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적벽대전의 네가지 수수께끼

중은우시 2008. 7. 21. 21:10

 

첫째, 적벽(赤壁)은 산(山)의 명칭인가? 어느 구간의 명칭인가?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적벽 유적지는 모두 다섯 곳이나 된다. 어느 곳이 진정으로 적벽대전이 발생했던 곳에 더욱 가까울까? 역사연구자들과 관광개발사업자들이 함께 중구난방으로 얘기하는 요즘 이 이슈는 사람의 관심을 끄는 것이 당연하다. 사실, 적벽유직지에 대하여는 송(宋) 나라때도 이미 5 곳이나 얘기되었다.

 

- 남조 송성홍의 <<형주기>>에서 언급한 소위 "박기(薄圻)" (나중에 포기-蒲圻-라고도 쓰는데, 현재 호북성 적벽시)

- 북위 여도원의 <<수경주>>에서 말하는 소위 "가어(嘉魚)"

- 당나라 <<한양도경>>에서 말하는 소위 "한천(漢川)"

- 송나라 소동파가 여행한 "황주(黃州)"

- 그리고 전설상의 "강하(江夏)"

 

지금 보자면, 가장 삼국시대에 근접한 <<형주기>>와 <<수경주>>의 신뢰성이 비교적 높다고 본다. 당나라 <<한양도경>>이하의 세 곳의 전설은 모두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 점에 관하여 노필은 <<삼국지집해>>에서 각각의 주장에 대하여 잘 분석하여 결론을 내렸다. 가장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연구는 최근들어 출판된 <<적벽지전연구>>에서 <<형주기>>의 "포기"설의 신뢰도를 연구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적벽"은 산이름이 아니라, 그가 가르키는 곳은 강연안의 100리의 남쪽 해안구간이라는 것이다.

 

둘째, 화소적벽(火燒赤壁)의 구체적인 시간은?

 

적벽대전의 구체적인 시간이 10월인가? 아니면 12월인가? 과거에도 서로 다른 견해가 존재했다. 중화서국 1962년 출판의 <<중외역사연표>>(전백찬 주편)에는: "10월, 조조는 수군으로 손권을 공격하고, 손권의 장수 주유가 이를 오림, 적벽에서 대파했다. 조조는 패배하여 남군으로 물러났고, 병사를 남겨 강릉을 지키게 하고 돌아갔다. 12월, 유비가 무릉, 장사, 계양, 영릉의 여러 군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이것은 아마도 남조 송의 범엽이 편찬한 <<후한서>>를 잘못 해석한 결과로 보인다. <<후한서. 효헌제기>>에서는 건안13년의 말미에 두 가지 큰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는 "동10월 계미삭, 일식이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조가 수군을 이끌고 조조를 벌하였고, 손권의 장수 주유는 오림, 적벽에서 대파했다"는 것이다. 만일 <<후한서>>보다 먼저 편찬된 <<삼국지>>, <<후한기>>등의 책을 참고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단정할 수 있다. <<후한서>>는 옛 사서의 기록에서 두번째 사건을 언급하면서 12월을 빠트린 것이라고. 이 측면에서, <<후한기. 효헌황제기>>의 기록이 가장 상세하다, 이렇게 되어 있다: "9월, 유종이 조조에 항복하다...이때 손권의 군대가 시상에 있고, 유비는 제갈량을 보내어 손권을 설득한다. 손권은 크게 기뻐하고, 주유에게 수군3만을 붙여 보낸다....동10월 계미, 일식이 있었다. 12월 임오, 정전장군 마등을 위위로 삼는다. 그 달, 조조는 주유와 적벽에서 싸우는데, 조조가 대패한다." 이 기록을 보면, <<위지. 무제기>>와 일치한다. 이로써 볼 때, 손유연합군은 일찌기 9월에 전쟁준비를 했고, 적벽대전 및 조조군의 패배는 두 달여후인 12월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삼방이 적벽에 투입한 병력은?

 

특히 조조측의 인원수가 문제된다. <<삼국지>> 혹은 <<삼국연의>>의 독자라면 여러가지 추측을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삼국지연구>>는 <<적벽대전고변>>에서 비교적 사실적인 분석을 하였는데, 대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조가 '팔십만대군'이라고 한 것은 허장성세이다. 그가 남하할 때는 30만을 이끌고 왔다. 여기에 형주병 10만을 합치면 40만이 된다. 다만, 조조는 새로 얻은 형주를 방어해야 했으 므로, 병력을 분산시켰다. 적벽대전에 투입한 제1선 병력은 겨우 절반정도였다. 그리고, 병으로 피로하고 말을 듣지 않는 병사들이었다. 그리하여 주유는 "인원수는 많지만 겁낼 것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연합군측은 유비가 2만을 강하에 주둔시키고, 손권은 10만을 시상에 주둔시켰다. 연합군이 제1선에서 사용한 병력은 유비, 관우, 장비가 이끄는 2천명의 조력군을 포함해서 모두 3만2천명이었다. 손, 유쌍방은 모두 대군을 뒤에 남겨두었다. 결론적으로, 세측이 동원한 병력은 모두 50여만이 된다. 다만, 제1선 진지에는 연합군이 3만2천이 조조군 20여만과 맞부닥친 것이다.

 

넷째, 사서와 소설의 구분

 

소설의 허구적인 이야기를 역사적인 사실처럼 보고, 혹은 정사 <<삼국지>>를 가지고 소설 <<삼국연의>>를 교정하는 현상이 때때로 나타난다. 이것은 우리가 사서와 소설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서의 가치는 '사실'에 있고, 사가가 추구하는 것은 '사실기록'이다. 소설의 추구하는 것은 '허구'에 있고, 작가가 중점을 두는 것은 '허구'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삼국연의>>의 "초선차전(草船借箭)", "차동풍(借東風)"을 읽으면서 박수치는 것은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 아니라 소설가의 허구능력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중천이 말하는 것처럼 조조가 적벽에서 패배하여 도망칠 때, "마침 장료, 허저등이 도와주어 위험을 벗어났다"는 것등등은 역사문헌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코웃음을 칠 내용이다. 코웃음치는 이유는 바로 <<삼국연의>>의 허구를 사실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