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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태평천국)

동왕(東王) 양수청(楊秀淸)

by 중은우시 2007. 4. 2.

글: 혁련발발(赫連勃勃)

 

1856년 9월 1일(함풍6년 8월 3일, 태평천국 병진 6년 7월 26일). 깊은 밤. 남경성. 동왕 양수청의 부저(府邸).

 

북왕 위창휘(韋昌輝)는 수하 3천여명을 이끌고 홍수전(洪秀全)의 밀명을 받아, 밤을 달려, 진성용(陳成瑢, 나중에 영왕이 되는 진옥성의 숙부)의 내응하에, "천경"의 남문으로 잠입한다. 일행은 말을 달려 동왕 양수청의 거처로부터 수백미터지점에 이르자, 위창휘는 따르던 수하들에게 말에서 내리게 한 후, 수백명으로 나누고, 그 자신도 100여명을 이끌고 동왕부로 향한다.

 

수문장은 오는 사람이 북왕이고, 또한 위창휘의 수중에는 천왕부에서 발급한 영패가 있었으므로 긴급한 군사상황이 발생한 것으로 생각하여 즉시 대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위창휘의 수하들은 즉시 밀고 들어갔고, 칼을 몇번 휘두르자, 동왕부의 수십명 수문병사들은 모두 객가고향사람들에 의하여 목이 잘려나갔다.

 

대문에서의 소란스러움을 들고, 동왕 양수청은 급히 수하로 하여금 등을 들게 하고, 침상에서 일으키기 싫은 몸을 일으켰다. 며칠동안 승전보가 계속 날아들었고, 태평천국군의 적수인 향영도가 화가 나서 자살했다는 말을 듣고 양수청은 아주 자부심을 느꼈다. 어제 밤에는 몇 잔의 서양포도주를 마시고, 상품 아편을 몇번 들이마셨더니, 아주 편안했다. 그런데 갑자기 깨고나니 영 불쾌했다. 그는 생각하기를, "아무리 군정이 급박하기로서는 어찌 감히 본왕 구천세(금방 만세가 될 예정임)의 꿈을 깨운단 말인가"

 

양수청의 침실은 매우 넓었다. 약200평방미터가량 되었다. 대침전이라고 할 수 있다. 실내에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남목(楠木)가구가 놓여 있었고, 곳곳에 기진이보가 전시되어 있었다. 가장 기이한 것의 하나는 동왕의 침상을 둘러싼 몇 두의 진주로 엮어서 만든 주장(珠帳)이었다. 이것은 천왕 홍수전도 하나를 가지고 있었으며, 모양도 똑같은데, 다만 위에 큰 야명주 한 개가 더 박혀 있었다. 다른 하나는 거목향목상인데, 사방에는 아주 투명하고 아름다운 유리로 어항을 만들었다. 이것은 당시에 아주 귀한 물건이었다. 여러개의 컨 백수정유리로 벽을 만들고 가운데 물을 넣어서 수백마리의 진귀한 금붕어를 기르고 있었다. 큰 촛불이 비치자, 어항과 진주장은 번쩍거리고 있었으며, 사방으로 빛을 뿜었다.

 

동왕은 평소에 위세를 부리기 좋아했다. 12명의 절색미인들로 "전선(傳宣)"을 삼아, 자기의 좌우에 두었다. 북왕이 배알하러 온다는 말을 듣고, 이 여자들로 하여금 가장 빠른 속도로 신발과 옷을 갈아 입히게 하였고, 침전의 앞으로 가서 북왕을 맞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북왕과 그를 따르는 자들은 살기등등했고, 온 몸에 핏자국이었으며, 오자마자 바로 칼을 뽑아서 휘둘렀고, 12명의 미녀는 그 자리에서 목이 달아났으며, 선혈은 전내외의 누런 비단을 적셨다.

 

동왕 양수청은 문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는, 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자세히 처다보려고 했다. 두 발을 막 땅에 닿자, 주렴을 들치고 들어서는 자는 바로 평소에는 자기 앞에서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하던 북왕 위창휘였고, 얼굴에는 분노의 빛을 띠고 있었다.

 

양수청이 소리도 지르기 전에, 칼은 그의 가슴을 뚫고 들어왔다. 위창휘는 한 걸음을 내디디서 동왕의 머리카락을 잡고, 칼을 꺼내서 힘을 주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는 동왕 양수청의 수급이 잡혀 있었다.

