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중국 고대의 4대문벌(門閥)

중은우시 2010. 4. 21. 11:59

글: 노위병(路衛兵)

 

문벌은 중국의 특수한 역사시기의 특수한 역사현상이고, 영향이 아주 컸다. 문벌은 위진남북조시기에 가장 성행했고,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역할을 했다. 일정한 정도에서, 문벌은 당시의 역사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문벌은 '문제벌열(門第閥閱)'의 약칭이다. '문제'는 가족의 배경, 지위의 귀천을 의미한다. '벌열'은 조정에 공훈이 있는 세가(世家)를 의미한다. 이들 세가는 공훈과 영예를 앞세워서 대문의 양측에 두 개의 기둥을 세워 그들의 공로를 기렸는데, 왼쪽에 세우는 것을 '벌(閥)'이라고 하고, 오른 쪽에 세우는 것을 '열(閱)'이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문벌이 가리키는 것은 대대로 관료를 지내며, 지위가 혁혁한 명문망족(名門望族)이다.

 

문벌이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동한(東漢)때이다. 나중에 조위(曹魏)에서 구품중정제를 실시하면서, "존세주, 비한사(尊世胄, 卑寒士, 명문집안의 사람들이 존중받고, 한미한 선비는 홀대받는다)"의 현상이 나타나고, 이는 문벌의 흥성에 큰 작용을 하게 된다. 하품은 고관에 오를 수 없고, 상품은 비천한 직을 맡지 않는다는 등급관념은 당시 사회의 주류 이데올로기였다. "무릇 삼대에 걸쳐 삼공(三公)에 오르면 고량(膏梁)이며, 영(令), 복(僕)이 있으면 화유(華腴)이며, 상서(尙書), 영(領), 호(護)이상인 경우에는 갑성(甲姓), 구경(九卿)으로 방백(方伯)인 자는 을성(乙姓), 산기상시, 태중대부인 자는 병성(丙姓), 이부정원랑은 정성(丁姓)이다" 고량, 화유, 및 4성은 모두 당시에 등기등록된 사람이으로, 귀족이 아니면 망족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보통의 백성이나 혹은 서족(庶族)과 같은 류는 아예 호적책에 오를 자격이 없다. "유사선거, 필해보적(有司選擧, 必稽譜籍, 자리가 있어 사람을 뽑을 때는 반드시 족보와 호적을 조사한다)"(신당서). 관직에 나서려면 모두 이렇게 해야 한다. 이로 인하여 강자는 더욱 강해지고, 약자는 더욱 약해지게 된다. 그리하여 정치무대에서 활동하는 사람은 모조리 명문망족이 되어버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자들이 문벌이 된다.

 

문벌은 아주 대단한 특권을 지니고 있다. 자제가 관직을 맡고 싶으면, 직접 맡을 수도 있다. 청탁같은 것은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관료사회를 조종할 뿐아니라, 경제에서도 자원을 장악하여 나라에 버금갈 정도로 부유했고, 세력이 컸다. 이들 문벌은 문화도 독점했다. 제자를 거두는 방식으로 제자가 천하에 널린다. 이렇게 하여 대단한 사회세력이 되는 것이다. 더더구나 일부 큰 문벌은 대대로 조정의 관직에 있을 뿐아니라, 황족과 결혼을 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 조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된다. 비록 정치사회가 가장 혼란했던 동진십육국시기라 하더라도, 일부 대문벌의 작용은 무시할 수 없다. 특히 그들은 국가의 병권을 장악한 후에, 더욱 중요하게 된다. 필자가 보기에, 이 시기의 역사에 영향을 준 것은, 주로 4대가족이다. 그들은 각각 홍농양씨, 낭야왕씨, 진류사씨, 초군환씨이다.

