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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진시황)

병마용을 발견하기 이전에 있었던 "요괴(妖怪)" 사건

by 중은우시 2009. 11. 19.

글: 악남(岳南)

 

1974년 봄, 진시황릉의 아래에 위치한 섬서성 임동현 서양촌의 야외에서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도기무더기를 발견한다. 나중에 국가문물국의 고고학 전문가가 감정한 결과 진시황릉에 배장(陪葬)된 병마용 군진이었다.

 

그해 7월 15일 오후, 섬서성 고고학전문가인 항덕주(杭德洲), 원중일(袁仲一)등 일행은 도구를 가지고 서양촌의 큰 나무 아래에 텐트를 치고, 농민들이 우물을 파던 곳으로 조사를 하러 갔다. 현지 농민이 판 것은 약 4.5미터 깊이의 네모난 갱이었다. 단면으로 봐서 농경층 아래에는 홍소토(紅燒土), 회신(灰燼), 도편(陶片)과 병용(陶俑)의 머리, 팔, 다리가 있었다. 도용은 비록 부서져있었지만 개략적인 크기는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같은 규격의 도용(陶俑)을 보고는 고고학 전문가들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 속으로 감탄했다: "이는 기적이다. 기적."

 

한동안 감탄하다가 고고학 전문가들은 발굴절차에 따라 작업을 시작했다. 현지의 지리환경을 확인한 후, 다시 일련의 사진촬영, 문자기록, 측량등 고고학자에 있어서 빠트릴 수 없는 작업들을 진행했다. 그 다음에 일제조사를 실시한다. 문헌을 찾고,현지군중을 방문하였는데, 역대왕조가 편찬한 사서에는 병마용에 관한 어떤 기록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을 노인의 입에서 진시황릉 주변의 황탄(荒灘)에서 자주 "요괴"가 출현했다는 말을 들었다. 현지 농민들은 복인지 화인지 알 수 없어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어떤 "요괴"는 출토되기도 했고, 현지에 문자기록으로 남겨져 있기도 했다.

 

첫번째 이야기

 

명나라 숭정17년(1644년), 이자성이 서안에 건국한 후, 친히 대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황하를 건너 북경으로 진격한다. 도르곤은 수십만의 만주병사를 이끌고 산해관 동쪽의 망망한 설원에 주둔하며, 호시탐탐 중원을 노렸다. 대명제국은 이미 운세가 다하였고, 역사의 사해로 가라앉는 중이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여산의 자락에는 난민들이 모여들었다. 서양촌은 졸지에 난민촌이 되어버린다.

 

여전히 봄에는 가뭄이 들고 비가 오지 않았다.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우물로는 더 이상 사람들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난민들은 사람을 조직하여 마을 남쪽의 황탄, 즉 진시황릉에서 약 3리 떨어진 저지대에서 물을 긷기 시작한다.

 

모든 것은 아주 순조로웠다. 삼일만에, 우물의 바닥에서 맑은 물이 솟아났다. 그러나, 하룻밤만에 우물물은 다시 사라지고 물통에 담아서 길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모두 기이하게 생각했다.

 

한 청년이 나중에 허리에 밧줄을 묶고 우물 아래로 내려가서 조사를 해보았다. 우물위의 사람들이 무슨 이유에서인이 궁금해하고 이을 때, 우물 아래에서는 비명소리가 들리더니 다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모두 황급히 그 청년을 끌어올렸다. 그런데, 그 청년은 이미 입가에 거품을 물고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모두 놀라서 청년을 안고 마을로 돌아갔다. 생강탕을 먹이고 나서야 깨어났는데, 청년이 손짓발짓을 섞어가면서 뭐라뭐라고 얘기했지만 마음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간이 큰 사내 한 명이 칼을 지니고 다시 우물을 내려갔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려고 한 것이다. 우물 아래는 어두워서 처음에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사내는 손으로 벽을 더듬으며 사방을 관찰했다. 그런데, 우물의 벽이 이미 물에 의해 무너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이때 등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사내는 놀라서 얼른 몸을 돌렸는데, 우물 벽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시커먼 구멍이 나타났다. 구멍입구에는 이빨을 드러내고 손가락을 펼친 요괴가 서 있었다. 금방 그에게 달려들 것같았다.

 

사내는 본능적으로 칼을 들어 요괴를 내리쳤다. 그리고 우물 위로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그가 우물 위로 끌려올라왔을 때는 얼굴색이 흙색이 되어 있었고, 바닥에 쓰러져 혼절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아무도 우물 아래로 내려가서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서양촌의 한 나이든 수재 한 명은 여러 자료를 찾은 후에 "땅을 파면 안된다(不宜動土)"는 근거를 찾아냈다. 그리하여 수수께끼같은 우물은 다시 메워졌다.

