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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진시황)

진나라멸망의 원인은 진시황이 지나치게 인자하였기 때문이다?

by 중은우시 2012. 1. 17.

글: 뇌광(雷光)

 

진시황이 육국(六國)을 멸하고 중국의 통일봉건왕조를 건립한다; 그러나 통일후 진왕조는 겨우 15년간 존속하다가 멸망하고 만다. 짧은 10년의 기간동안 육국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했던 강대한 진왕조가 어찌 이렇게 빨리 멸망했단 말인가? 그 천하무적의 백만 진군(秦軍)은 또 어찌하여 그렇게 빨리 사라졌는가? 이것은 역사상 깊이 생각해볼 문제이고, 사람들이 이천여년동안 계속 논의한 화제이다.

 

이천여년동안, 많은 학자들과 문인지사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여러 방면에서 토론했다. 이들 토론에서 많은 견해와 결론 혹은 재미있는 가설을 만들어 냈다. 이들 토론중 다수는 사적(史籍)의 진시황에 대한 기록과 평가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 이 전제하에서는 어떻게 토론하더라도, 얻어내는 결론은 결국 하나이다. 즉, 진나라가 신속히 멸망한 원인은 진시황의 폭정과 혹형때문이다. 사적에서는 진시황에게 '폭정'과 '혹형'이라는 모자를 씌웠다. 수천년동안 이것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지고, 거의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게 된다. 진시황을 좋아하는 사람도, 그저 그의 공적으로 그의 잔혹한 과실을 상계하려 할 뿐이다. 사람들이 생각해봤는지 모르겠다. 만일 사적의 진시황 폭정에 대한 기록이 허위라면, 즉, 진시황이 폭군이 아니라면...그리고 폭정을 행하지 않은 상황하에서, 진나라가 신속히 멸망한 것이라면, 그 원인분석은 어떻게 될 것인가? 진시황이 '천하제일폭군'이라는 세상사람들을 이천년간 지배해온 가정을 뒤집는 것은 천하의 금기를 건드리는 일이다. 어찌 쉽겠는가? 특히 수구적이고 전통관념을 고수하는 중국문인들에게는 그러하다. 본인은 사람들의 관념을 바꿀 능력은 없다. 그저 역사상의 사건을 분석함으로써, 최대한 진나라가 급속히 멸망한 원인을 객관적으로 분석해보고자 한다.

 

진나라가 육국을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진나라사람들이 잔혹함과 전투를 잘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진나라이 종합국력이 강대했기 때문이다. 상앙의 변법후, 진나라는 여섯 군왕의 노력을 거치면서, 국력이 다른 동방육국을 이미 압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진시황은 겨우 10년의 시간을 들여 육국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는 대업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육국을 통일하는 전쟁을 치르면서, 대규모로 투항장병을 살해하거나 평민은 도살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진시황을 적대시하고, 그를 아무 이유없이 공격하는 사람들고 그런 사건을 날조하지는 않았다. 백기가 조나라의 투항항 장병을 살해한 일은 진시황때 일어난 일이 아니다. 그리고, 통일전쟁을 전후하여 국가의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는 현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른 일부 전쟁에서 나타났던, "열개의 집중 아홉개가 비었다"든지, "사람의 흔적이 희소했다"든지 하는 현상이 없었던 것이다. 전국적인 대규모전쟁을 치르면서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진시황이 군대를 잘 통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일전쟁과정에서 진시황이 권력을 잡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전국의 많은 무고한 백성들이 비명에 죽었을 것이다.

 

육국을 멸망시키고 통일을 완성한 후, 진시황은 예전 육국의 백성들을 어떻게 대하였을까?