 

홍농양씨(弘農楊氏)

 

홍농양씨는 홍농(지금의 하남성 영보시 동북쪽)에 거주했기 때문에 얻은 명칭이다. 이들은 중국역사상 가장 혁혁한 가족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통지.씨족략>>의 기록에 따르면, 홍농양씨는 춘추시기 양설씨(羊舌氏)의 후예이고, 대대로 주나라왕실에서 관리를 지냈다. 서한때에는 홍농양씨가 조야를 좌지우지했다. 주륜(朱輪, 고대의 왕후나 귀족이 타던 가마는 붉은 칠을 한 바퀴를 썼다)을 타는 자가 10명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서한십륜(西漢十輪)"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그후에는 더더욱 인재가 많아져서, 한때는 양견이 남진을 멸망시키고 북제를 평정한 후 수나라제국을 건설하는데까지 이른다. 홍농 양씨의 위세는 이때 전성기를 이룬다. 수나라이후에도, 홍농양씨는 대단한 가문이었다. 당나라의 양씨는 "11명의 재상"을 배출한 명문집안이다. 무측천의 모친도 양씨이고, 양귀비도 있는데, 모두 홍농양씨출신이다. 송나라의 양가장도 홍농양씨의 일족이다. 홍농양씨에는 적지 않은 재자를 배출했는데, 양수(楊修), 양형(楊炯), 양만리(楊萬里)등이 있다.

 

홍농양씨는 서진때도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 진무제 사마염의 황후 양염(楊艶)은 "그녀의 선조가 한나라를 섬기고, 4대에 걸쳐 삼공을 지냈다"(진서). 즉, 홍농양씨의 후예이다. 양씨는 사마염이 진나라를 건립하는데 큰 공헌을 하여, 조정내에서 지위가 아주 높았다. 양염의 숙부인 대장군 양준, 그리고 양준의 두 동생인 양요, 양제는 당시에 권력이 하늘을 찔렀다. 세상사람들이 "삼양(三楊)"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사마씨를 도와서 조정의 내외를 장악했다. 양염은 당시 양씨가족의 핵심인물이다. 서진왕조에 끼친 영향도 적지가 않다. 첫째, 양염은 자신의 백치아들 사마충을 밀어서, 결국 황위를 계승하게 한다. 둘째는 자신의 백치아들에게 음탕한 흑선풍 즉 가남풍을 골라서 마누라로 삼게 한다. 이 두 사람은 하나는 낫놓고 기역자도 모를 백치이고, 하나는 흉악하고 악독한 음부이다. 이들은 조정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렇게 하여 16년에 걸친 팔왕의 난이 일어나고, 간접적으로 오호의 중원침입을 초래한다. 양염은 직접 가남풍을 고르는데, 가남풍은 나중에 양씨일족을 주살한다. 그렇게 하여 양씨일족은 잠시 역사무대에서 물러난다. 이것도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것이다.

 

낭야왕씨(琅琊王氏)

 

낭야왕씨는 왕씨성중에서 가장 명망있는 일족이다. 시조는 주환왕의 아들인 왕자성부(王子成父)이다. 원래는 희(姬)성이었다. 나중에 적적(赤狄)을 물리치는데 공로를 세워 왕(王) 성을 하사받는다. 왕씨성은 전국시대에 유명한 장군을 배출한다. 즉 백기(白起)의 뒤를 잇는 진나라의 명장 왕전(王翦)이다. 진시황이 중원을 통합하는데, 왕전의 조손삼대는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나중에 왕전의 증손자인 왕원(王元)의 일족이 산동 낭야(지금의 산동성 교남시 낭야대 서북쪽)로 옮긴다. 서한때, 낭야왕씨중에 아주 유명한 인물이 나타나는데, 이름이 왕길(王吉)이다. 그는 관직이 박사간대부에까지 올랐고, 후손들이 대대로 관직에 있어, "누세지미(累世之美)"가 있었다. 그는 낭야왕씨의 번영에 초석을 놓는다. 낭야왕씨의 후손들은 "한나라 간의대부 길의 후손"이라는 것을 영예로 생각했다.

 

그러나, 낭야왕씨의 전성기를 말하자면, "왕여마, 공천하(王與馬,共天천下, 왕씨와 사마씨가 천하를 같이 다스렸다"고 칭해지는 동진시대이다. '마'는 동진의 개국황제 진원제 사마예를 가리키고, '왕'은 낭야왕씨 일족중 가장 두드러진 인물 왕도(王導)를 가리킨다. 사마예는 처음에 낭야왕에 책봉되었는데, 왕씨일족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는다. 진나라말기의 난세에, 왕도의 기획하에, 사마예는 동진정권을 개창한다. 사마예의 성공은 낭야왕씨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사마예는 등극전례때, 왕도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용상에 앉도록 하였다. "왕여마, 공천하"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후세에 전해진다. 왕도의 관직은 재보(宰輔)에 이르러, 원제, 명제, 성제의 세 임금을 모셨다. 그는 동진 초기, 왕조의 실질적인 창조자이고 조종자였다. 왕씨자손과 가족들은 조정의 요직에 많이 진출했다.

