의장으로 선임하고, 왕조가 부의장, 회원이 80명이었다. 실제로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모두 44명이었다. 각성에서 파견한 대표들 이외에 절대다수는 절음자운동에서 탁월한 성적을 보인 걸출한 어문학자들이었다. 절음자운동의 발기인인 노당장은 복건대표로 이번 회의에 참가한다.

 

회의에서, 남북의 다툼이 치열했다. 의견을 통일하기가 어려웠다. 강소절강의 대표가 비교적 많은 자리를 차지하였으므로, 왕조는 남방세력이 주도할 것을 우려했다. 그리하여, 그는 각성대표는 인원수가 몇 명이 되든지 1표로 하자고 주장한다. 의장인 오치휘도 1성 1표에 찬성한다. 다만, 회의 전에 제출한 "축자심정(逐字審定, 글자 하나하나를 심의하여 발음을 정한다)"는 원칙때문에, 더 이상 어느 방언 혹은 관화를 표준음으로 할 것인지는 다투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남북간의 다툼이 더 이상 격화되는 것을 막았다.

 

1개월여의 토론을 거쳐, 회의는 청나라 이광지의 <<음운천미>>에 나오는 상용자에 따라 6500여자의 표준독음을 확정한다. 이것이 통상 말하는 "노국음(老國音)"이다.

 

"노국음"이 탄생할 때, 원세개는 마침 송교인암살사건으로 정신이 없었다. 그리하여 국어를 보급하는데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얼마후, 2차혁명이 발발하고, 조금 더 있다가 원세개가 복벽하여 황제를 칭한다. 그러다보니 아무도 국음의 보급에 신경쓰지 않게 된다. 1918년이 되어서야, 교육부가 정식으로 '국음' 자모를 발표한다. 1919년에는 오치휘가 편찬한 <<국어자전>>을 출판한다. 1920년에는 국음자모 발성 레코드를 만드는데 성공한다. 이에 이르러, "노국음"은 전국에 정식으로 보급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국어보급후 2년도 되지 않아 "경국지쟁(京國之爭, 북경음이냐 국음이냐)"이 벌어진다. 문제의 원인은 바로 국어표준음에 있었다.

 

"노국음"은 하나의 '남북을 절충하고, 고금을 얽은' 표준음이었다. 비록 최대한 각지의 방언을 고려해주었지만, 이로 인하여 일종의 '인조언어'가 되어 버렸다. 현실생활에서 이런 '국음'을 모어로 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아무도 실제로 이런 '국음'을 가지고 의사소통을 하지 않았다.

 

국어를 보급하는 과정에서 자주 경음교원과 국음교원이 서로 다투는 일이 벌어진다. 그들의 국어는 듣기에도 서로 많이 달랐다. 많은 글자의 독음은 통일되지 않았고, 가르치는 사람들도 가르치기 어려웠고, 배우는 사람도 배우기 어려웠다. 국어레코드를 만든 언어학자 조원임 마저도 이렇게 탄식했다: "13년의 시간동안 4억,5억 혹은 6억의 사람들에게 만들어준 국어를 겨우 나 혼자만 말하다니..."

 

"노국음"은 기본적으로 북경말을 표준음으로 하였기 때문에, 언어학자들은 북경음으로 '노국음'을 대체하자는 주장을 벌이게 된다. 1920년 남경고등사범의 장사일 교수는 <<국어통일문제>>를 발표하여, "주음자모는 국음과 연대하여 근본적으로 모두 개조하자", "먼저 교육부가 학리에 맞는 표준어정의를 공포하여, 최소한 중등교육을 받은 북경현지인의 말을 국어의 표준으로 하자"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는다. 그러나, 오치휘, 유맹진등 학자는 "노국음"은 첨단음, 음양상거입(陰陽上去入)의 오음이 모두 갖추어져 있고, 한어의 풍부성을 가장 대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920년 11월, 여금희는 오치휘, 육의언, 범상선, 장사일, 고실, 주명삼, 육전양등과 함께 남경에서 회의를 개최하여 국음문제를 논의한다. 경음파가 근본적으로 바꾸자고 주장하는 바람에 서로 낯을 붉히고 헤어진다.

 

"노국음"의 보급은 마침 일어난 5.4운동의 영향을 받는다. 이때 전국의 여론은 전면적인 서구화였다. 구미에 유학한 청년학생들도 한어개혁의 토론에 끼어들었다.

 

문학혁명이 발발하면서, 유학생중에는 "한자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1918년 전현동은 <<중국금후의 문자문제>>에서 "공학(孔學)을 폐지하려면 한문을 폐지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국어로마자로 한자를 대체하자고 주장한다. 그후, 신문화운동의 진독수, 호적등도 전현동을 지지한다. 곧이어, 서양에 유학한 바 있는 지식인들 채원배, 여금희, 조원임, 임어당, 주판명, 허석오등은 속속 한자라틴화의 글을 발표한다. 로마자병음의 방안을 내놓아, "국어로마자운동"의 붐이 일어난다.

 

소위 국어로마자라 함은, 26개의 라틴어 알파벳으로 한어의 성,운,조를 표시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노국음"의 비교적 복잡한 어음성분이 최대의 장애로 된다. 그리하여, 국어로마자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간화어음(簡化語音)을 주장한다. 비교적 간단한 북경음을 표준으로 하여 국음을 고치고, '노국음'의 첨음과 입성등 어음성분을 제거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국어로마자운동에 힘입어 '경국지쟁'은 일변도의 추세를 보인다. 1924년 국어통일주비회는 <<국음자전>>의 증가수정문제를 토론하면서, 오치휘가 '노국음'을 유지하자는 주장을 포기한다. 국어통일주비회를 대표하여, '아름다운 북경어음을 표준음으로 하고' '무릇 글자와 발음은 모두 북경의 보통의 독법을 표준으로 한다'고 결정한다. 1932년 교육부는 <<국음상용자회>>를 공포하여 정식으로 "신국음"을 표준독음으로 정한다.

 

"신국음"이 확립된 후, 남경국민당정부는 학교교육, 영화, 라디오등의 수단을 동원하여, 대거 국어통일운동을 전개한다. 그리하여 아주 현저한 성과를 거둔다. 그러나, 1937년, 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점령지의 국어통일운동은 정체상태에 빠진다. 항전이 끝난 후, 다시 3년의 내전이 온다. 그리하여 국민당이 대만으로 패퇴할 때까지, 정부는 전국국어통일의 목표를 실현하지 못하게 된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한어의 통일은 다시 한번 중앙정부의 의사일정에 오른다. 6년의 연구와 토론을 거쳐, 1956년 2월 6일, 국무원이 <<보통화를 보급하는데 관한 지시>>를 반포한다. 이로서 보통화는 "북경어음을 표준음으로 하고, 북경말을 기초방언으로 하여, 모범적인 현대백화문저작을 어법규범으로 한다"고 확정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