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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심리

잠복: 중국인의 권모술수

by 중은우시 2009. 9. 7.

글: 도동풍(陶東風)

 

드라마 <<잠복(潛伏)>>이 방영된 후 좋은 평가를 받고, 텔레비전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얼마전에는 "비천상(飛天奬)"까지 받았다. 드라마의 남자주인공 여칙성(余則成)은 국민당의 내부에 잠입한 중공지하당원이다. 자신의 지혜와 수완을 이용하여 국민당 특무(特務)계통의 복잡한 권력 네트워크사이를 누비면서 큰 공을 세운다. 정치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단순히 성격을 보자면, 이 자는 지략을 잘 쓰고, 속을 숨기고 드러내지 않으며, 속이 깊다. 아무도(심지어 부인까지도) 그가 속으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는 겉으로 드러난 표정과 마음 속의 생각이 전혀 다르다: 더이상 살고싶지 않다고 괴로워할 때 마음 속으로는 기뻐하고, 만면에 미소를 띄고 있을 때 살기를 품고 있으며, 아무 일도 없는 듯이 행동할 때 마음 속은 놀라서 벌렁거리고,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얼굴에는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다. 결론적으로, 이 사람은 너무나 복잡해서 누구도 그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여칙성 본인, 여칙성의 역을 연기한 연기자가 아니라)는 천재적인 연기자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 드라마를 본 느낌은 아주 복잡하다. 적을 대할 때에는 여칙성의 이런 수단이 합법성과 정당성을 지닌다. 그러나, 나는 왜 오늘의 평화시대에 '자기사람'들을 대하면서도 여칙성과 같은 사람들이 여전히 낯설지 않고, 전형적이라고 느껴질까? 특히 관료사회에 있어서. 평론가 왕간(王干) 선생이 블로그에 <<잠복에서 말하는 것은 관료사회의 잠규칙(潛規則, 숨은 규칙)이다>>라는 글을 발표하자 클릭수가 엄청나고, 공감하는 사람이 수도없이 많아진 것도 이해가 된다. 그 글에서는 <<잠복>>을 통하여, "남자들은 관장(官場, 관료사회)을 보고, 여인들은 직장(職場)을 보며, 정인들은 정장(情場)을 본다"고 하였다. <<잠복>>이 성공한 이유는 첩보드라마에 '관료소설의 요소를 섞어넣었다. 즉, 여칙성은 지하공작의 영웅일 뿐아니라, 관료사회에서, 그는 바람부는대로 방향을 바꾸는 사람이다. <<잠복>>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단순히 지하공작의 어려움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은 관료사회의 험악함과 무수한 잠규칙이다." 이에 대하여, 어떤 네티즌은 이렇게 말한다: "맞는 점이 있다. 어제 나는 나의 생활이 여칙성을 닮았다고 말했다. 현재 생각해보면 바로 내가 출근할 때 다르고, 퇴근할 때 다르며, 사람들의 앞에서 다르고, 혼자 있을 때 다르다. 매일 거짓으로 사는 것같다" 원래 <<잠복>>이 인기를 끈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래서 최근들어 인기를 끌었던, "제왕드라마", "청나라궁중드라마"를 떠올렸다. 이들 소위 "역사드라마"는 비이성적인 권력숭배, 인치관념, 청백리컴플렉스를 표현하는 외에, 국민성에 잠재적이고 깊은 영향을 준 요소 즉 권모술수를 그리고 있다.

 

제왕드라마의 핵심주제는 중국특색의 권력투쟁이다. 이런 권력투쟁의 특징은 현규칙(顯規則, 드러난 규칙)이 아니라 잠규칙(숨은 규칙)이거나, 현규칙이 이름만 남고 실질은 없게 되며, 잠규칙이 대거 횡행한다. 현규칙은 종이에 쓰여 있고, 입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중요하지만, 실제로는 중요하지 않다. 장식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잠규칙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말로 할 수는 없고, 그저 행동으로 할 뿐이다. 중요성에 대하여는 모두가 알고 있고, 서로 말을 안해도 안다. 실질적으로 사람의 행위를 제약하고 있고,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 이 특징이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궁중투쟁에서이다. <<강희왕조>>, <<소년천자>>이건, <<대한왕조>>, <<대명청자>>이건 궁중의 풍운이 궤이하고 비밀스럽다고 느끼지 않는 경우가 없다. 특히, <<강희왕조>>는 권모술수라는 주제를 극단으로 묘사했다. 극단적이고 복잡한 궁중투쟁은 마침내 소위 일대의 성주(聖主)를 만들어 낸다. 권모술수를 잘 구사하는 것이 '성세명군'의 필수기술이 되었다. 그리고 궁중에서 굴러먹으려는 모든 대신들이 반드시 익혀야 하는 과목이기도 하다.