 

노수재는 후인들이 '땅을 파면 안된다"는 이유를 알게 하기 위하여 '필기'의 형식으로 이 사건의 구체적인 내용을 기록해 놓았다:

 

대명 숭정 17년 3월 초칠일, 백성들이 마을 밖에서 우물을 팠다. 삼일만에 물이 나왔다. 그날 밤에, 물이 사라지고 물통에 담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기이하다고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한 젊은이가 몸을 묶고 우물 아래로 내려갔다. 곧 놀라서 소리치며 혼절했다. 생강탕을 먹였다. 젊은이는 우물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또 다른 장사가 칼을 들고 우물로 내려갔다. 벽이 무너지고, 괴물이 나타났는데 사람과 같았다. 하나하나 모두 사람의 모습이었다. 장사는 아주 놀라서 칼을 들어 내리쳤다. 괴물은 쓰러지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장사가 소리치는 것을 듣고 꺼냈는데, 장사는 혼절하여 깨어나지 못했다. 나는 이를 듣고, 땅을 파면 안되는 곳이라고 알려주고 다시 묻으라고 했다. 오호라, 나라가 망할 지경이 되니 반드시 요괴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을 기록하니, 후세인들은 경계로 삼으라.

 

노수재의 이 "불의동토"이론은 비록 후세인들에게 경각심을 주지도 못했고, 이곳에서 발굴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지만, 이 "필기"는 진시황릉 병마용에 관련된 최초의 기록이다.

 

두번째 이야기

 

청나라 선통연간, 여산의 자락아래에 있는 하화촌에 있는 화흥도(和興道)라는 노인이 돌연 병사했다. 가족들은 비통한 가운데 죽은 자를 위하여 무덤을 만들었다. 한 풍수선생이 골라주어서, 묘지는 서양촌 남쪽의 황탄 위로 정했다. 풍수선생은 "이 땅은 여산을 등지고, 서쪽으로 진릉에 가까우며, 동쪽으로 소화산의 수려한 봉우리가 있으며, 위하의 물을 앞에 두고 있으니, 얻기 힘든 풍수길지이다. 이 곳에 장사지내면 집안이 흥성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화씨가족은 풍수선생이 골라준 위치를 파기 시작했따. 묘지가 거의 완공될 즈음, 공포스러운 사건이 벌어진다. 보기에 사납게 생긴 얼굴의 "요괴"(실제는 도용)가 지면에 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놀란 와중에, 화씨들은 집안의 어른을 모셔서 살펴보았다.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어른은 탄식하며 말했다: "이것은 불길한 징조이다. 우리가 풍수선생에게 속았다. 그는 우리 후손을 끊으려고 했나보다."

 

일이 복잡해졌다. 현지 풍속에 따르면, 사람이 죽은 다음에 묘지는 1곳만 선택해야 한다. 묘의 위치가 정해지고, 일단 땅을 파기 시작했으면, 무슨 일이 발생하더라도, 죽은 자를 그 곳에 묻어야 한다. 만일 묘지를 바꾸게 되면, 집안에서 누군가가 또 죽는다고 한다.

 

물러날 길이 없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명백하게 불길한 징조가 나타난 땅이니, 어떻게 해야할까. 비분하고 침통한 화씨가족은 "풍수선생을 붙잡아 물어보자"고 결정한다.

 

돈을 받고 집에서 여유있게 술을 마시고 있던 풍수선생은 돌연 쳐들어온 4명의 사나이들에게 뺨을 몇 대 맞고, 술상을 뒤엎었다. 풍수선생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4명의 사나이들은 그를 묘지로 끌고갔다. 이때 도용은 이미 화씨가족들에 의하여 파내어져 있었다.

 

풍수선생은 땅바닥에 누워있는 사람모양의 '괴물'을 보고는 먼저 깜짝 놀란다. 이어서 이마에서는 땀이 비오듯 흘렀다. 점점 그는 정신을 차렸다. 그의 수십년 풍수선생 생애에서 이런 경우는 만난 적이 없었다. 정말 세상 일은 알 수가 없고, 온갖 기이한 일이 다 벌어지는 법이다.

 

이 사납게 생긴 '괴물'과 화씨가족의 비분강개를 앞에 두고, 풍수선생은 강호를 굴러온 노련함을 드러냈다. 그는 먼저 얼굴을 굳히고, 화씨자족의 어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큰 소리로 물었다: "너희는 왜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느냐.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

 

"봐라. 이게 뭐냐?" 어른은 하얀 수염을 부들부들 떨면서 도용을 가리켰다: "너는 조상을 요괴와 함께 살라는 것이냐. 이게 후손을 끊겠다는게 아니면 무엇이냐?"

