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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원)

몽골제국은 전성기에 어디서 패전했는가?

by 중은우시 2009. 10. 11.

글: 노위병(路衛兵)

 

13세기, 몽골의 철기(鐵騎)는 유라시아대륙에서 막을 자가 없었다. 아시아의 각지역은 생령이 도탄에 빠지고, 전체 유럽도 공황에 빠졌다: 영국인들은 감히 바다로 나오지를 못했고, 독일인들도 두려움에 떨었으며, 러시아에서는 '황화(黃禍)'라는 말이 나왔다. 전쟁의 신화를 창조했지만, 이 정복욕이 강했던 몽골제국도 그들의 최전성기에 여러번 패번을 맛보았다.

 

안남(安南)

 

안남은 현재의 월남(越南)이다. 처음에는 중국의 군현이었다가, 오대시기에 자립하여 독립국이 되었다. 몽골의 노장군 수부타이의 아들인 우량하타이(兀良哈台)는 운남을 평정한 후, 사신을 안남에 보내어 공물을 바치라고 하였다. 당시 안남은 국력이 강성하여 국왕 진경(陳煚)은 몽골사신을 감옥에 가두어 버린다. 이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우량하타이는 대노하여, 1253년, 병력을 이끌고 안남의 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다. 그러나 날씨가 무더워서 몽골군은 적응하지 못하고 병력을 철수하고 만다. 1284년, 원나라는 병력을 보내어 점성(占城, 월남 남부)을 공격한다. 그러면서 안남에 길을 내달라고 한다. 이를 통하여 안남을 처치하려고 한 것이다. 몽골군은 다시 안남의 도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양초(糧草)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고, 군대내에 전염병이 발생하여 할 수 없이 퇴각한다. 퇴각하는 길에 안남군대의 매복에 당해서 큰 손실을 입는다. 다음 해, 다시 10만병력을 데리고 안남을 공격한다. 바다로 양초를 운송했는데, 안남의 매복에 당해서 모조리 잃고 만다. 철군도중에 다시 안남군대의 매복공격에 당해서 낭패한 몰골로 쫓겨났다.

 

버마(緬甸)

 

1271년, 버마는 원나라의 조유(詔諭)를 받아들여 부속국이 된다. 1277년, 버마는 금치(金齒, 지금의 운남성 보산)부족과 마찰이 생겼다. 그리하여 원나라가 병력을 보내어 정벌을 떠나, 팔막(八莫, 지금의 버마북부도시)까지 들어간다. 날씨가 덥고, 사병들은 기후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아무런 전과도 거두지 못하고 되돌아온다. 1287년, 버마에 정변이 발생하여 버마왕이 그 서자에게 구금당한다. 운남왕이 병력을 보내어 정벌하고자 해서 포감(蒲甘, 지금의 버마 중부)까지 갔으나 양초가 공급되지 않아서 다시 되돌아온다. 1300년, 버마에 내란이 일어나서, 버마왕이 동생에게 살해당한다. 버마왕의 아들이 원나라에 병력을 파견하여 죄를 물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원나라군대는 다시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일본

 

몽골은 조선을 평정한 후, 일본을 초무(招撫)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거절한다. 1281년, 쿠빌라이는 대장 흔도(忻都. 忽敦이라고도 한다)와 범문호(范文虎)로 하여금 15만대군을 이끌고 양로로 나누어 일본을 정벌하러 간다. 노코노시마(能古), 시카노시마(志賀)의 두 섬에서 회합한 후, 몽골병은 오랜 항해의 피로로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다. 거기에 태풍까지 만나서, 주장수가 군대를 버리고 도망치게 된다. 남은 병사들은 섬 위에서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겨우 2,3만명만 살아서 도망칠 수 있었다.

 

이집트(埃及)

 

1259년 가을, 툴루이의 다섯째 아들이자 일한제국의 창립자인 훌레구는 서남아시아를 휩쓸고 시리아까지 차지한다. 몽케가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훌레구는 페르시아로 되돌아간다. 남겨진 선봉장 키부카 노얀(怯的不花)은 2만군대를 이끌고 계속 전진하여 이집트까지 간다. 체드부화는 사신을 보내어 이집트의 술탄 쿠투즈에게 투항하라고 말한다. 쿠투즈는 몽골사신을 참수하여 군중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슬람성전의 명의로 북아프리카의 모든 무슬림군대를 소집한다. 그리하여 12만명의 대군이 결성된다. 아인 잘루트(지금의 팔레스타인 경내)에서 몽골군과 대회전을 펼친다. 쿠투즈는 친히 나서니, 장병들의 사기가 고무되었다. 몽골군은 적을 가볍게 보고 진격하다가 산골짜기에 갇혀서 전멸한다. 몽골군의 서정은 이로써 저지된다.

 

몽골제국은 침략성을 지니고 있었고, 침략을 하면 할수록, 그들의 정벌전투와 정복욕은 강해졌다. 통치자의 야심도 갈수록 커졌다. 이상의 몇번에 걸친 실패는 모두 몽골제국이 가장 강성할 때의 실패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원인은 대체로 아래의 몇 가지이다. 첫째, 기후편차로 천시(天時)를 확보하지 못했다. 몽골인들은 북방의 가물고 활막한 지대에서 자랐다. 안남, 버마등지는 북회귀선과 적도의 중간이고 해양에 가까워 기후가 무더웠다. 사병들은 적응하기 힘들었고, 질병에 잘 걸려 전투력이 약화되었다. 둘째, 환경으로 인하여 지리(地利)도 확보하지 못했다. 몽골은 초원기병이다. 전투가 평원에서 이루어진다면 유리하다. 그러나 남방은 구릉이나 험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남, 버마와 같은 곳에서 몽골기병은 전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더더구나 해전에는 약했다. 일본정벌에서 마치 호락평양(虎落平陽)의 꼴이 된 것이 그것이다. 셋째, 광망자대하여 인화(人和)를 얻지 못했다. 몽골군은 수십년동안 백전백승의 휘황한 전적을 자랑했다. 그러다보니 교만해졌고, 적을 경시했다. 그리하여 적을 많이 두게 되고, 피정복지역의 연합항거에 부닥쳤다. 이집트에서의 전투는 이를 보여준다. 넷째, 계속된 전투로 피로해져 있었다. 몽골제국은 사방에서 전투를 벌였다. 전선이 너무 길고 병력은 분산되었다. 후방의 조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안남, 버마 정벌에서 양초가 제대로 공급되지 아니하여 피동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다.

 

몽골제국은 공성약지(攻城略地)의 신화를 창조했다. 전세계를 통일하겠다는 망상까지 품었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민족이라 하더라도, 전세계와 비교하면 자잘할 뿐이다. 천시 지리 인화는 아마도 한 지역, 한지방에서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사방에서 모두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패전을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