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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기업가

롱즈젠(榮智健): 홍색귀족의 쓸쓸한 퇴장

by 중은우시 2009. 4. 15.

글: 용비(龍飛)

 

2009년 4월 8일 오후 6시 20분, 롱즈젠(榮智健)의 승용차는 그가 20여년간 분투했던 홍콩CITIC빌딩을 떠났다. 휘황찬란한 불빛아래, 67세의 노인은 언제나처럼 편안해 보였다. 빌딩에서 멀어졌을 때, 그는 비로소 고개를 돌려 한번 쳐다보았다. 사랑하는 딸 롱밍팡(榮明方), 장남 롱밍제(榮明杰)은 여전히 그 빌딩안에 있다. 그러나, 롱(榮)씨집안은 앞으로도 CITIC Pacific(中信泰富)이라는 항공모함을 손발처럼 부릴 수 있을 것인가?

 

이 중국에서 몇 남지 않은 지난 세기의 진정한 귀족이 떠나는 뒷모습은 약간 쓸쓸해 보였다. 외부에 알려진 것처럼, 4월 9일 CITIC Pacific의 주가는 미친듯이 올랐다. 정오가 되자 13.41% 올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롱즈젠은 무엇을 잃었는가?

 

CITIC Pacific과 롱즈젠은 의심의 여지없이 깊은 시대의 낙인이 찍혀 있다.

 

지분구조로 보자면, 의심의 여지없는 Red Chip기업이다. 그러나, 상장한 때로부터 2009년 4월 8일이전까지, 회사의 실제지배자는 회사의 제2대주주인 롱씨였다. 롱씨는 조용하면서, 우아하고, 신비로웠다. 귀족기질이 충만했다. 승마, 골프, 사냥, 롱씨집안과 접촉해본 영국왕실은 쉽게 그들과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다만, 홍콩의 정상계에서 롱씨집안에 대한 컨센서스는 북경과 홍콩에서 인맥이 가장 넓고 관계망이 가장 뿌리깊은 가족이라는 것이다. 홍콩특별행정구 수장이 중앙정부와 비공식적으로 의사소통하려고 하면, 통상 그 통로는 롱즈젠이었다.

 

뿌리깊은 배경에 근거하여 롱씨집안은 일처리를 잘 해냈다. "공사구분, 공사혼합, 공동투자, 공동발전"을 통해서 대주주인 CITIC그룹과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처신했다. 이것이 CITIC Pacific의 경영방식이었다.

 

1992년부터, 롱즈젠은 CITIC Pacific의 지분을 계속 확대하여 나갔다. 이 Purple Chip(Red chip과 Blue Chip을 합한 말. 紫氣東來의 의미도 있다)을 완전히 지배하고자 했다. 그는 일찌기 홍콩매체에 약간 억울하다는 듯이 말한 바 있다: "그때 CITIC Pacific그룹이 성립된 후, 본사에서 우리에게 3000만달러 창업비를 보내주었다. 이 3000만달러는 우리가 일찌감치 갚아버렸고, 나는 본사에 110억홍콩달러의 현금도 주었다." 그러나, 회사가 위기에 처하자 그는 다시 북경으로 직행하여 구원을 요청하게 된다. 1998년에도 그러했고, 2008년에도 그러했다.

 

다만 모든 것은 2009년 4월 8일에 끝이 난다.

 

롱즈젠을 대체한 사람은 창전밍(常振明)이다. 창전밍은 CITIC그룹의 원로이다. 덕망이 높고, 명성이 좋은 편이다. 그는 일찌기 CITIC그룹의 상무부총경리를 지냈고, 나중에 건설은행행장을 지냈다. 2006년 다시 CITIC그룹으로 돌아와서 부이사장 겸 총경리를 지냈다. 재미있는 것은 그때 그가 이미 CITIC Pacific의 이사도 겸직했다는 것이다.

 

아주 일찍부터 CITIC Pacific의 직원들이 보기에 창전밍은 '황상'이 파견한 '순검사'였다. 그리고 몸에는 황제로부터의 '조서'를 지니고 순식간에 생사여탈권을 가진 '흠차대신'으로 변신할 수 있었따. 이것은 아무 이유없는 추측만은 아니었다. 2006년 건설은행에서 CITIC그룹으로 되돌아온 후, 창전밍은 하나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총가치 8000억위안에 달하는 CITIC그룹의 해외상장이었다. 애널리스트들은 CITIC Pacific이 대주주인 CITIC그룹에 완전히 장악된다면, 아주 좋은 플랫폼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번에 창전밍이 CITIC Pacific를 접수한 것에 투자계에서는 모두 좋게 보고 있다. 롱즈젠의 퇴장이 대주주의 등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창전밍은 아마도 CITIC Pacific를 다시 이용하여, 그리고 M&A등의 방식으로 CITIC그룹의 자산을 포함시킬 것이다. 사실, 2008년 10월 28일에 CITIC그룹은 이미 사람들을 CITIC Pacific에 보내어 재무업무를 협력하도록 한 바 있다.