 

풍수선생은 교활하게 웃었다: "원래 그래서였구나. 봐라. 이게 뭐냐." 그는 어른의 시선을 멀지 않은 황탄의 들판을 가리켰다.

 

황탄에는 십여개의 언덕이 있었다. 어른은 그것을 보고도 무슨 뜻인지 몰랐다. "모르겠느냐." 풍수선생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내가 말해줄테니 잘 들어라. 그 언덕 아래에 묻힌 것은 모두 옛날 사람들이다. 이들의 후손들은 모두 잘 살고 있다." 풍수선생은 화씨가족을 언덕으로 데리고 가서는 하나하나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삼국시대 오관중랑장 조세제(趙世濟)의 부친 묘지이다; 이것은 명나라 가정연간 예부상서 왕전승의 모친 묘지이다; 이것은 청나라 강희4년에 장원급제한 양무완의 부친 묘지이다; 그리고 이 몇개도 모두 역대 유명한 인물들의 조상이 묻힌 곳이다."

 

풍수선생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그 백발의 어른에게 말했다: "그들의 후손이 그렇게 잘나가고 있고, 사람위의 사람이 되어 있다"

 

"무슨 이유로?" 이때 화씨가족은 이미 풍수선생의 말에 미혹되었다. 그의 말에 정신이 없어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화를 누르고 반문했다.

 

풍수선생은 화씨가족이 이미 자신의 페이스에 말려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대담하게 사기술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는 도용의 앞으로 와서 손가락 하나로 가리켰다: '이것이 원인이다. 모두 이것의 공로이다."

 

화씨가족은 더더욱 무슨 말인지 몰랐다. 할 수 없이 풍수선생의 교묘한 말솜씨에 끌려들어갔다.

 

"선친이 임종할 때, 나를 그의 앞으로 불러서 몰래 이렇게 말했다. '아들아. 내가 평생 풍수를 봐와서 이곳저곳 모두 손바닥을 들여다보듯이 잘 안다. 그러나 마을 동남쪽의 그 황탄은 도저히 알지를 못하겠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평범한 땅인데, 어떻게 그곳에 묻힌 사람의 후손들은 하나같이 성공하는지. 나는 감히 평생 한 사람도 그곳에 묻으라고 말하지 못했다. 너도 아무나 그곳에 묻도록 하지 말라. 언젠가 네가 확실히 알 수 있게 되면 그때 시행해라.' 그렇게 말을 마치고 선친은 눈을 감으셨다." 풍수선생이 여기까지 말하였다. 시장에서 재주를 보이거나 이야기를 해주는 전문가들처럼 고의로 끝부분을 남겨놓고 사람들의 흥미를 북돋았다.

 

"그리고는?" 마침내 누군가가 함정에 걸렸다.

 

"나는 선친의 유훈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이 곳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30년동안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나중에 나는 황고묘에 향을 피우고 기도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신선의 가르침을 받았다. 원래 이들의 묘에는 모두 보배가 하나씩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고서에서 말하는 천신(天神)이다. 그것이 보우해서 묻힌자들의 후손이 성공하게 되는 것이다."

 

"정말이냐?" 화씨가족은 완전히 제압당했다.

 

"내가 보기에 너희 화씨가족은 후덕하고 충성스러웠다. 우리 집안은 너희집안과 교분이 깊다. 그래서 이 곳을 정해준 것이다. 내가 비밀을 하나 말해주고 싶지만, 천기는 누설할 수가 없는 법이다. 그저 자연스럽게 따르면 된다. 오늘 여러분들이 이렇게 무례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천기를 누설하게 되어, 너희 화씨가족의 백년조화는 물거품이 되었다. 정말 안타깝다. 안타깝다." 풍수선생은 말을 마치고,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아주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회씨가족은 마침내 슬픔에서 벗어나 기뻐할 수 있게 되었다. 백발의 어른은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여, 얼굴이 벌개 가지고 사죄를 했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풍수선생의 집에 술과 고기를 가져다 주게 했다.

 

금방의 치욕을 씻기 위하여 풍수선생은 술을 먹으면서 마음 속으로 계책을 생각해내서 화씨가족을 속여먹으려고 했다. 술과 고기를 싫컷먹은 후에 그는 방법을 백발 어른에게 알려주고 다시 돈을 받고는 떠났다.