 

북왕 위창휘는 길게 탄식을 한 다음에, 동왕 양수청의 수급을 어항속에 던져넣었다. 무수한 촛불과 경태랑유리등아래에서 동왕 양수청의 수급은 어항속에서 천천히 가라앉았다. 선혈이 뿜어져 나오면서 점점 거의 얼굴에 떠오른 경악의 표정을 가리게 되었다.

 

홍수전과 풍운산을 태평천국의 이론적인 지도자라고 한다면, 진정한 중요시기에 일을 성공시킨 것은 바로 '이론'을 '실천'으로 승화시킨 사람이며, 그가 바로 동왕 양수청이었다. 금전촌(金田村)에서 무창, 무창에서 남경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청나라의 강남강북대군을 물리치기까지 이 양수청은 절대적으로 태평천국의 실질적인 의미에서 최고지휘자였다.

 

1848년에서 1856년까지, 8년간 양수청은 "천부(天父)"의 하범(下凡)을 빌어 하늘을 대신하여 "전언(傳言)"한 것이 거의 30차례나 되었고, 절대다수는 위급한 시기에 벌떡 일어나서 군심과 민심을 안정시키곤 하였다. "전언"의 내용은 방대하고 잡다하다. 종교적인 것도 있고, 군사적인 것도 있으며, 정치적인 것도 있고, 문화적인 것도 있다. 심지어 천부의 명의로 배신자, 범죄자를 잡아낸 것도 있다. 특히, 태평천국이 '천경'에 도읍을 정하기 전에 양수청의 '전언'은 태평천국의 사업에 아주 큰 역할을 해냈다.

 

양수청이 처음으로 "천부(天父)"의 혼이 몸에 붙어 "전언"을 하게 된 것은 1848년 3월 3일이었다. 당시, 자형산일대의 군중을 모아서 조직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양수청은 처음으로 바로 이런 신비스러운 일을 벌인 것이다. 만일 그가 경제가 발달한 강남지역이나 직예지역에서 이런 짓을 벌였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이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 문화가 낙후한 광서지역에서 특히 심주지역에서 이런 일을 벌이자 많은 사람들이 믿고 숭배했다. 심주일대에는 오랫동안 일종의 어린아이에 신내림한다는 미신이 있었다. 그래서 자주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게 귀신이 붙었다고 하고, 음양의 두 세계를 오갈수 있다고 하였다. 객가인의 정신적 고향인 가응(매주)에도 원래 비슷한 의식이 있었다. 객가말로는 "낙동(落童)" 또는 "낙낭(落娘)"이라고 불렀다. 심주지방에는 여러 신이 성행하여,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신선 불교 등의 신을 믿었다. 불교를 믿는 사람, 도교를 믿는 사람, 유교를 믿는 사람, 성황을 믿는 사람, 들판의 신을 믿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홍수전과 풍운산은 처음에 여러곳에서 묘와 신상을 파괴하였는데, 이는 현지 사람의 반발을 불러왔다. 일시간에 상제회는 모든 사람의 욕을 먹을 위기에 처한 것이다.

 

양수청은 머리가 있었다. 그는 아주 총명하였다. 그래서 '신내림'의 형식을 빌어, 더욱 간단하고, 더욱 원시적이고 더욱 편리하게 현지인들이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천부(하느님)"이 이 세상에 내려온 것이다.

 

"상제회" 자체가 정통기독교는 아니므로, 아무도 양수청의 신내림의 비밀을 들춰내지는 않았다. 이렇게 하여 양수청은 창조적으로 다신론의 외투를 이용하여, 일신론의 기독교관념을 집어넣은 것이다. 최종목적은 자신들이 창조한 상제회가 성공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내림은 광서일대에서는 무당이나 유랑의사, 노인들도 다 할 수 있는 일이었으므로, 양수청은 갖은 머리를 짜내서 '천부'로부터의 신내림을 자신이 독점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야 홍수전을 비롯한 사람들도 그의 '권위'를 인정할 것이기 ㄸ때문이다. 그가 '천부의 말을 전한 날'은 나중에 태평천국의 법정공휴일인 야강절(爺降節)이 된다. 원래 태평천국의 법정공휴일은 6일뿐인데 그 중의 하나이다.

 

양수청의 '전언'의 효력은 처음에 크게 성공했다. 풍운산은 계평현정부에 갖혀 있었고, 홍수전은 광서에 없을 때었다. 그리하여 상제회는 거의 소멸할 지경에 처했다. 양수청은 소조귀를 끌어들여 2인극으로 "천부(하느님)"와 천형(예수)"이 세상에 함께 내려온 것처럼 연기했다. 우매한 민중은 바로 믿었다. 양수청은 위급한 시기에 민중의 마음을 붙들었을 뿐아니라, 유일신인 '상제'에 대한 절대성을 선양했다. 이어서 홍수전의 대체불가능한 '교주'로서의 지위가 확립되었다. 그 때의 양수청은 단번에 '천부'로 변신하여 '각자 너희들 주인을 위하여 진짜 도를 행하고, 천부를 믿고 절대 의심하지 말라'고 하였다.