 

재미있는 일은, 롱즈젠이 장악했던 CITIC Pacific를 접수한 후에도 창전밍은 CITIC Pacific에서 급여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회사의 다른 집행이사와 마찬가지로, 매년 15만홍콩달러의 이사포금(袍金, 상여금)만을 받는다는것이다. 어떤 평론가는 이로써 볼 때 창전밍의 근거지는 여전히 북경이라는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완전히 대주주의 대변인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궤이한 투기

 

도대체 왜 롱즈젠은 여러해동안 고심경영했던 회사의 경영권을 잃게 된 것일까? 파생살품투자의 거액손실에 대한 경위에 대하여는 이미 반년간 말이 많았다. 다만 여전히 사람들은 진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잘못한 것이 너무 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너무 수준이 낮은 잘못이어서 궤이한 것이다.

 

"그들은 파생상품을 잘못 운용했다" 네덜란드은행의 금융파생상품전문가인 허치총(何啓聰)의 말이다. 사실 허치총등 전문가의 말을 빌릴 필요도 없이, 보통의 증권애널리스트라면 모두 알 수 있다. 이런 파생상품은 근본적으로 햇징이 아니라 도박이라는 것을. 그리고 도박하는 쌍방은 출발점이 같은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려진 바로는 CITIC Pacific이 외환금융파생상품을 매입한 것은 오스트레일리아에 투자하는 광업의 16억호주달러짜리 광산프로젝트에 대한 외환리스크를 회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다만, 이번 투자에서, CITIC Pacific은 실제로 90억호주달러를 보유하고 있었다. 투기한 금액이 실제광업투자금액보다 4배이상 많은 것이다.

 

회사는 홍콩의 여러 은행들과 금액이 어마어마한 호주달러레버리지식 장기계약을 체결하면서, 유로화대 미화, 호주달러대미화의 환률를 연계시켰다. 실제로는 미달러를 매각하고 호주달러를 매입한 것이었다. 만일 그냥 이렇게만 한 것이라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다만 CITIC Pacific의 파생상품계약을 자세히 살펴보면, 불평등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중에는 호주달러와 유로의 두 화폐는 최종적으로 시가가 더욱 낮은 화폐로 결산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들의 리스크가 통제되지 않도록 한 것이다. 만일 호주달러의 환률이 회사와 은행이 사전약정힌 수준으로 오르지 않으면, CITIC Pacific은 반드시 정기적으로 호주달러를 거액 매입하여 호주달러의 환율이 일정수준이 오를 때까지 사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계약을 체결한다는 것은 그저 눈이 벌개진 도박꾼들밖에 없을 것이다. 마누라까지도 도박판에 거는 정도의." CITIC Pacific을 여러해동안 살펴봤던 한 애널리스트의 말이다. 이 회사는 역사적으로 도박적인 투자를 한 것이 적지 않지만, 이처럼 결과를 제쳐놓고 투가한 경우는 드물다는 것이다.

 

과연 호주달러가 대폭락하고, CITIC Pacific은 계약상 최대손실이 147억홍콩달러에 달하게 되었다. 만일 주요지배주주인 CITIC에서 적시에 15억달러의 신용대출을 공급해주지 않았더라면, CITIC Pacific은 파산지경에 처했을 것이다. 최종적으로 2008년 12월, CITIC Pacific은 92.55억홍콜달러의 손실을 댓가로 이 궤이한 투기를 끝냈다.

 

"이러한 일이 일부 소규모 회사, 심지어 국내의 일부 소형 상장회사에게서 발생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국제투자시장의 게임규칙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CITIC Pacific과 같은 국제시장에서 여러해동안 구른 Purple Chip에서 발생했다는데 사람들은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상술한 애널리스트의 말이다. CITIC Pacific은 십여명의 국제적으로 유명한 재무회계관련 대학을 졸업한 인재들이 있고, 적지 않은 직원들은 투자회사에서 실무경험이 있었다. "그들이 이러한 리스크를 보지 못했을 리는 없다."

