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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기업가

중국에서의 자본가 지위의 변천

by 중은우시 2010. 3. 15.

글: 양려광(楊黎光)

 

아래의 글은 중국에서 1970년대이후에 출생한 사람이라면 아마도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래 글은 바로 1968년 5월 23일자로 <<천진일보>>에 보도된 것이다. 제목은 <<투기전매분자를 박살내자>>라는 제목인데,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최근, 광대한 혁명군중의 고발로 투기전매상습범, 깡패분자인 XXX가 이미 체포되어 입건되었다. 이 투기전매상습범, 깡패분자는 오랫동안 상해, 심양등 십여개 도시의 한줌도 안되는 무리의 지(地), 부(富), 반(反), 괴(壞), 우(右)분자, 반동자본가 및 투자전매상습범으로 투기전매활동을 대거 벌여왔고, 미친듯이 사회주의 경제건설을 파괴해왔다. 일찌기 공안, 공상관리부문에 여러번 체포되어 구속된 적이 있다. 특히, 무산계급문화대혁명활동중에 이 나쁜 놈은 말일이 다가왔다는 것을 예감하고, 프롤레타리아독재에 대한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품고 더욱 활동을 강화했다. 그는 그의 자녀를 시켜 일부 외지 주민, 군중을 선동하여 천진으로 와서 일부 일용품을 앞다투어 구매하거나, 모조리 구매하도록 한 다음, 도처에 다니면서 전매해서, 폭리를 취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심각하세 시장질서를 교란시켰다...."

 

위의 글에서 심하게 욕하고 모욕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미친듯이 사회주의 경제건설을 파괴'하였다는 '투기전매활동'은 사실 우리 인류역사상 가장 원시적이고, 가장 정상적이며, 가장 필수불가결한, 지역간무역, 유통일 뿐이다.

 

그 시대에 군인 이외에 전체 국가는 4종류의 사람으로 구성되었다: 하나는 국가간부, 하나는 국가노동자, 하나는 국가농민, 나머지는 사류분자(四類分子), 즉 국가의 공적이다.

 

그러나, 어떤 시대에도 "혁명"을 상시화할 수는 없다. 끝도없이 이어지는 혁명활동은 이 동방의 대국을 거의 붕괴의 지경으로 몰고갔을 때, 전국민이 사업을 하고, 돈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신조류가 다시 '혁명'의 열정으로 전국을 석권하기 시작한다. 건국후 근 삼십년동안 억눌려온 사람들은 부를 추구하고, 향락을 추구하는 본능이 활화산처럼 분출했다. 1978년부터 지금까지, 다시 삼십년의 발전변화를 거쳐, 지금의 중국상인들은 이미 상대적으로 강자인 사회집단이 되었다.

 

역사는 다시한번 황당한 윤회를 겪었다. 그러나, 한 세대의 엘리트를 육성하는 것은 한 세대의 엘리트를 소멸시키는 것보다 확실히 어렵다. 장건, 노작부를 대표로 한 민국시기의 양대 지식인형상인이 철저히 소멸되었는데, 현재의 상인들이 그들의 인격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먼저 삼십년의 시간을 들여 자본가계급을 소멸시키고, 거의 붕괴상태까지 몰고가서, '망당망국(亡黨亡國)'의 절벽끝에서, 다시 삼십년의 시간을 들어 소위 '신생대기업가'를 탄생시켰다. 이 정치게임으로 나타난 결과는 가장 좋은 것은 소멸시키고, '골치아픈 것'만 배양해냈다. 삼십년동안 시장경제를 전면적으로 비판하다가, 다시 삼십년동안 조급하게 시장경제를 발전시켰다. 사실, 현대문명의 큰 길은 이미 거기에 펼쳐져 있었다. 네가 그 길을 가고 싶어하느냐 아니냐에 따르는 것이다. 네 발로 그 길을 가느냐 아니냐의 문제만 남았다.