 

동시에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필요에 응하여, 양수청의 '전언'은 여러가지 특색을 띄게 된다. 공자맹자를 공격해야 할 때는 그는 "천부가 하강하여 사악함을 없애고 정의를 바로세우려한다"고 하고, 공자맹자사상을 이용해야 할 때는 "군주는 신하를 예의로 대하고, 신하는 군주를 충성으로 대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비록 그 자신은 어릴 때 영양실조로 한쪽 눈을 실명했지만, 양수청은 '천부'의 신분으로 그 자신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대신 병을 앓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가 병을 얻은 것마저도 자신의 고상함에 이용하는 것을 보면 그는 천부적인 혁명선동가이다.

 

태평군이 강성해지면서, 양수청의 "천부하범"은 갈수록 권위성과 강제성을 갖게 되었다. 왕왕 '천부'의 이름으로 재판하고, 살인하고, 모마분시하기도 하고, 천등을 켜기도 하여, 상제회의 사람들에게는 경외하는 존재가 되고 있었다. 심지어 1851년의 영안반란때에는 양수청이 '천부'의 혼을 빌어서 주석능에 대하여 심판한다. 이런 것들은 태평천국의 병사들로 하여금 곳곳에 천부(하느님)가 존재한다고 믿게 하였고, 못하는 것이 없다고 믿게 하였다. 그래서, 이처럼 큰 정신적인 역량이 지탱해주므로, 태평군은 초기에 정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통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상제를 따라서 요마를 척결하러 가는 것이므로 천하무적이었다.

 

천왕 홍수전에게 있어서도, 양수청의 '천부전언'은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정신적인 지주였다. 1851년 그는 동향에서 왕을 칭했다. 바로 양수청이 '천부'를 대신하여 말을 전한 것이다. "나는 너희 주인을 내려보내서 천왕이 되게 하였다. 그가 내리는 명은 하늘의 명이니 너희들은 반드시 따르라. 너희들은 진심으로 주인을 받들고 왕을 돌보아라. 대담하게 방자해서는 안되고, 소홀히 해서도 안된다" 이렇게 하여, 상제회의 무리들(홍수전을 포함하여)은 모두 양수청의 한 사건을 보고 믿게 되는데 바로 1851년 년말의 한가지 사건이다. 당시 청나라의 장관 오란태(烏蘭泰)는 광주에서 부도통으로 있었는데, 적지 않은 서양의 물건을 받아들이고, 사람을 보내어 가짜로 태평군에 투항하였다. 서신을 보내고 예물을 태평군의 군영에 보냈다. 양수청은 서신을 찢어서 보고, 예물이 뭔지를 살펴오더니, 그안에 뭔가 낌새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리하여 오란태가 보내온 물건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즉시, 눈을 깔았다가 다시 쓰면서 '천부'의 말투로 "이 안에는 폭약이 있으니 여러 사람은 조심하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군사들이 오란태의 예물을 군영바깥으로 들고나가 도랑에 버렸는데, 역시 폭발성이 일어났다. 이리하여 튕긴 쇳조각 때문에 풍운산의 어깨의 살이 한점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홍수전등 다른 사람은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이 일이 있고난 후, 홍교주 까지도 양수청을 '천부'로 대하게 된다.

 

이러한 장난의 효과는 아주 컸다. 양수청은 마음 속으로 득의했고, 그 이후의 모든 입법이나 제도를 만들 때 '천부'의 입을 빌어 원하는대로 했다. 점차, 양수청은 '전언'을 통하여 자신을 신격화하기 시작했다. "동왕이 우리 형제자매를 때리는 것도 우리를 잘되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 형제자매를 죽이는 것도 우리를 잘되라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을 무서운 말이다. 누구를 죽이는 것이 그 누구를 잘되게 하는 것이라니. 어쨌든 하늘의 법은 공정하고, 천부는 잘못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은 모두 하늘의 뜻인 것이다.

 

남경에 도착한 후, 양수청의 하늘을 대신한 '전언'은 그의 특권을 만들고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홍수전의 둘째형인 홍인달(洪仁達) 조차도 그는 '천부'의 이름을 빌려 이 '황형'을 두들겨팰 수있게 되었다. 북왕 위창휘, 익왕 석달개등은 모두 두려워했고, 매번 양수청이 '공연'할 때마다 바닥에 엎드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땀을 얼굴 가득히 흘리곤 했다. 동왕이 '천부'의 이름을 빌어 자기를 죽이지나 않을까 걱정할 정도였다.