 

더욱 궤이한 거래

 

사후에 롱즈젠은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번 투자에 대하여 사전에 알지 못했다. 재무부서가 나를 거치지 않고 한 결정이다. 재무부서의 두 책임자는 가장 먼저 문책당했다. 다만, 외부에서는 이러한 해명을 거의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기본적으로 두 사람은 그저 '속죄양'이라고 본다. 그리고 롱즈젠의 딸로 재무부서에 근무하던 롱밍팡도 면직되었다.

 

만일 딸이 어려서 일처리를 잘 못한 것이라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그렇다면, 노련한 롱즈젠은 이 일에서 또 하나의 더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2008년 10월 21일, 홍콩민주당 주석 겸 입법회의원인 허쥔런(何俊仁)은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CITIC Pacific은 일찌감치 9월 7일에 이 회사가 레버리지 외환매매계약으로 거액의 결손이 생겼다는 것을 알았는데, 이사회에서는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다. 1달반 이후에 회사의 시자총액이 절반정도 떨어진 다음에 공개했다. 이 회사의 주가는 9월 5일 24.9홍콩달러였는데, 그후에 주가는 점차 떨어져서 14.52홍콩달러가 되었다.

 

더욱 심한 것은 CITIC Pacific의 거액결손에 대한 소식은 아마도 공시전에 이미 누설된 것같다. 그리고 사전에 정보를 취득한 내부인사는 사전에 옵션거래를 하여 거액의 이익을 보았다. 증거의 하나는 호주달러의 폭락이래로, CITIC Pacific의 옵션거래는 급격히 상승한다. 심지어 사건이 벌어지기 이전보다 10여배나 많았다. 거액손실이 공시된 후, 주가는 3.66홍콩달러까지 폭락하는데, 옵션을 구매했던 사람들은 큰 이익을 보게 된 것이다. 그후에 들려온 소식에 다르면, 롱씨집안이 바로 이를 통하여 거액을 벌었다는 것이다. 소식이 펒ㄴ 후에, 롱즈젠은 적극적으로 지분을 확대했다. 다만, 외부에서는 바로 의문을 표시했다. 2008년 롱즈젠은 계속하여 회사지분을 늘려왔는데, 9월 5일에 중단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틀후 회사가 거액의 손실을 보았다는 소식이 내부에 퍼졌다고 한다.

 

바로 이 일련의 이상한 거래는 이번 거액결손사건을 더욱 오리무중으로 만든다. 롱씨집안은 침몰하는 배에서 다시 노다지를 건졌는가? 각종 억측이 다 나왔다. 2008년 홍콩증권감독회가 먼저 조사에 들어갔다. 이어서 2009년 4월 3일, 홍콩경찰은 CITIC Pacific에 문서를 수색하기 위하여 들어갔다. 이때, 외부에서는 이미 경찰측이 충분한 인적 물적증거를 확보했다고 보았다. 그렇지 않다면, 국자위 직속의 CITIC 자회사의 신분을 볼 때 경찰이 이러헥 경거망동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옛날 이야기

 

경찰이 개입한 후, 롱즈젠은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어졌다. 도대체 무엇을 잃었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아마도 본인일 것이다. CITIC 그룹은 거액손실사건을 마무리지으면서, 대주주의 CITIC Pacific의 지부율을 29.44%에서 57.56%로 대거 확대했다. 롱즈젠의 지분률은 19.08%에서 11.48%로 대폭 감소되었다.

 

사직서에서 롱즈젠은 사건이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런 현실에 직면하여, 본인은 자리를 물러나서 좋은 사람에게 양보하는 것이 회사에 가장 유리하다고 보았다"고 적였다. 그의 말투에서는 낙막(落寞)함이 느껴진다. 그의 시대는 끝난 것이다.

 

"롱즈젠이 재기할 기회가 있을까?" 인터뷰과정에서, 십여차례나 이런 반문을 들을 수 있었다. 전문가들이 좋게 보고 있는 점은 롱즈젠의 30년간의 "은인(隱忍)"과 "장광(張狂)"이었다.

 

1950년대말, 전국이 아직 물질생활과 정신생활에서 큰 차이가 있을 때, 16세인 그는 무개차를 몰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술을 마시고 개싸움을 시켰다. 부친 롱이런(榮毅仁)은 이 집안의 유일한 아들인 그에게 큰 희망을 걸었다. 친히 그에게 "온(穩), 인(忍)"이라는 두 글자를 써서 선물했다. 롱씨공자는 점차 그 의미를 터득했다. 대학졸업후 백산흑수(장백산과 흑룡강)의 사이에서 은인자중했고, 철로를 놓고, 길을 닦았다.