 

동진때 왕씨가족은 모두 8명의 황후를 배출한다. 황실공주와 결혼한 사람이 20여명이다. 군사적으로 병권을 장악한 경우도 많아서, 정치적인 지위가 흔들리지 않았다. 전체 동진왕조에 큰 영향을 미친 집안이다. 당형인 왕돈은 도독강양육주군사의 자리에서 병력을 거느리고 주요도시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반란을 일으켜 진나라왕실을 위협한다. 이것도 왕씨일가의 세력이 얼마나 강대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문화계에도 왕씨일족은 명성을 날린다. 저명한 서법의 대가 왕희지와 왕헌지가 있다. 유우석의 인구에 회자되는 싯구가 있는데, "구시왕사당전연, 비입심상백성가(舊時王謝堂前燕, 飛入尋常百姓家, 옛날에 왕씨 사씨의 귀족집안의 집에 둥지를 틀고살던 제비가, 지금은 보통 백성의 집안으로 날아든다)" 여기의 '왕사'는 바로 낭야왕씨와 진류사씨이다.

 

진류사씨(陳留謝氏)

 

진군사씨(陳郡謝氏)라고도 한다. 진군 양하출신이다(지금의 하남성 태강현). 위진남북조시기에 낭야왕씨와 비견할 만한 집안은 진류사씨밖에 없었다. "산음도상계화초, 왕사풍류만진서(山陰道上桂花初, 王謝風流滿晋書)"라는 두 구절은 천고에 전해지는 싯구로, 왕씨, 사씨 두 집안의 풍류를 잘 드러내준다. 사씨의 시작은 조금 늦었다. 그렇지만 발전은 아주 빨랐다. 사씨일족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비수지전때 전진을 대파한 사안(謝安)이다. 사씨의 성공은 바로 사안의 대로부터 시작한다. 사안의 당형인 사상(謝尙), 동생인 사만(謝萬)이 관직에 나간 후, 가족들이 흥성한다. 사안이 재상을 지낼 때가 전성기였다. 사안은 조카인 사현(謝玄)으로 하여금 북부병(北府兵)을 조직하게 한다. 이것도 동진에 큰 영향을 미친다. 비수지전에서 전진을 대파하는데, 북부병의 공로가 현저했다. 나중에 북부병의 우두머리인 유유(劉裕)는 결국 동진을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건립한다.

 

비수지전은 북방의 동진에 대한 최대의 위협이었다. 전진이 나타나기 전에 북방은 계속 난세였다. 남방의 동진을 거들떠볼 여유가 없었다. 이와 반대로, 동진은 여러번 대규모의 북벌을 조직하였다.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당시의 남북쌍방은 세력이 비슷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남방이 약간 강하고, 북방이 약간 약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진이 북방을 통일하자, 형세는 뒤바뀐다. 전진은 오호시기 북방을 통일한 유일한 왕조이다. 그들은 북방의 각종세력을 결집하여, 사상유례없는 전성기를 누린다. 그리고 남북간의 균형이 무너진다. 이렇게 하여 북방이 약간 강하고, 남방이 약간 약한 국면이 조성된다. 사안은 약한 나라를 이끌고 강한 나라에 이겼다. 8만의 병사로 80만의 전진대군을 물리쳤다. 이는 전쟁역사상의 신화일 뿐아니라, 당시 정치국면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는 사건이기도 했다.

