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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초기)

포송령(蒲松齡)의 <<풍부행장(馮溥行狀)>>

by 중은우시 2009. 11. 23.

글: 장미이(張未弛)

 

<<요재지이(聊齋誌異)>>로 세상에 유명한 포송령은 글재주가 있을 뿐아니라, 아이디어도 풍부했다. 일찌기 풍국로(馮國老)의 <<행장>>을 쓰는데 있어서 그는 비범한 재주와 예지를 보여준 바 있다. 이 이야기는 지금도 산동의 문단에 널리 전해지는 이야기이다.

 

청나라 강희0년 십이월 십일일, 전 문화전대학사이며 '국로'라고 불리우던 임구(臨)사람 풍부(馮溥)가 청주(靑州)에서 병사했다. 장례를 융중하고 체면을 상하지 않게 치르기 위하여, 그의 가족들은 청주부의 관할범위내에 유명한 인물을 찾아서 <<풍부행장>>을 써도록 부탁하려 했다.

 

풍부는 원래 명나라 숭정십이년의 거인(擧人)으로 왕조가 바뀐 후에 청나라 순치3년에 진사가 된다. 그리고 청나라조정에서 청나라의 관직을 맡았다. "충신불사이군"의 전통적인 관념대로라면, 풍부는 명나라에서 거인의 공명을 받았으니, '불충'이라고 볼 수 있다. '불충은 바로 간영(奸)이다. 그리고, 행장은 현대의 '추도사'와 같은 것이어서, 죽은 자의 좋은 일은 찬송하지만, 단점을 들추어서는 곤란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청주부의 문인들은 모두 풍부의 일생은 복잡하여 도저히 변통해서 포장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서, 행장을 쓰는 것을 사절했다.

 

풍부의 부정부인인 피부인은 "돈이 얼마 들더라도 좋으니 행장을 잘 써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의 비웃음을 사지 않지 않겠는가?" 그러나, 청주부내의 유명한 문인들은 모두 쓸 수 없다고 하니, 누구에게 부탁할 것인가? 그때 누군가가 제안했다: "치천부(淄川府)의 포송령이 두뇌가 총명하고, 문장실력이 뛰어나니, 아마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하여 피부인은 집안사람을 시켜 치천부로 포송령을 찾아가서 부탁하게 한다.

 

풍부의 집안사람이 치천의 포송령의 집에 도착하자, 포송령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내가 이미 다 써놓았다. 지금 처가집에 보관되어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시 포송령의 처가집으로 달려갔다. 그들이 온 뜻을 설명하자, 포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집의 선생이 쓴 것은 내가 보관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은자 삼백냥이 필요하다. 우리 집의 선생은 집안이 가난해서, 나를 먹여살리지 못한다. 그래서 그가 쓴 글을 나보고 팔아서, 먹고 살게 하려는 것이다. 돈을 내놓지 않으면, 글을 내놓을 수 없다."

 

풍씨의 집안사람은 어쩔 수 없이 삼백냥은자를 내놓는다.

 

포부인은 돈을 받은 후에, 서랍 속에서 종이를 한 장 꺼내 놓는다. 풍씨집안사람은 의심을 가지고 그 종이를 넘겨받았다. 그런데, 그 종이에는 딱 두마디가 쓰여 있었다.

 

살아주자, 시아구(殺我主者, 是我仇)

살아구자, 시아주(殺我仇者, 是我主)

 

나의 주인을 죽인 자는 나의 원수이고,

나의 원수를 죽인 자는 나의 주인이다.

 

이 뜻은 결국 나의 주인 즉 명나라황제를 죽인 자인 이자성은 나의 원수이고, 나를 대신해서 나의 원수인 이자성을 죽인 자(청나라)는 나의 새로운 주인이라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풍부가 청나라에서 관직을 지낸 것은 시세를 따른 것이 되니, 간신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많은 문인들이 쓰지 못했던 풍부에 대한 평가를 포송령의 두 마디로 교묘히 변통해서 표현하게 된 것이다.

 

풍씨집안사람은 그것을 보고는 바로 깨닫는 바가 있었다. 기뻐하며 그 종이를 가지고 청주로 돌아간다. 이렇게 하여 <<풍부행장>>을 완성할 수 있었고, 체면이 상하지 않는 장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