 

소멸이건 소생이건 모두 권력을 가지고 사회발전규율을 무시한 극단적인 과정일 뿐이다. 그들은 모두 도덕도 필요없었고, 규칙도 지키지 않았다(아예 규칙이 없었다고도 할 수 있다). 난세에 영웅이 사방에서 나타나고, 소생한 '신생대기업가'는 역사상의 반란자들과 마찬가지로 야만적으로 생장했다.

 

이런 야만적인 생장의 가장 좋은 예는 한때 풍운을 질타했던 소위 '중국최고부자'인 모기중(牟其中)이다.

 

1999년, 신구양세대가 교체할 때였다. 1월 7일, 공안부의 직접 지휘하에, 무한, 북경의 경찰이 협조하여, 모기중 본인 및 사건관련인원에 대한 체포활동에 들어간다. '중국최고부자'는 감옥에서 21세기를 맞이한다. 2000년 8월 22일, 호북성 고급인민법원은 남덕경제집단 및 그 총재 모기중에 대한 신용장사기사건에 대하여 최종판결을 내린다: 남덕경제집단 및 그 법인대표 모기중등의 상소를 기각하고 1심을 유지한다. 남덕경제집단 및 그 법정대표인 모기중등은 장기간 국가자금을 불법점유하면서, 타인과 공모하여, 허위화물수입등의 행위를 취하여, 신용장사기를 벌였고, 불법적으로 6.2억위안의 자금을 획득하여, 2.9억여위안의 경제손실을 가져왔다. 금액이 특별히 크고, 정황이 중대하고, 국가금융관리질서를 심각하게 파괴하였다. 그 행위는 모두 신용장사기죄에 해당한다. 남덕경제집단은 벌금 500만위안에 처하고, 피고인 모기중은 신용장사기죄로 무기징역에 처하며, 정치권리를 종신박탈한다.

 

당초 사람들에게 떠받들어지던 '중국최고부자'도 좋고, 나중에 사람들에게 질책받는 '중국최고사기꾼'도 좋다. 이것은 모두 전면적이고 객관적으로 모기중이라는 사람을 개괄하는 말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중국'특색을 지니고 있다. 그는 특별히 성공을 갈망한 사람이고, 특별히 생존현상을 바꾸고자 한 사람이며, 사회최하층에서 온 중국인이다. 그는 현실에 만족하지 않는 성격과 세번에 걸친 투옥경험으로 혁명시대에서 치부시대로의 사회변천을 반영한다. 그리고 그의 성공에 대한 미친듯한 추구를 엿볼 수 있다.

 

1999년 12월, <<인민일보>>의 부간 <<대지>>는 동방명, 소용의 글인 <<만현인이 모기중을 평하여 말하다>>라는 글을 실었다. 거기에는 모기중의 초기 분투사를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1974년 봄, 이때의 모기중은 만현 청년중에서 명성이 혁혁하였다. 그는 생각이 활발하고, 정치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당시 정치에 대한 열정은 나중의 경제에 대한 열정에 못지 않았다. 그와 같이 정치적 열정을 품은 청년들은 스스로 '마르크스레닌주의연구회'를 조직한다...그러나 모기중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게도, '마르크스레닌주의연구회'는 나중에 반혁명조직으로 규정되고, 모기중은 사형이 내정된다(최종적으로 집행되지 않았다).

 

1979년말, 옥중에서 4년 4개월을 보낸 모기중은 명예회복되어 석방된다.

 

1982년 4월, 모기중은 다른 사람과 합자로 '만현시중덕상점'을 연다. 모기중이 상점경리를 맡았다. 당시 점포는 가련할 정도로 작았지만, 첫해에 그들은 놀랍게도 8만위안의 이윤을 얻는다. 1983년, 모기중은 중경의 한 병기공장에서 최저가격으로 구리로 만든 종을 산다. 그후에 상당히 높은 가격으로 상해의 여러 상점에 판매한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그는 엄청난 폭리를 취한다...

 

1983년 9월 17일, 중덕상점은 '투기전매, 공매매'등의 죄명으로 조사받고 문을 닫는다. 모기중은 다시 재판을 받는다. 모기중은 옥중에서 11개월을 보낸 후, 다시 석방된다.

