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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적벽지전(赤壁之戰)의 경과

by 중은우시 2008. 7. 15.

 

건안12년(208년) 7월, 조조는 오환(烏桓)을 평정하고, 북방을 통일한 후, 군대를 몰아서 남하했고, 형주(荊州)를 빼앗았다. 당시는 마침 유표(劉表)가 막 사망하여, 형주에 주인이 없었다. 그는 유표의 둘째아들 유종(劉琮)을 압박하여 투항하도록 한다. 그리고, 유비를 당양 장판파까지 추격하여, 그로 하여금 한수(漢水)를 따라 하구(夏口) 방향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도록 한다. 조조는 승리한 기세를 몰아 강릉(江陵)까지 점령하여 기본적으로 형주의 북부를 모두 장악한다.

 

 

 

조조는 손쉽게 형주를 장악한 후, 한수와 장강을 따라서 동으로 내려가 손권을 무너뜨리고 강동을 차지하여 전국을 통일하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전략적인 조치를 취한다.

 

1. 조조는 친히 형주의 수군, 육군의 주력을 이끌고 강릉에서 출발하여 장강을 따라 하구로 진격한다;

2. 또 다른 일부 수군, 육군으로 하여금 양양(襄陽)을 출발하여, 한수를 따라 하구로 전진하게 한다.

3. 후군도독, 정남장군 조인(曹仁)과 군량독운사(軍糧督運使) 하후연(夏侯淵)에게 명하여, 강릉에 주둔하도록 한다.

4. 역봉장군 조홍(曹洪)에게 명하여, 양양에 주둔하도록 한다.

5. 시중, 상서령 순욱(荀彧), 전장군 하후돈(夏侯惇)에게 명하여, 허창(許昌)을 지키도록 한다.

 

조조군이 밀려오자, 노숙과 제갈량의 설득하에, 손권과 유비는 연맹을 맺어 함께 조조에 항거한다. 손권은 주유(周瑜), 정보(程普)를 좌우군도독으로 임명하여 군대를 이끌고 유비의 군과 회합하도록 하며, 노숙(魯肅)을 찬군교위에 임명하여, 작전계획을 짜는데 협력하도록 한다. 주유는 정예병 3만을 이끌고 장강을 따라 서쪽으로 거슬러 올라가거, 조조의 군대를 맞이한다. 손권은 친히 후방이 군대를 지휘하여 이에 호응하기로 한다.

 

 

 

손권군대의 구성과 전투배치는 다음과 같다:

 

1. 선봉: 단양도위 황개(黃蓋)

2. 본대: 당구령 감녕(甘寧), 황야중랑 여몽(呂蒙), 중랑장 한당(韓當), 의춘장 주태(周泰), 정로장군 손분(孫), 경위교위 육손(陸遜), 무맹교위 반장(潘璋)등;

3. 수륙군 좌도독 주유, 우도독 정보, 찬군교위 노숙;

4. 후방수비군: 금사 주환(朱桓)이 시상(柴桑)을 지키면서 후방에서 지원.

 

유비군대는 번구(樊口)에서의 병력배치가 다음과 같았다:

 

1. 관우는 수군 약 만명을 이끌고 하구에 주둔한다;

2. 장비, 조운은 각각 육군 4천을 이끌고 노산(魯山)에 주둔한다;

3. 유기(劉琦)는 군대 만여명을 이끌고 번구에 주둔한다.

4. 유비 본인은 번구에 남는다.

 

주유는 군대를 이끌고 번구에서 유비와 회합한 후, 계속 장강을 따라 서쪽으로 올라간다. 장강을 따라 내려오던 조조의 군대와 적벽에서 만나 교전을 펼친다. 조조군대는 초기에 패배하여 오림(烏林)으로 물러가서, 손유연합군과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다. 조조의 군대는 대부분 북방사람이어서, 강물위에서 풍랑에 흔들리는데 익숙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철환으로 전선의 앞머리와 뒷꼬리를 연결시켰다. 주유는 황개가 건의한 화공을 받아들여, 황개로 하여금 허위로 투항하게 시킨다. 그리고 몽충(蒙衝, 쾌속선), 투함(鬪艦) 십척에 몰래 연소할 수 있는 것을 실어 북군의 수채로 보내어 불을 지른다. 조조의 군영은 크게 혼란에 빠지고, 인마가 불에 타죽거나 물에 빠져죽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조조의 군은 수군, 육군으로 둘로 나누어 강릉으로 철수한다. 유비, 주유는 군대를 이끌고 수륙양로로 전진하여, 남군까지 추격한다. 조조는 조인, 서황(徐晃)에게 강릉을 지키도록 명하고, 낙진(樂進)에게는 양양을 지키라고 명하고, 자신은 잔여부대를 이끌고 북방으로 퇴각한다.

 

 

 

건안13년(208년) 12월, 손유연합군이 강릉을 공격하여 점령한다. 이때의 전략배치는 다음과 같다:

 

1. 주유, 정보는 오나라군대 주력병사를 이끌고 장강남안에 주둔하고, 북안의 강릉성내의 조조군과 대치한다.

2. 감녕은 병사를 이끌고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서, 이릉(夷陵)을 먼저 취하여, 강을 확보한다.

 

유비는 적벽대전후 승리를 틈타 형주의 강남에 있는 장사, 영릉, 무릉, 계양의 4개군을 차지하고, 제갈량을 군사중랑장 및 도독영릉무릉장사삼군으로 하여 그 곳의 세금을 거두게 한다. 이를 가지고 군수물자를 조달한다. 그리고 편장군 조운을 계양태수로 임명하여, 주유를 도와 강릉성을 빼앗는데 도와주게 한다. 그리하여 공동으로 강릉의 측면과 후방을 공격한다. 유비는 장비에게 1천기병을 이끌고 주유의 지휘를 받도록 명한다. 주유는 2천을 내서 수비군을 강화한다. 그리고 하수를 따라 강릉으로 측후방으로 우회한다. 유비는 양양과 강릉의 사이에 있고 한수의 서쪽에 있는 임저, 정양의 여러개 현을 장악한다. 동시에 관우에게 개수를 따라 북상하도록 명한다. 한수의 동쪽에 있는 여러개의 현을 장악하여, 양양의 조조군대가 강릉으로 원군을 보내지 못하도록 막으려 한다. 조조군대는 즉시 관우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다. 낙진이 양양에서 남하하고, 문빙(文聘)이 강하에서 북상한다. 쌍방은 심구협에서 관우를 협공하여 승리를 거둔다. 강릉의 수비장수 조인은 싸움에서 불리한 위치에 처하여, 사상자가 많았다. 건안14년(209년) 12월, 조조는 강릉을 포기하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낙진등에게 남하하여 조인을 퇴각하는데 돕도록 명령한다. 주유는 남군의 치소(治所)인 강릉을 점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