 

한밤중에, 화씨가족은 "요괴"를 집안으로 들고 온다. 그리고 밧줄로 묶어서 시신의 앞에 둔다. 죽은 자의 아들이 손가락을 찔러서 피를 내어 도용의 머리에 흘린다. 그후에 복숭아나무로 도용을 때린다. 새벽에 닭이 세번 울때까지 그렇게 했다. 이렇게 연속 3일을 하고나서 화씨가족은 밤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괴물"을 묘지로 옮겨서 묻어버린다. 이것은 풍수선생의 화씨가족에 대한 보복이었다. 그러나 화씨가족은 그가 시키는대로 열심히 했고, 그렇게 해야 후손이 흥성하고 집안이 발전한다고 믿었다.

 

이 전설적인 이야기는 나중에 고고학자들이 주변의 농촌을 조사하다가 듣게 된다. 이야기해준 사람은 바로 그 풍수선생의 아들이었다. 그도 이미 팔순이 넘었고, 백발이 성성했다. 그도 일찌감치 조상대대로 내려온 풍수를 가지고 먹고 살았다. 그의 부친은 그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 목적은 임기응변이 필요하고, 높은 산을 만나도 평탄한 도로로 만들고, 칼창을 비단으로 바꾸어야 하는 능력이 있어야 생각지도 못했던 위험한 순간을 넘길 수 있다고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야기에는 허구의 내용이 섞여들어간 것같지만 기본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며 나중에 대규모발굴이 이러어지면서 확실히 십여개의 묘가 이미 병마용갱에 뚫고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는 한나라때의 것이고, 두 개는 명청시대의 묘장이었다. 주의의 도용이 옮겨진 흔적이 분명히 있었다. 아쉽게도 이 이야기는 더 널리 퍼지지는 않고, 그냥 묻어버리고 말았다.

 

세번째 이야기

 

1932년 봄, 진시황릉 내성 서쪽벽에서 20미터쯤 떨어진 곳에, 현지 농민이 땅을 파다가, 1미터 깊이의 지하에서 무릎을 꿇고 앉은 모양의 진흙으로 된 "요괴"(실제는 도용)를 발굴한다. 이때는 관중이 군벌혼전을 벌이는 때였고, 사방에서 전쟁의 포성이 있었다. 이 도용은 금방 행방불명되는데, 추측에 따르면, 이 "요괴"는 아마도 나중에 대만으로 도망친 국민당군대가 가져갔을 것이라고 한다.

 

1948년 가을, 진시황릉 동쪽의 초가촌 부근에서, 농민이 다시 2개의 진흙 "요괴"를 발굴한다. 모두 앉은 자세였고, 몸에는 소매가 긴 옷을 입고 있었다. 머리 뒤에는 원형으로 머리를 묶었다. 하나는 임동현문화관이 수장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중국역사박물관이 수장하고 있다.

 

비록 이 3개의 "요괴"는 이미 운좋게 사람들에게 되돌아왔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발견했을 때는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 현지인들은 신원불명의 "요괴"로 취급했고, 문화재종사자들도 그 자체의 가치를 중시하여 '진나라 전성시대의 위대한 예술적 창작"이라고 결론을 내렸을 뿐이다. 더 이상 상세한 연구는 하지 않았다. 일대명가 정진탁이든, 중국역사박물관의 연구원인 전문가들도 모두 그 남성이 꿇어앉아 있는 도용의 모습을 모두 '여성'으로 오인했다. 겉으로만 보면, 그 도용은 분명히 얌전한 부인처럼 보이기는 한다.

 

네번째 이야기

 

1964년 9월 15일, <<섬서일보>>에는 그다지 잘 보이지 않는 위치에 아래와 같은 뉴스가 실렸다:

 

"임동에서 진나라때 도용이 출토되었다.

 

최근 임동 진시황릉 부근에서 다시 진나라때 도용 1개가 발견되었다. 이는 초가촌 서남쪽 약 150미터 지점이다. 금년 4월, 군중은 면화재배지를 정리할 때, 지면에서 약 1미터 깊이에서 발견한다. 꿇어앉은 여자도용이다. 이 도용은 해방전에 발견된 두 개의 도용보다 더욱 완벽하다. 의복의 무늬도 분명히 보이고, 자태도 조용하며 대범하여, 살아있는 것같다. 현재 문화재는 임동현문화관내에 보존하고 있다."

 

이는 진용이 매장된 후 20세기가 지나서 처음으로 공식문자로 보도된 내용이다. 그러나 이 소식은 더 이상 관심을 끌지 못한다. 8000여개의 복병이 암흑에서 다시 광명을 맞이하려면 아직도 1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