 

비수지전이후, 북방은 다시 분열에 빠진다. 동진은 망국의 위기를 다시 한번 넘긴 것이다. 이후 반세기동안 안정을 누린다. 사안의 풍도는 세상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 "관중양상유왕맹, 천하창생망사안(關中良相惟王猛,天下蒼生望謝安)". 이것은 사씨집안의 명망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방증이다. 사씨일족의 정치지위도 이와 더불어 전성기를 이룬다. 사안은 태보, 도독십오주제군사에 봉해진다. 사현도 형강양주자사에 임명되어 동진의 군정대권을 장악한다. 사안이 죽은 후, 사씨의 자제들은 많은 사람들이 은퇴하고 실제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래도 가족들의 지위는 여전해서, 그들의 영향은 송,제,양,진의 전체 남조에 미치고, 수당시대가 되어서야 역사무대에서 사라지낟.

 

초군환씨(譙郡桓氏)

 

초군일대는 지금의 안휘,하남의 두 성이 만나는 곳이다. 치소는 초현으로, 지금의 안휘성 박주(亳州)이다. 환씨의 역사상 유명인물은 춘추시대 송나라의 사마(司馬)인 환귀(桓鬼)가 있고, 전국시대 진나라의 장군 환치(桓齒)가 있으며, 서한시대에 여남의 명사 환관(桓寬)이 있다. 당연히 이것은 일부 예에 불과하다. 환씨가족의 흥성은 동진시기이다. 이때 모두 11명의 장군을 배출하여 한동안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환씨일족의 성공은 환온(桓溫)의 부친인 환이(桓彛)부터이다. 환이는 초군 항우(지금의 안휘성 회원현 서용항진 북쪽) 사람이다. 처음에는 제왕 사마경(司馬冏)의 휘하에서 기도위를 맡았고, 진원제때 안동장군이 된다. 나중에 중서랑, 상서이부랑이 되어 조정에서 이름을 떨친다. 환온은 환이의 아들이며, 진명제의 사위이다. 중서감 하충의 인정을 받아, 형주자사, 안서장군에 임명된다. 비록 황실인척이라는 도움을 받았지만, 나중에 환온이 얻은 것들은 객관적으로 말해서 그 자신이 얻어낸 것들이다. 그때 북방의 후조는 서남의 성한과 결맹을 맺어, 동진을 거의 포위하는 국면이었다. 두 나라를 비교한 후 성한을 무너뜨리는 것을 동진의 첫째 목표로 삼는다. 이 임무를 완성한 것은 바로 환온이다. 환온은 이로 인하여 조정에 명성을 크게 떨치고, 나중에 대사마에 올라 오랫동안 조정대권을 장악한다.

 

환온의 삼차북벌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객관적으로 말해서 동진의 위세를 보인 것이다. 제1차의 주요적수는 저(氐)족의 전진정권이었다. 패상(장안 동쪽)까지 치고 올라갔는데, 북벌군은 아주 환영을 받는다. 소를 잡고 술을 가지고 환온을 길가에서 맞이하는 자가 십중팔구였다. 그러나, 양초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퇴각하게 된다. 제2차에는 요씨의 강(羌)족 군대를 격파하고 낙양을 수복한다. 그러나 그후 다시 일어난 전연의 모용씨에게 패배하여 퇴각한다. 제3차는 전연의 모용씨와 대치한 것이다. 처음에는 형세가 좋아서 선기를 점했는데, 결국 방두(현재의 하남 급현 동북)에서 전연의 대장군 모용수의 기병의 기습을 받아 패배하고 퇴각한다.

 

환온은 진나라황실을 무너뜨리고 황제위에 오르고자 했다. 성한을 멸망시키고, 3차에 걸친 북벌을 진행한 것은 모두 스스로의 위신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통하여 정치적인 자본을 축적하고, 황위를 찬탈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이름을 후세에 남기지 못할 바에는 악명이라도 만년에 떨쳐야 한다"는 유명한 말도 그가 남겼다. 환온은 살아있을 때 찬탈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가족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지위는 마련해준다. 그의 아들 환현의 대에 이르러, 결국 반란을 일으켜 진안제로 하여금 양위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404년에 환초정권이 건립된다. 환초정권은 유유의 북부군에게 패배한다. 환씨가족의 나머지 사람들은 여전히 진나라황실과 여러해동안 대항한다. 환씨일족의 반란으로, 원래 몰락의 길을 걷고 있던 동진은 더욱 위태로와지고, 결국 유송(劉宋)의하여 대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