 

이런 권모술수문화는 중국에서 유래가 길고, 지금까지도 중국의 정치생활과 백성들의 일상생활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이는 우리의 소위 '생존지혜' '실천이성'으로 전화되었다. 오랫동안 권모술수문화의 훈도를 받아서, 상당한 일부 사람들의 두드러진 특색(즉, 국민성)이 되어 버렸다. 노모심산(老謀深算, 계책과 지략이 노련하고 깊이있다), 장이불로(藏而不露, 깊이 숨기고 드러내지 않는다), 궤계다단(詭計多端, 속임수가 다양하다), 소년노성(少年老成, 어린 나이에 늙은이같다). 뱃속에는 모두 간사한 계책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서방사람들과 직접 간접적으로 마주하는 과정에서, 아주 강하게 느낀 점이 있다. 중국인은 외국인들보다 훨씬 복잡하다. 말하거나 일하는데 에둘러서 하고, 직접적으로 하는 경우가 드물다. 이것이 오래되다보니, 서방인과 중국인의 안목도 달라지게 된다. 서방인들의 안목은 직설적으로 단순하다. 마치 아이의 눈과 같다. 그러나 중국의 아이는 10살도 되기 전에 눈빛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오히려 교활, 방범(防范), 경계, 산계(算計)로 충만하고, 그 복잡한 정도가 여칙성과 같은 '인정(人精)'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나는 매국하자는 것도 아니고, 인종주의자도 아니다. 나는 중국인의 이런 복잡성이 천성적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소위 "국민성"은 사실 모두 제도, 환경 및 문화의 산물이다. 서방인들의 단순과 '잔머리를 굴리지 않는 것'(물론 상대적이다)도 천성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회문화환경 특히 법제의 결과이다. 법제사회는 명문규정에 따라 일처리가 되는 사회이다. 비록 잠규칙이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주요한 작용을 하는 것은 현규칙이다. 모두가 무엇은 할 수 있고, 무엇은 할 수 없는지 안다. 할 수 없는 일은 아무리 우회적인 방법이나 사람을 찾아도 소용이 없다. 이렇게 오래 살다보니 단순하고 직설적인 성격이 길러지는 것이다. 즉, 제도에 빈틈이 있더라도 그 빈틈을 이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상황은 정반대이다. 명문으로 규정한 규정은 위로는 법률부터 아래로는 각종 정책법규까지, 절대적인 것이 없다. 할 수 없는 일도 관계를 동원하면 되기도 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이해가 된다: 중국에서 명문으로 규정한 것은 모두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저 네가 가서 잘 처리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모두 명문규정이 없다. 이것은 네가 머리를 굴려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사람들은 머리를 굴리고, 우회적으로 처리하는 성격이 길러지게 된다. 과학자들처럼 윤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연구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여야 우회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그중에서 수완이 뛰어난 사람들은 왕왕 명문규정으로 있는 내용을 손바닥위에 올려놓고 가지고 논다. 우리가 드라마에서 보는 '영명한 군주'는 모두 이런 사람이 아니었던가? 오래되다보니, 중국의 문화에는 기형적인 사람됨의 원칙이 생겨난다. 복잡한 것을 찬미하고 단순한 것을 폄하한다. 바람이 부는대로 방향을 돌리고, 지략이 깊고 숙련된 사람을 '인정을 안다' '일처리가 노련하다'고 칭찬한다. 오히려 단순하고 정정당당한 사람에 대하여는 '바보기가 있다' '유치하다'고 폄하한다. 이런 현상의 배후에는 엄중한 가치혼란과 권력숭배의식이 숨어 있다: 설사 진리에 위배되고, 정의와 양심을 포기하더라도 권력을 어겨서는 안된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없는 것이 진리, 양심과 정의이다.

 

바로 복잡성이 제도의 산물이므로, 우회적인 권모술수를 아주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일지라도, 부득이 우회적인 권모술수를 고통스럽게 배워야 한다. 이것은 중국인들이 살기 힘들다고 느끼는 주요한 원인이다. 체력적으로 힘든 것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힘들다. 과학연구를 하기 위해서 머리를 쓰느라고 힘든 것이 아니라, 관계를 처리하고 권모술수를 쓰느라고 힘든 것이다. 특수한 전쟁시대에 적과 마주하기 위하여 우리는 여칙성의 총명과 복잡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평화시대에 친구(국제적인 우인포함), 동료, 이웃들과 마주하는데에는 우리가 보다 단순해지고, 솔직해져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