 

첫째, 육국을 멸망시킨 후, 진시황은 다른 개국황제들과는 달리, 육국의 군왕과 귀족 및 병력을 지닌 무장들을 제거해버리지 않았다. 그저, 군왕과 친척등 고위귀족들을 진나라 수도부근으로 데려가서 거주하게 하였을 뿐이다. 일부 무장, 예를 들어, 진군 이십만을 죽인 초나라의 대장 항연의 후손들까지 고향에서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장원에서 군대를 훈련시킬 수 있었다. 이런 너그로운 조치는 나중에 화근을 남긴다.

 

둘째, 육국을 멸망시킨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육국의 백성들과 원 진나라의 백성들을 대등하게 취급했다. 육국과의 사이의 벽과 장애를 허물었고, 전국각지로 통하는 길을 닦는다. 이렇게 하여 전국의 사람들이 교류하기 편하게 하였고, 각국백성들의 심리상의 벽을 감소시켰고, 하나의 민족을 형성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것때문에, 정예부대가 쉽게 파죽지세로 진격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나중에 진승, 유방, 항우가 쉽게 함양부근까지 진격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때문이다.

 

셋째, 육국통일을 완성한 후, 그는 평등하게 예전 육국의 백성들을 대했다. 그들에게 진나라 백성들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면, 그들도 진나라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복종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육국귀족세력이 가진 호소력을 간과한 것이다. 그리하여 내부의 경계를 게을리 했다. 그러다보니 육국의 원래 귀족들이 민간에서 유세를 하고, 그들과 진나라정부간의 관계를 이간질할 수 있었다.

 

넷째, 통일전쟁이 끝난 후, 그는 전국의 군대를 대부분 남쪽과 북쪽의 변방으로 보낸다. 한 부대는 몽명이 이끌고 북쪽으로 가서 장성을 쌓는다. 또 다른 한부대는 조타가 이끌고 영남으로 가서 변방을 개척한다. 두 사람은 전국의 거의 모든 부대를 데려간다. 그러다보니 내부의 군사력은 공백이었다. 전쟁이 일어나도 데려다 쓸 군대가 없었다. 반란세력들이 기회를 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남북에서 병력을 거느린 장수는 모두 원래 육국출신이다. 예를 들어, 몽염은 제나라의 후손이고, 조타는 조나라의 후손이다. 그래서 육국의 귀족들의 거병했을 때, 남북 양쪽에 있는 주력군대는 제 때에 달려오지 않았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장한이 죄수들을 모아서 이끌고 대적할 수밖에 없었다.

 

다섯째, 그는 사서에서 쓴 것처럼 전국의 무기를 모두 거둬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국내의 인심을 너무 낙관해서,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았다. 민간의 백성들이 무장을 하는 현상도 보편적이었다. 한신과 같이 군인도 아니고 관료도 아닌 인물이 보검을 차고 길거리를 활보하였다. 이것은 당시의 인민들이 상당히 자유로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기관리도 아주 느슨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진승, 오광과 육국의 귀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금방 수십만의 군대를 무장시킬 수 있었다. 만일 사서에서 쓴 것처럼, 전국의 무기를 회수했다면, 이런 상황이 발생할 수 없는 것이다.

 

여섯째, 이때 하나의 천적이 나타난다. 항우라는 군사천재이다. 이것도 진시황이 인자하여 생긴 일이다. 만일 당시 진시황이 항연의 후손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하였더라면, 항우는 어른이 되기 전에 요절했을 것이다. 아마도 진나라말기의 전쟁국면도 달라졌을 것이다.

 

당연히 진왕조를 망하게 한 원인은 여러가지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원인은 육국이 막 멸망했고, 육국의 백성들의 심리적 동일성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고, 여전히 옛나라를 그리워하는데, 진시황의 관용과 인자는 한꺼번에 그들로 하여금 생각을 바꾸게 만들지 못했다. 진시황의 여러가지 인자한 행위는 육국의 귀족자제들로 하여금 상당한 활동여지를 가질 수 있게 만들었고, 반진복국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것이 바로 진나라가 급속히 멸망한 주요 원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