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개원(李開元)
진시황의 유조문제는 천여년이래로 계속 제기되었고, 의문을 품어왔다. 진시황이 임종전에 정말 유조를 남겼을까? 이 유조는 정말 조고등에 의하여 바꿔치기 당했을까? 진나라제국은 바로 이렇게 바꿔치기한 유조때문에 망한 것일까? 한번 살펴보는 것도 나쁠 것은 없을 것같다.
진시황37년 칠월, 천하를 순유하던 시황제는 지불(현재의 산동성 연태)에서 배를 타고 큰 물고기를 사살한 후, 해안을 따라서 서행한 후 함양으로 되돌아오는 길을 가고 있었다. 일행이 평원진(지금의 산동성 평원 경내)에 이르렀을 때, 시황제는 돌연 병을 얻는다. 점을 쳐본 결과, 북방의 산귀(山鬼)가 장난을 친 것이라고 나왔다. 시황제는 급히 심복대신 몽의(蒙毅)를 대현(하북성 울현)으로 파견하여 자신을 대신하여 명산대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병을 없애달라고 기원하게 한다.
일행이 황하를 건너 사구평대(하북성 광종 경내)에 이르렀을 때, 시황제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다. 할 수 없이 가던 길을 멈춘다. 시황제는 느낌이 좋지 않아서, 병석에서 긴급히 구두로 유조를 내려, 후사를 안배한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시황제의 유조이고, 역사상 분쟁이 있는 수수께끼의 하나이다. 이 사건에 대하여 <<사기. 진시황본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평원진에 이르러 병이 들었다. 시황제는 죽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대신들은 감히 죽음에 관한 일을 꺼내지 못했다. 황상의 병이 더욱 심해졌다. 그리하여 옥새와 글을 공자 부소에게 하사하면서 말했다(賜公子扶蘇璽書)": "여상회함양이장(與喪會咸陽而葬)"
이것은 국가운명이 걸린 큰 일이다. 그런데 단지 이 몇마디 뿐이다. 그리고 내용도 불분명하다. 나중에 유조라고 불리우는 '사공자부소새서"는 겨우 7글자이다. "여상회함양이장' 위에 기록된 글의 내용으로 보자면, 우리는 그저 진시황제가 살아있을 때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고, 아무도 그에 대하여 죽음과 관련된 말을 꺼내질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계속 불사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고, 계속하여 죽음과 싸워왔다. 그는 사후의 일에 대하여 오랫동안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그는 결국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고 사신에게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불사의 환상에서 깨어나서, 자신의 사후의 처리를 지시한다. 그는 후사를 장남 부소에게 맡겼고, 부소에게 상군에서 함양으로 돌아와서 장례등 일체의 일을 주재하라고 하였다.
시황제가 구두로 유조를 남길 때, 어린아들 호해는 유일하게 그 자리에 있던 아들이다. 시황제가 후계자로 삼고 싶어했던 아끼는 아들이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순간이 되자, 그는 사후의 일을 곁에 있던 호해에게 맡기지 않고, 멀리 상군에 있는 부소에게 맡겼다. 그가 이처럼 가까운 곳에서 찾지 않고 먼 곳에서 찾은 이유는 이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다: 십개월간 친히 살펴본 바에 의하면, 시황제는 호해를 자신의 후계자로 적절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의 부소에서 호해로 흔들렸던 마음이 다시 호해에서 부소로 기울어졌다.
시황제가 구두로 유조를 남길 때, 그 자리에는 세 사람의 중요인물이 있었다: 호해, 이사(李斯)와 조고(趙高)가 그들이다. 호해는 원래 정치능력도 없고 정치적 야심도 없는 젊은이였다. 그는 부친의 결정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호해의 스승인 조고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조고의 관직은 중거부령(中車府令) 겸 행새부영사(行璽符令事)였다. 시황제의 유조를 받아적은 후, 그는 황재의 옥새를 찍고 봉투에 넣어서 봉한 후에 발송한다. 그는 유조를 발송하지 않고, 호해와 승상 이사를 설득한다. 유조의 원본을 파기해버리고, 새로 유조를 위조하여, 장남 부소를 자살하게 하고, 어린아들 호해를 후계자로 앉히자는 것이다. 이 사건을 역사에서는 "사구지모(沙丘之謀)"라고 부른다.
사구지모의 핵심은 바로 유조 문제이다. 시황제가 임종전에 정말로 유조를 남겼는가? 유조에는 도대체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을까? 이 유조는 정말 조고가 발송을 막은 후 나중에 바꿔치기 했을까?
