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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기원223년: 공명향좌(孔明向左), 위연향우(魏延向右)

by 중은우시 2012. 7. 14.

글: 조염(趙炎)

 

제갈량과 위연이 불화했다는 증거는 주로 <삼국연의>의 '반골설(反骨說)'과 정사에 나오는 '자오곡기모(子午谷奇謀)'를 제갈량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역사인물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소설가의 말에 의존할 수는 없다. 유한한 사료도 제갈량이 도량좁은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는데 부족하다. 단순히 '자오곡기모'를 거부했다는 것만으로 두 사람이 서로 사이가 갈라졌다고 보는 것은 너무나 근거가 부족하다. 송나라때 진보의 말이 비교적 객관적이다. "관우부능당일면(關羽不能當一面), 위연하감비회음(魏延何敢比淮陰)"(여기서 회음은 회음후 한신을 가리킴). 그 의미는 제갈량의 조심성있는 조치는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위연이 항상 제갈량이 겁쟁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재능을 모두 발휘하도록 써주지 않았다고 한탄한 말로 볼 때, 그들간에 의견차이는 확실히 존재했다. 이런 의견차이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이것은 분석이 필요하다.

 

223년은 중요한 한 해이다. 만일 삼국역사가 220년부터 시작된다고 한다면, 223년은 진정한 의미에서 삼국이 정립한 해이다. 이 해에 무슨 일들이 일어났을까?

 

촉한(蜀漢)은 황제에 오른지 얼마되지 않은 유비가 인생의 종점을 찍는다. 유선이 즉위하고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고친다. 제갈량과 이엄은 집정을 시작하고, 오늘날의 무후사 안의 두 가가지 공사를 시작한다: 한혜릉(漢惠陵)과 소열묘(昭烈廟). 군주의 상을 당하니, 백성들의 인심이 안정되지 못하고 있었다. 옹개는 남방에서 난을 일으켰다.

 

조위(曹魏)도 장례로 바빴다. 대장 조인(曹仁)이 죽었고, 조비(曹丕)의 친동생인 조창(曹彰)도 죽었다. 엘리트 모사인 태위 가후(賈詡)도 죽었다. 온 나라가 장례로 바빠서 다른 것에 신경쓸 틈이 없었다.

 

동오(東吳)는 미인 소교가 죽어서, 손권이 무창에 황학루를 지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제갈량이 보내온 사신과 협상을 했고, 새로운 연맹조약을 체결한다.

 

이 해에 삼국의 권력자들은 자기 내부의 일로 바빴다. 이미 형태를 갖춘 삼국정립국면에 대하여는 어쩔 수 없다는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때 위연은 어디에 있었는가? 한중태수로 있었다. 땅은 위나라와 접경하고 있고, 많은 병력을 장악하고 있어, 아주 대단했다. 이 해의 위연은 촉,위 양국 내지 삼국역사에 있어서, 모두 경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위연이 지켜내면, 촉국은 평안하다. 다른 양국도 이 기회를 틈타서 휴양할 수 있다. 위연이 만일 위나라를 공격하면, 삼국의 균형은 무너진다. 그 결과도 예측이 어렵다. 만일 이때 위연이 반란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간단하다. 허약한 촉국은 즉시 붕괴할 것이고, 역사가 어디로 갈 것인지를 명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오나라와 위나라는 분명히 어부지리를 노리며 기뻐할 것이다.

 

삼국 60년을 얘기하자면, 제갈량이 역사의 전진방향을 대표하는 중요인물임에 틀림없다. 유비의 탁고를 받았던 말든, 나중의 칠종칠금, 육출기산이든 모두 목표는 촉한정권의 연속을 위한 것이다. 요즘 말로 하자면 '안정유지(維穩)"이다.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보면, "역사전진방향을 대표하는 사람"은 좌파이다. 즉, 제갈량은 좌로 향한 엘리트이다. 좌파인사들이 보기에, 공개적이든 잠재적이든 역사방향을 바꾸려고 기도할 수 있거나 기도할 능력을 갖춘 사람은 대체로 모두 우파이다.