 

1855년에 반포된 <<행군총요>>에는 양수청은 기본적으로 자신을 거의 '천부'의 지위로 올려놓게 된다. 양수청은 그 자신을 거의 '태어나자마자 깨달은 사람'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양수청은 자신은 이인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은 것이다.

 

1853년말, 홍수전은 후궁을 가혹하게 때리게 되는데, 양수청이 이를 보고 참지 못했다. 그래서 '천부'의 혼이 들어온 것처럼 하여, 홍수전의 행위를 비난했다. 천왕 홍수전은 할 수 없이 "앞르로는 모든 일을 반드시 형제들과 상의한 후 처리하겠다"는 말을 하게 만든다.

 

오래지 않아. 군중의 한 백성이 호기심으로 홍수전의 군장안으로 들어갔다가, 야간에 홍수전과 후궁들이 노는 것을 보게 되었다. 홍수전에게 발각된 후 그는 바로 묶여져서 목이 잘렸다. 양수청은 이에 대하여도 불만을 가지고, '천부'로 변신하여 홍수전을 책망했다. "너는 형제와 함께 강산을 얻었으면서, 살인의 큰 일을 왜 넷째동생과 상의하지 않는가. 이는 중죄를 받아 마땅하다" 즉, '천부'는 양수청의 손을 빌려 홍수전의 엉덩이를 때리겠다는 것이었다. 홍수전은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고 잘못을 인정하고, 매를 맞겠다고 한다. 북왕, 익왕등이 나서서 무릎을 꿇고 천왕을 대신하여 매를 맞겠다고 간청한다. 자기의 목적이 달성된 것을 보고 양수청은 그제서야 손을 거둔다. 청나라의 관리는 이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무릇 옛날에 반역하는 자들은 말로에 신하에게 제압당하거나, 찬탈당하거나, 묶이거나, 살해당한자들은 많다. 그러나 무릎을 꿇고 매를 맞겠다고 하고서도 여전히 왕의 지위에 있던 것은 황당한 어린애 장난이다. 정말 개미떼들보다 못하다"

 

남경을 수도로 정한 후, 태평천국의 일체의 군국대권은 양수청 일인의 손에 장악된다. 그저, 동전상서 후겸방, 이수춘등만이 계획에 참여할 뿐이었다. 모든 자잘한 일까지도 동왕부에 보고된 후에 집행되었다.

 

가난한 사람이 벼락부자가 되면 과시하기를 좋아한다. 양수청은 본인이 높이 앉았을 뿐아니라, 외출할 때도 크게 떠들었다. 매번 따르는 사람이 천여명이고, 성대한 의장행렬을 이끌었다. 제일 앞에는 "동룡"이라는 글을 써서 길을 열었다. 양수청 본인은 50인이 매는 가마를 타고 다녔다. 양수청의 종교적인 직함은 아주 기괴했다. 권위사(勸慰師), 성신풍(聖神風)이었다. 요즘의 게임개발자들은 온갖 이상한 이름을 갖다 부치기를 좋아하는데, 사실 태평천국의 관직서류를 뒤적여보면, 그 위에는 온갖 재미있고 이상한 이름들이 많다. 대부분은 지금 게임들에 그대로 써도 될 정도이다.

 

태평군이 청나라의 강북대영, 강남대영을 무찌른 후, 양수청은 완전히 자기의 업적에 도취된다. 그리하여 자기의 "구천세"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역시 '천부'가 내려온 것처럼 하여 홍수전을 불러서 여러 신하들 앞에서 훈시를 내린다. "너와 동왕은 모두 나의 아들이다. 동왕이 큰 공로가 있는데 왜 그냥 구천세에 머물러 있는가"

 

홍수전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마음 속으로 불만이 많았지만, 역시 어쩔 수 없었다. 양수청의 밑바닥을 드러내게 하는 것은, 자기의 밑바닥을 드러내 보이는 것과 같았다. 할 수 없이 "동왕이 강산을 얻었으니, 당연히 만세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천부"는 한걸음 더 나갔다. "동세자(양수청의 아들)도 왜 천세에 머물러 있는가" 홍수전은 "동왕이 이미 만세가 되었으니 세자도 역시 만세가 되어야지요. 후손대대로 모두 만세가 되어야지요" 천부는 가가대소를 하고 "그러면 좋다. 나는 천당으로 돌아가겠노라"라고 하였다.