 

1978년, 이미 36세가 된 그는 의연히 홍콩으로 떠난다. 명문가의 자제로서 홍콩에서의 인맥을 활용하여, 그리고 일찌기 연마해놓은 평온한 외모를 이용하여, 롱즈젠은 부친이 해방전에 홍콩에 남겨두었던 600만홍콩달러를 가지고 사업을 시작한다. 4,5년만에 미화4800만달러의 수준으로 성장시킨다.

 

1986년, 롱즈젠은 부친의 중국국제신탁투자공사(CITIC)에 가입한다. 그리고 CITIC 홍콩의 부이사장 겸 총경리가 된다. 그의 국내에서의 교육과 해외에서의 사업경험을 높이사게 되어, 중앙정부는 그에게 비교적 큰 권한을 부여하고 지원을 보낸다.

 

1986년부터 1996년까지, 홍콩사람들은 "홍콩매수"라는 말로 롱즈젠을 묘사했다. 10년간, 거의 매번 그는 작은 기업으로 큰 기업을 먹어치우는 투자를 했고, 매번 중앙정부의 지원을 얻어냈다. 1987년 홍콩의 주식폭락사태를 틈타서 그는 Cathay Pacific(國泰) 항공사를 인수하고, 1990년에 다시 Dragon(港龍) 항공을 인수했다. 같은해 다시 홍콩텔레콤의 제2대주주가 되었다. 1991년, 철완의 수단으로 롱즈젠은 40억위안의 자금으로 자산가치가 70여억위안에 이르는 헝창(恒昌)기업을 인수했다.

 

CITIC그룹의 전이사장인 왕쥔(王軍)은 돌아가신 국가부주석 왕전(王震)의 아들이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부하인 롱즈젠을 평가했다: 그가 어떤 큰 일을 하더라도 그는 나에게 얘기한다. 나도 많은 경우에 간여하지 않는다. 그의 사업상의 안목은 훌륭하다. 그래서 그의 건의에 대하여 내가 동의하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다만, 1996년, 두 사람은 처음으로 맞부닥친다. 그해 겨울, 롱즈젠은 혼자 북경으로 간다. 북경 장안가의 CITIC빌딩에서 왕쥔과 단독으로 만난다. 득의만면한 그는 CITIC그룹에서 분가하는 첫발걸음을 내딛고자 했다.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 왕쥔은 그의 부친과 마찬가지로, 강인하고 꺽이지 않는 사람이다. 당시 CITIC그룹의 내부고위친사들은 아무도 왕쥔이 롱즈젠의 요청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결과는 받아들인 것이었다. 롱즈젠을 위시한 CITIC Pacific의 경영진은 25%의 지분을 얻었다. 그리고 롱씨집안은 일거에 CITIC Pacific의 제2대주주가 된 것이다.

 

"듣기로 당시에 롱즈젠은 많은 고위층의 관계망을 동원했다고 한다." 내부소식통에 따르면, 그는 교묘하게 1997년 홍콩주권회복의 배경을 이용했다고 한다. 경영진에 주식을 나눠줌으로써 중앙의 홍콩에 대한 신축적인 태도를 보여줄 수 있고, 세계의 규칙에 맞추어가는 중국정부를 보여줄 수 있다고 했다. 이는 가장 성공한 사례의 하나이다.

 

지금까지도, 왕쥔은 홍콩매체의 인터뷰에서 여전히 말한다. 지금도 잘한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다고.

 

일이 잘되어가다보니 속도가 붙었다. 롱즈젠은 큰 일들을 처리했다. 1996년부터 1998년까지 CITIC Pacific의 상업제국은 판도를 넓혀갔다. 부동산, 무역에서 터널로 다시 민간항공사, 발전까지 온갖 업종을 망라했다. 다만 사람의 계산은 하늘의 계산을 따르지 못한다. 1998년 아시아금융위기의 영향으로, CITIC Pacific은 주영업에서 위협을 받을 뿐아니라 주식도 시장에서 마구 흔들렸다. 주가가 폭락한다면 주식을 담보로 대출받은 백억의 대출금은 바로 상환해야 했다. 할수없이 롱즈젠은 다시 북경으로 날아간다. 결국 역시 중앙에서 내려온 자금으로 그는 그 난관을 넘긴다. 그는 여전히 CITIC Pacific의 제2대주주의 지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10년후의 이번 난관은 그가 다시는 뛰어넘지 못했다. 한번 잘못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 비록 롱씨집안의 제4대가 이미 CITIC Pacific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그리고 비록 롱씨집안은 여전히 주주총회에서 충분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지만, 대주주가 절대지분을 보유한 상황하에서 이런 것들은 모두 무력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홍식귀족의 막은 이미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