 

불행한 것은 223년의 위연은 바로 이런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우파로 몰리지 않기가 어렵게 되었다. 두 가지 사례는 바로 제갈량이 223년에 이미 위연을 우파화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해에 옹개는 건녕(지금의 운남 곡정)에서 난을 일으키고, 태수 정앙(正昻)을 죽인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어 오나라와 연락하고, 건창태수의 직을 받는다. 이에 대하여, 제갈량은 즉시 출병하지 않고, 2년을 참는다. 그리고 손권과 적극적으로 우호관계를 맺는다. 225년이 되어서 비로소, "오월에 강을 건너 불모의 땅으로 깊이 들어가서" 옹개, 맹획을 평정한다. 이것은 무엇때문인가? 내정이 안정되지 못했기 때문인가?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국내에 반란이 발생하는 것보다 더 심한 '불안정'이 있을 수 있는가? 이것이 첫번째이다. 둘째는 대규모로 촉국 군정인사를 재배치한다. 젊은 청년장교들을 많이 기용한다. 예를 들어, 관흥(關興)은 약관의 나이로 막 시중, 중감군등 요직을 맡는다. 비위, 향총등은 모두 고속승진한다. 또 다른 탁고대신 이엄은 군사를 총괄하고 영안에 주둔한다. 이것은 모두 의미심장한 일들이다.

 

우리는 역사를 읽을 때, 한 가지 상식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사관서사(史官敍事)의 원칙인 "실록(實錄)"정신이다. "사랑하면 그의 추악함을 알고, 미워하면 그의 선량함을 안다", "악을 감추지 않고, 아름다움을 가식하지 않는다."(不掩惡, 不虛美). 이 원칙에 근거하여, 이 년간 제갈량의 일을 되돌아보면, 그다지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위연을 걱정하고 대비했던 것이다.

 

등지와 진운을 동오로 보내어 통일전선전술을 구사한 것은 표면적으로 옹개를 겨냥한 것으로 부저추신(釜底抽薪)이지만, 기실 위연을 향한 것이다. 숨어있는 뜻은 바로 나는 충분한 시간과 정력을 들여서 여하한 '북방으로부터 오는 늑대'를 막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촉오연맹은 위나라를 향한 것이 아니었는가? 당연히 그렇다. 그러나 223년에는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위연이 한중에서 위나라를 막고, 위나라를 방비하고 있었다. 차라리 위연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위연의 유비에 대한 승락을 기억하는가? "만일 조조가 천하의 병력을 이끌고 온다면 대왕께서 막아주십시오. 편장이10만의 무리를 이끌고 오면 대왕께서 집어삼키소서." 이엄은 영안에 주둔하면서 마찬가지로 위연을 방비했다. 이 모든 안배를 마치고 나서야 제갈량은 안심하고 남쪽을 정벌하러 떠난다. 그의 이런 조치는 위연에게 현실에 대한 인식을 나와 일치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것이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점은 제갈량의 현실상황에 대한 인식은 시대를 앞서갔다는 점이다. 그는 좌파의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위연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인식이 실제상황보다 낙후되어 있었다. (이처럼 좋은 시기에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한중을 보유하는 것에 만족했다). 이런 수재같이 뒤늦은 반응은 우파의 특징이다. 즉, 223년, 사상적으로 공명은 위연과 이미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것은 입장차이로 나타나고 좌우분화가 분명해졌다.

 

촉나라에 대하여 이것은 위험신호이다. 혹은 미래 운명에 대한 예견적 복선이다. 상식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좌우투쟁은 폐해가 이익보다 크다. 사업에 거대한 상해를 가져온다. 제갈량의 정확한 방식은 사상적으로 위연에게 도움을 주고, 변화를 꾀하게 하여야 하지, 걱정하고 대비하여서는 안된다. 그러나 역사의 한계성으로  제갈량 자신은 이런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하여 위연은 성격상 자부심이 강하여, 모두가 그를 피하는 지경에 이른다. 진수가 한 말이 아주 적절하다. "위연의 조치들을 살펴보고,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화를 부른 것은 바로 그 자신이다." 

 

오늘날 보자면 우파에는 엘리트가 많고 개천의 용은 적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들의 성격상 자부심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좌파는 반대이다. 엘리트가 아주 적고, 개천의 용이 많다. 아마도 그들이 가진 자원이나 도량이 부족한 것과 관계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전에 촉한용관구락부가 제갈량이 혼자서 만들어낸 걸작이라고 한 바 있다. 이것은 좌파이 한계이다. 좌우투쟁은 직접적으로 '촉중무대장, 요화작선봉'의 난감한 국면을 몰고왔다.