 

이것은 모기중이 두번째로 감옥에 들어간 것이다. 그 '투기전매, 공매매'라는 죄명은 확실히 시대에 맞지 않았다. 북경의 매체가 개입하면서 그는 천하에 이름을 날리게 된다. 이 소송은 '한 개체호가 타격을 받은 사건'으로 알려지면서 전국에 유명해진다. 그 본인은 '수용소에서 나온 개척자'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1985년초, 모기중은 그 자신을 '개혁의 스타'라고 자처하며 자가발전시킨다.

 

1984년 8월 31일 모기중이 출옥한 후, 즉시 큰 일을 벌인다. 1984년 9월 18일, 모기중은 중덕복업간담회를 급히 개최한다. 10월 5일, 다시 감옥에 들어가기 전의 중덕상점을 중덕무역공사로 개조한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중덕실업개발총공사로 변모시켜 공상세무등록절차를 마치고, 영업집조를 취득한다. 이외에 그는 '소삼협관광개발주식유한공사', 중덕복장공업공사, 중덕죽편공예공장, 중덕네온등인테리어미술공사등을 설립한다. 그러나, 모두 용두사미로 흐지부지 끝난다. 나중에 모기중은 만현을 떠난다.

 

우리는 모기중이 만현을 떠나게 된 배경을 전부 알지는 못한다. 그가 만현을 떠나게 된 내심의 동기까지 추측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가 만현을 떠날 때, '실업' 혹은 '상업'에서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몇년후, 북경, 심천, 무한, 만주리...모기중의 세계는 돌연 넓어진다. '중덕실업개발총공사'라는 옛 간판은 '남덕경제집단'으로 쇄신된다. 특히 '차량500대가죽의 재고물자로 러시아에서 4대의 비행기와 바꾸는 일'이 일어난 후 그는 졸지에 '중국최고부자'로 떠오른다. 이리하여 새로운 스타탄생운동이 벌어지고, 심지어 신격화까지 진행하게 된다.

 

1997년, 즉 모기중이 '중국십대실업가'에 선정된 그해에, 전국 도시와 농촌의 서점에는 <<대륙최고사기꾼 모기중>>이라는 제목의 <<시장법제보고서>> 97증간이 나온다. 작자는 오벌(吳伐)로, 남덕집단에서 일했던 북경대학출신의 법학석사이며, 날카로운 필치로 대륙최고사기꾼이 어떻게 은행, 국유기업, 직원을 어떻게 속여넘겼는지를 기록했다.

 

이에 이르러, 모기중의 신화는 거품이 꺼진다.

 

모기중은 하나의 신화를 만들었고, 하나의 신화를 훼멸시켰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부호에 대한 태도가 열정적인 존경과 찬탄에서 냉정한 시선과 분석으로 바뀌게 된다. 2003년, 주정의, 양빈, 앙융, 뇌창성등 부호들이 속속 낙마한다. 민영기업가의 '원죄'문제가 점점 수면으로 떠오르고, 사람들 사이에 핫이슈가 되었다. 당시 국가의 국자위연구센터거시전략부장으로 장기간 중국부호문제를 연구해온 전문가인 조효는 이들 문제부호의 특징을 이렇게 분석했다: "제도적인 원인 외에, 그들중 대부분은 강호의 호걸이다. 게임규칙을 지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소속 대박을 노리는 심리상태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주로 두 가지 특색을 지니고 있는데, 첫째는 민감분야와 회색분야에서 돈을 벌어들인다는 것이다. 둘째는 법률의식이 약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부호의 문화수준이 높지 않은 것과도 관계된다. 문화수준이 높지 않으므로 그들이 스스로를 제약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범죄는 기회비용이 적게 든다. 그러다보니 손쉽게 범죄를 저지른다." "어떻게 중국의 부호들의 치부과정에서의 원죄문제를 처리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는 조효가 이렇게 대답했다: "내 생각은 한가지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 많은 민영기업가의 탄생은 하나의 숯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그것을 깨끗이 씻으려고 한다면, 최종결과는 결국 숯을 모조리 씻어버려야 할 것이다. 숯은 깨끗하게 씻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역사의 눈으로 보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국면에서 탈피하여, 장래를 보자는 것이다. 이성적이고 건설적인 눈으로 개혁개방중에 나타난 부호를 대하자는 것이다. 우리의 제도를 규범화하고, 최종적으로 중국 자신의 '깨끗한 부호'를 만들어내자는 것이다."