진시황의 유조와 관련된 문제는 천여년 이래로 계속 제기되고 계속 의문을 품어왔다. 실제로 시황제의 유조만이 아니다. 전체 중국역사에서 유조는 계속 나타나지만 시종 말하기 어려운 복잡한 문제가 있었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소위 '유조'라는 것은 선제가 임종전에 한 말이기 때문이다. 말한 자는 이미 죽었으므로, 더 이상 확인해줄 사람이 없다. 유조를 받은 사람은 왕왕 선제의 임종시에 병상을 지키고 있던 몇 안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두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어간 주요인물이다. 당연히 자신의 이익에 따라 선제가 남긴 여러가지 문제를 처리하게 된다. 여기에는 유조문제도 들어간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유조문제를 처리하는가?
역대의 사례를 보면, 소위 유조문제는 대체로 3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원래 유조가 없었고, 나중에 나타난 소위 유조는 임종후의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뜻에 따라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명나라때의 유조는 이런 경우가 많았다; 둘째는 원래 유조가 있으나, 유조의 내용이 임종후의 일을 처리하는 사람의 이익에 맞기 때문에, 유조를 널리 알리고 집행하는 것이다. 한무제가 죽기 전에 어린 아들을 곽광에게 맡긴 일등이 이런 류에 속한다; 셋째는 원래 유조가 있는데, 그 내용이 임종후의 일을 처리하는 사람의 이익에 맞지 않아서, 유조는 폐기되고 숨겨지고, 다시 새로운 유조를 위조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황제의 유조는 어떤 유형에 속할까?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상황에 비추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겉으로 보기에, 진시황의 유조는 셋째 유형에 속하는 것같다. <<사기>>의 처리는 비교적 역사적 사실과 정리에 부합한다. 돌연 사망한 시황제가 임종전에 급히 남긴 유언은 후사를 장남 부소에게 맡기는 것인데, 이를 기록한 유언이 파기되었으므로, 단지 시황제의 뜻을 밝히는 말만이 남게 된다: "여상회함양이장"
여(與)는 '참여'이다. 상은 상례이다. 회는 회합이다. 부소는 장남인데, 그에게 함양의 장례식에 참석해서 장례식을 주재하라고 한 것이다. 진시황이 거록군 사구에서 죽었고, 시신은 함양으로 운송되는데, 부소는 상군에 있다. 그래서 그를 함양으로 되돌아오게 해서 영구와 만나서, 부친을 위한 마지막 장례식을 주재하도록 한 것이다.
이 말은 어떻게 하여 기록에 남게 되었을까? 우리는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시화에가 '옥새와 글을 부소에게 내렸다'는 것은 중대한 정치적 의미가 있다. 당사자중의 하나인 조고는 이에 대하여 명확히 해석한 바 있다. 이 해석은 <<사기.이사열전>>에 보인다. 본문에 조고가 시황제의 유조를 발송하지 않고, 직접 호해를 보러가서 말한다: "황상이 죽었는데, 조서를 다른 왕이나 아들에게 남기지 않고, 오로지 장남에게 글을 남겼다. 장남이 도착하면, 바로 황제에 오를 것이다. 그러면 그대에게는 손바닥만한 땅도 남지 않을텐데 어떡할 것이냐?"
조고가 말한 '장남에게 내린 글'이라는 것은 바로 파기해버린 유조를 말한다. 내용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부소가 황제로 오를 것을 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고금의 유조(遺詔)에 관한 여러가지 사건들을 살펴보면, 한 마디로 종합할 수 있다: 소위 '유조(유언)'문제는는 모두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의 입을 빌어 말을 하는 것이고, 살아있는 사람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죽은 사람이 좋게 말해주었으면, 살아있는 사람은 그대로 말한다; 죽은 사람이 말을 하지 않았으면, 살아있는 사람이 그를 대신해서 말을 한다; 죽은 사람이 나쁘게 말했으면, 살아있는 사람이 고쳐서 말을 한다.
우리는 자주 탄식한다. 고금이래로, 역사는 변화하지만, 인성은 바뀌지 않는다. 유사한 정치무대에서 유사한 정치극이 계속 상연된다. 1976년, 중국의 정치무대에서 다시한번 유조진위에 관한 다툼이 일어난다. 모주석의 임종유언이 도대체 '네가 일처리하면 내가 안심하겠다"인지,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하라"는 것인지. 이것은 졸지에 정국의 촛점이 된 바 있다. 역사의 교훈은 우리가 깊이 반성하고 생각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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