 

칠종칠금은 제갈량의 일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다. 입장이 달라서, 그는 위연이 내놓은 '자오곡기모'를 거절하여 다시 한번 휘황을 만들 기회를 놓쳤다. 같은 해, 저명한 서예가이자 위나라의 태부인 종요는 아들을 하나 낳는다. 그리고 이름을 종회(鍾會)라고 짓는다. 그는 제갈량의 일생사업의 훼멸을 목격한다. 촉한이 최종적으로 멸망하는 것은 바로 좌우분열과 다툼때문이다.

 

배송지의 <삼국지주>에서 인용한 어환이 쓴<위략>에서 우리는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제갈량이 병이 들어 위연등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은 후, 착실하게 지키고 다시 공격하려고 하려는데는 신중하라. 그리고 위연에게 군사를 통할하도록 하며, 비밀리에 장례식을 준비하라고 한다. 위연은 그리하여 장례식을 중비한다. 제갈량이 장사인 양의는 원래 위연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위연이 군사를 장악하려는 것을 보자 그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위연이 무리를 이끌고 북에 귀순하려고 한다는 소문을 퍼트린다. 그리하여 무리를 이끌고 위연을 공격한다. 위연은 원래 그럴 마음이 없어서 싸우지 않고 도망치나, 그를 추격하여 죽여버린다."

 

이 기록은 믿을만하다. 어환은 진나라에 들어간지 16년동안 어떤 관직도 맡은 적이 없다. 위나라에 충성하고 진나라의 신하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한 인물이다. 그는 촉나라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다. 기록은 비교적 객관적이다. 우리는 거기에 숨은 이중적인 뜻을 엿볼 수 있다. 하나는 제갈량이 위연에게 직위를 넘기려 했다는 것으로 그는 좌우를 조화시키거나 혹은 공수의 입장차이를 완화시키려 한 것이다. 이는 그가 임종때 이미 '좌우투쟁'의 폐해를 알아차렸다는 것을 말한다. 둘은 비위, 양의 등은 위연을 견제하였는데, 이것은 제갈량이 평생동안 사후의 일을 잘 예측했는데, 양의같은 '극좌파'가 자신의 안배를 철저히 흐트릴 줄은 생각지 못했다. 위연은 정말 반란을 일으켜 버리게 된다.

 

위연이 소위 반란은 양산박의 호한들이 "탐관에 반대하지 나라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과 유사하다. 소위 우파의 '독재에 반대하지 민족국가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위연이 목표는 정적 양의일 뿐이다. 이 점에 관하여, 배송지는 이렇게 성격규정한다. "이것은 모조리 적국의 소문일 뿐이다. 본 글에서는 이를 깊이 따지지 않는다" 이것은 당시에도 어떤 사람들은 위연이 정말 그런 야심을 지니고 있었다고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양의때문에 어지러워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믿을 만하다.

 

위연은 우파로 규정지은 것은 제갈량의 잘못이 있다. 좌우투쟁은 신중하여야 하고 경계해야 한다. 의사소통을 많이 하고, 대립을 조화시키며, 온화한 악수를 해야 한다. 그래야 나라와 백성들에게 모두 공덕을 쌓는 정도이다.

 

본문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예를 든 옹개의 선조인 옹치(雍齒)를 예로 들어 유방이 어떻게 했는지를 보자. <사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천하가 안정된 후, 어느 날 한고조는 많ㅇ느 신하들이 함께 모여 논의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장량에게 물어본다. "그들은 뭘 논의하는 것이냐?" 장량이 말한다. "그들은 분봉을 받지 못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유방이 깜짝 놀란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어본다. 장량이 말한다. "누가 제일 밉습니까?" 유방이 말한다. "옹치는 예전에 나를 배반하고 진나라군대에 투항한 적이 있다. 나는 그가 제일 밉다." 장량이 말한다. "만일 당신이 옹치를 후로 봉한다면, 모두 마음 속으로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고 감히 반란을 못일으킬 것입니다." 그래서 유방은 옹치를 십방후로 삼고, 식읍 2500호를 내린다. 공로를 57위로 하였다. 사상과 행동으로 원한을 풀고, 원한을 포용하고, 숨은 위기를 평정할 수 있다니, 한고조는 정말 고명하며, 대지자(大智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