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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진시황)

진시황이 황후를 두지 않은 이유는?

by 중은우시 2010. 1. 25.

글: a喜子

 

중국고대의 봉건제왕은 모두 황후를 두었다. 황후제도는 태자제도와 서로 관련이 있다. 이는 후궁제도 내지 군주정치의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전국시대 진(秦)나라는 진효공이후, 황후와 태자를 두는 것을 제도화했다. 나중에 다른 제후국들도 모두 본받았고 완비되었다.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한 후, 각종제도를 건립하는데, 황제의 정처는 황후로, 황제의 모친은 황태후로 명확히 규정했다.

 

그러나, 진시황은 평생 황후를 두지 않는다. 그는 황후제도를 둔 이래 유일하게 황후를 두지 않은 황제이다. 이것은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았다.

 

첫째, 원모설(怨母說)

 

어떤 사람은 진시황이 모친의 행위가 도덕에 어긋나고 음란하였으며, 다시 두 아들을 낳았으므로, 진시황에게는 심리적으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고 한다. 또한, 이같은 모친에 대한 원망은 모든 여인을 적대시하는 것으로 발전하였고, 나중에 혼인문제에 있어서 편집적인 증세를 나타내게 되었다고 한다. 비록 그의 후궁에는 육국의 미녀가 모두 모여있었지만, 그는 그녀들을 그저 욕구배설의 대상으로 삼거나 생리적인 수요를 채워주는 도구로 삼았다.

 

둘째, 실연설(失戀說)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여강(黎姜)은 조(趙)나라 공장(工匠)의 딸인데, 나중에 일가가 진나라로 옮겨와서 병마용을 건설한다. 어려서 조나라에 인질로 붙잡혀가 있던 어린 진시황은 그녀와 어려서부터 같이 논 친구였다. 그러나 그녀의 출신이나 정치적인 요소때문에 그녀를 왕비로 삼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그녀가 진시황이 평생 가장 사랑했던 여인이다. 진시황은 여러차례 여강을 황후로 봉하려고 하였지만, 여강이 모두 거절했다. 진시황에 있어서 여강은 부인이며 파트너이고 홍안지기이며 유일하게 일생을 함께한 여인이다. 나중에 그녀는 태자 부소의 목숨을 구하고, 부자간의 갈등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검으로 자결한다. 그리하여 진시황은 평생 황후를 두지 않았다.

 

셋째, 자대설(自大說)

 

진시황은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한 황제였다. 후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역사적 공헌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진시황은 당시에도 스스로를 보통사람이 아니라고 여겼다. 스스로 자신의 공덕이 고대의 성현인 삼황오제를 넘어섰다고 생각했고, 후대에도 자신을 따를 사람이 없다고 보았다. 황후에 대한 요구조건도 아주 높았다. 얼마나 높은지는 자신조차 알 수가 없었다. 후궁에 미녀들이 많았지만, 한 명도 그의 요건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자연히 황후를 봉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넷째, 독재설(獨裁說)

 

신세내력과 주위환경의 영향을 받아, 진시황은 어려서부터 각박하고 의심이 많은 성격을 지녔다. 한편으로 스스로에 대한 자만심이 강했다. 그는 해마다 전쟁을 일으켜 육국을 무너뜨리고 천하를 차지하며 통일된 대제국을 건설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가 황후를 두면 그 자신이 견제를 받을 수 있고, 원대한 이상을 실현하는데 장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연히 그는 천하에서 자기 혼자만 발언권을 갖기를 원했고,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다섯째, 장생설(長生說)

 

진시황은 영원히 황제의 권력을 보유하고 싶어했다. 생명을 영원히 존속시킬 수 있다는 망상을 품었다. 그리하여 계속하여 사람을 보내어 불사약을 찾았다. 한번은 진시황이 태산에 봉선을 마친 후, 방사 서복을 만난다. 서복은 발해의 가운데 삼신산이 있는데, 그 안에 신선이 있는데 산 속의 선약을 먹어서 모두 장생불로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반드시 황제를 위하여 선약을 가져오겠다고 말한다. 진시황은 그에게 많은 재물을 주고, 그에게 바다로 가서 선약을 구해오라고 시킨다. 나중에 서복이 돌아왔는데, 신선이 예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동남동녀와 각종 공장을 보내어 예물을 바쳐야만 선약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진시황은 500명의 동남동녀를 서복에게 주어 다시 바다로 나가게 한다.

 

다음 해, 진시황은 다시 동순을 하면서 서복을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그가 다시 서복을 만난 것은 다시 10년이 지난 다음이었다. 서복은 여전히 선약을 찾지 못했다. 그의 해명은 이러했다: 원래 선약을 손에 넣을려고 했는데, 바다에서 큰 물고기가 선산을 호위했다. 그리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진시황은 궁수를 붙여서 바다로 가서 큰 물고기와 싸우도록 하였다. 그렇게 하면 서복이 선약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쉽게도 이번에 귀경하는 길에 그는 죽어버린다. 더 이상 핑계거리가 없던 서복은 호랑이등에서 내릴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기원전 210년, 그는 선약을 구하러 가는 무리를 이끌고 바다로 나간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한 가지 사실을 설명해준다. 진시황은 자신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황후를 두면, 태자도 두어야 하는데, 그것은 자신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말이 아닌가. 이것이 아마도 황후를 두지 않은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