 

홍수전도 머리를 굴렸다. 즉석에서 양수청을 '만세'에 봉하지 않고, 이 일은 융중하게 하여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다음 달 즉 9월 23일에(함풍6년 8월 25일, 태평천국병진6년 8월17일) 양수청의 생일때 정식으로 만세에 봉하기로 하였다.

 

양수청은 매우 기뻐했고, 그래서 바로 홍수전에게 말했다. "내가 만세가 되면, 당신은 당연히 만만세가 되어야지요" 홍수전도 기뻐하는 척하였고, 두 사람은 그렇게 헤어졌다. 태평천국의 제도상으로 양수청이 스스로 '만세'가 되려한 것이 대역무도한 일인가? 그렇지는 않았다.

 

태평천국은 홍수전과 양수청이 만든 새로운 것이었다. 이전의 중국사회의 윤리도덕과는 많이 달랐다. 각왕조에 만세는 원래 딱 1명씩이었다. 그러나, 태평천국에는 "주(主)"가 다섯이고, "만세(萬歲)"가 여덟명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인정한 것은 "천부상제(天父上帝)"만이 "제(帝)"를 쓸 수 있으므로, 처음으로 의거를 일으킨 여섯 명은 모두 "왕(王)"으로 칭했다. 이는 홍수전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여섯 왕중에서 홍수전의 천왕(天王)이 제일이었다. 양수청은 비록 제2이지만, 다른 제왕을 통제했다. 나머지 4왕은 각각 자기의 땅을 관할했다. 상제회의 규칙에 따르면, '천왕'과 다른 다섯 왕과는 형제관계였다.(단지 서왕 소소귀는 황제의 사위신분이었다). 그래서 5왕은 홍수전을 "이형(二兄)"이라고 칭하고(큰형은 예수이다), 그를 성상 이나 주상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홍수전은 양수청을 청포(淸胞)라고 불렀고, 석달개는 달포(達胞), 위창휘는 정포(正胞)라고 불렀다. 그들 몇 사람이 식사를 할 때도 함께 연회에 앉아서 식사했다.

 

태평천국의 오주(五主)는 바로 천부 "상주황상제(上主皇上帝)", 예수 "구세주(救世主)", 홍수전 "진성주(眞聖主)", 홍수전의 아들 홍천귀복 "유주(幼主)", 양수청의 "속병주(贖病主)"가 그것이다. 이런 이론에 따르면, 양수청이 '만세'라고 부른다고 하여 그것이 참월하는 것도 아니었다. 소위 태평천국의 8명의 만세는 태평옥새에 나타나 있다. 그 위에 "팔위만세(八位萬歲), 은화인집(恩和仁輯), 영정건곤(永定乾坤), 영석천록(永錫天祿)"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여덟 만세는 바로 상제, 예수, 홍수전, 홍수전의 아들 홍귀천복외에 홍수전의 또 다른 두 아들인 홍천광, 홍천명, 그리고 양수청과 소조귀를 가리킨다. 그리고 1852년의 <<천조서(天條書)>>에서는 "상제를 천성부로 찬미하고, 예수를 구세주로 찬미하며, 성신풍을 성령으로 찬미하며, 삼위일체의 진신을 찬미한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의 "성신풍"과 "성령"은 동왕 양수청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로써 그의 상제교내에서의 지위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홍수전도 이런 글을 쓴 바 있다. "동왕은 상제의 아끼는 아들이다. 천형 및 짐과 같은 어미의 소생이다. 셋은 모두 일맥의 친인이다" 그의 노력으로 양수청은 죽기 전에 "삼수일주(三帥一主)"의 지위에 오르는데, 바로 화내수(禾乃帥), 권위사, 좌보정군사(左輔正軍師), 속병주를 가리킨다.

 

이로써 볼 때, 양수청이 스스로 '만세'에 올랐다고 하더라도, '만만세'인 홍수전을 몰아낼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만일 이런 야심이 있었다면, 양수청은 자신이 장악한 권력과 '천부'의 말을 이용하여, 직접 홍수전을 죽여버릴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간편했다. 당시 '천경'의 실제상황을 보면, 군권을 장악한 동왕이 천왕을 죽이는 것은 쉬웠겠지만, 구중궁궐에 들어앉은 천왕이 동왕을 죽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양수청의 개인적인 욕심이 팽창한 것은 사실이겠지만, 천왕을 시해하려는 계획은 세우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홍수전은 태평천국의 상징이자 부호였다. 그를 죽여버린다면, 전체 태평천국의 이론기초가 사라지는 것이다. 아주 총명했던 양수청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