 

모든 것은 미래를 보자는 것은 허황한 미래에 기대를 걸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이 '돈'으로 향하는 현실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2006년말이 되어, 3년가량 계속된 '금전만능주의'로 '이성과 건설성' 및 '우리의 제도를 규범화'했지만, '깨끗한 부호'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낙마하는 '문제부호'만 계속 줄을 이었다.

 

곧이어 민영기업의 '원죄'에 대한 뜨거운 논의가 일어난다. 2004년의 대토론과 비교하자면, 이번 토론주제는 더욱 명확했다. 수준도 더욱 높아졌다. 왜 이때 민영기업의 '원죄'에 관한 논의가 불붙었는가? 각자 견해는 다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2006년의 여러 민영기업가가 연속하여 낙마한 것과 관계있다고 본다...

 

2006년 10월, 복희투자지주유한회사의 동사장 장영곤이 체포된다; 광동순덕금관도료집단 동사국주석 주위빈이 세금탈루혐의로 관련부서에 형사구속된다.

 

11월, 창유집단의 동사국주석인 황굉생이 절도사기등 혐의로 홍콩법원에서 재판을 받는다; 북경물미상업집단주식유한공사 동사장 장문중은 정식 사직하고, 개인자격으로 중앙기율검사위원회의 부동산건에 대한 조사를 받는다.

 

12월, '민영석유기업제일인'이라고 불리던 천발집단 동사장 공가룡이 경제범죄혐의로 형사구속된다; 신화인수 동사장인 관국량이 조사를 받고 사직한다; 전 과룡전기의 동사장인 고추군등 9명의 고위경영진의 형사소송사건이 광동성 불산시중급인민법원에서 개정된다; 고추군은 단식까지 해가면서 공개재판을 요구하고,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고자 했다.

 

민영기업가에게 '원죄'가 있든 없든, 당대 중국의 부호문제는 확실히 복잡다단하다. 만일 그들에게 정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이들 집단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런 사회형태하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종합적인 문제일 것이다. 주목할 점이라면, 이 두번의 토론에서 모두 공통된 희망이 제시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제도를 규범화하자" 객관적으로 말해서, 상인에 대한 과도한 질책은 불공정하다. 우리는 권력을 핵심으로 하는 이 사회에서, 사회책임감을 저버리고, 도덕적규범을 짓밟고, 인류공동가치의 최저선을 허물어뜨리는 것은 왕왕 상인이나 민영기업가가 아니라, 권력을 장악한 부패관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상인을 비판하고 진정 권력을 장악한 자들을 비판하지 않는 것은 그저 주류여론이 약한 것을 때리고 강한 것은 놔두며, 중한 것은 피하고 경한 것만 건드리며, 크고 작은 것을 섞어서 혼란시키는 보도태도때문이다.

 

시대적인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간단하게 민영기업가라는 집단을 부정해버린다면, 이것은 이로 인하여 옳은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모기중, 주정의, 뇌창성등은 도덕적으로나 법률적으로나 모두 질책을 받고 제재를 받아야 하는 자들이다.

 

진나라왕조가 천하를 통일한 후, 중국의 상인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관상결탁의 졸부이다. 그들은 대부분 도덕적인 구속을 받지 않은 재물의 약탈자이다. 그저 사리사욕을 채우고, 심지어 서문경식의 극단향락주의자가 된다. 다른 하나는 장건, 노작부를 대표로 하는 지식인형현대기업가이다. 인격도 고상하고, 세상과 백성을 구하겠다는 생각을 지녔따. 그들은 정신적으로 숭고한 이상을 추구하면서, 중국사회를 개조하려는 위대한 실험가이자 실천가이다.

 

어떤 상인이 될 것인가? 어떤 즐거움을 추구할 것인가? 선택권은 항상 상인들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