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무제는 중국역사상 아주 걸출한 제왕중의 한 명이다. 한무제의 54년에 걸친 통치기간동안 모두 13명의 승상(丞相)이 그를 도와 정치를 담당했다. 시간순서대로 그들은 각각 위관(衛綰), 두영(竇嬰), 허창(許昌), 전분(田蚡), 설택(薛澤), 공손홍(公孫弘), 이채(李蔡), 장청적(庄靑翟), 조주(趙周), 석경(石慶), 공손하(公孫賀), 유굴리(劉屈氂), 전천추(田千秋)가 그들이다. 이중 이채, 장청적, 조주는 모두 핍박받아 자살하게 되고, 두영, 공손하, 유굴리는 모두 참살당한다. 어떤 사람들은 한무제의 아래에서 일했던 승상들은 모두 황제의 권한에 예속되어 아무런 역할을 못하였고, 그저 속죄양이 된 것이므로 불쌍하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했는가?
1. 건릉후(建陵侯) 위관 (건원원년-건원원년)
위관은 병사를 이끌고 오초연합군과 싸웠던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한경제의 말기에 승상을 지냈고, 한무제시대의 제1기 승상을 지낸다. 건원원년 겨울인 10월, 한무제가 막 즉위한 이후 명을 내려, 승상, 어사, 열후, 중2천석, 2천석, 제후들에게 현량 방정 직언 진간할 수 있는 현명한 인물을 천거하게 하고, 황제가 직접 면접한다. 이에 모두 100여명이 참가하였는데, 그중에 동중서(董重舒)가 가장 돋보였다. 나중에 승상인 위관은 상소를 올려, "천거된 현량들 중에는 신불해, 상앙, 한비자, 소진, 장의의 학설을 연구한 자가 있어 국가의 정사를 어지럽히고 있으니 이들을 파면해주십시오"라고 한다. 한무제는 이에 동의한다. 그는 이 해에 병으로 직무를 사직한다. 위관은 여러 방면으로 재능있는 인물이었고, 유학과 문학에 정통했다. 당초 한무제가 태자로 있을 때, 태자의 사부로서 태자를 가리켰다. 그는 나이가 많아서 제대로 정사를 돌보지 못했다. 한경제가 아플 때 무고한 자들을 옥중에서 죽도록 내버려두어, 한무제는 그에게 불만이 있었다. 그 후 그가 병이 들자 바로 그의 사직을 받아들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한다.
2. 위기후(魏其侯) 두영 (건원원년-건원2년)
효문황후 두씨의 종형의 아들이다. 대장군으로서 오, 초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공로를 세워 위기후에 봉해진다. 일찌기 전임 태자의 사부였는데, 그가 여러번 간했으므로 태자가 폐위되자 그는 사직해버린다. 나중에 고수(高遂)의 말을 듣고 다시 조정에 나온다. 두태후는 여러번 한경제에게 두영을 승상으로 삼으라고 얘기하지만, 한경제는 그를 승상으로 삼지 않고 위관을 승상으로 삼는다. 위관이 병으로 사직하자 한무제는 그를 승상으로 삼는다. 한무제도 유가를 좋아하고, 두영도 좋아했다. 그리하여 처음에 두 사람의 협력은 아주 잘 이루어졌고 적지 않은 일들을 해냈다.
아쉽게도 한무제의 할머니인 두태후는 황로학설(黃老學說)의 철저한 신봉자였고, 유가를 매우 싫어했다. 그렇지만, 두영, 전분, 어사대부 조관, 낭중령 왕장등은 모두 유가를 따랐고, 황로지학을 멀리했다. 그래서 두태후는 이들을 싫어했다. 어사대부 조관은 황제에게 두태후의 말을 듣지 말도록 주청을 올렸다가 두태후의 분노를 샀다. 그리하여 조관과 왕장은 파면되고 차례로 자살한다. 두영과 전분도 역시 승상과 태위의 직위에서 파면되었다. 그는 승상에 오른지 1년도 되지 않아, 집안의 어른에 의해서 자리에서 끌려내려온 것이다. 이후 그는 집에서 조용히 지낸다.
그의 죽음은 아주 기괴하게 이루어진다. 그가 승상에서 물러난 후 아무도 그를 찾아오지 않는데, 관부(灌夫)라는 인물이 자주 그를 찾아왔다. 관부는 협객기질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승상이던 무안후 전분(한경제의 황후인 왕황후, 이때는 왕태후와 오누이간임)가 두영을 못살게 굴자 이에 불만을 토로하다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러자, 두영은 그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나, 태후때문에 한무제는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 때 두영은 한경제가 자신에게 내린 유조가 생각났다. 그 유조에는 "불편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황제에게 고해도 좋다"는 말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 유조를 한무제에게 올린다. 한무제는 황실의 자료를 확인해보게 하는데, 이 유조는 등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유조를 위조한 혐의를 씌워 두영을 참수한다.
3. 백지후(柏至侯) 허창 (건원2년-건원6년)
허창은 두영의 뒤를 이어 승상이 되었다. 허창은 두태후가 임명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사건건 두태후의 말을 들었고, 스스로 한 일이 없다. 건원6년이 되어, 두태후가 사망하자 승상 허창, 태위 장청적은 한무제에 의하여 면직된다.
4. 무안후(武安侯) 전분 (건원6년-원광4년)
한경제의 황후인 왕황후의 동모이부(同母異父) 동생이다. 당초 태위에서 면직된 후, 자신이 태후(한경제 왕후)의 동생이고 현 황제인 한무제의 외삼촌이므로 매일 그를 찾아오는 관리들이 그 전보다 더 많아졌다(예전에 두영을 찾아가던 사람들이 이제는 전분을 찾아오게 된 것이다). 허창이 면직되자 손조롭게 승상의 자리를 차지한다.
승상이 된 후, 전분은 교만해졌고, 저택도 어떤 대신보다 크고 좋게 지었다. 집안의 금, 옥, 미녀, 견마, 진귀한 물건등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따. 매번 조정에 나갈 때면 그는 앉아서 반나절을 얘기했고, 한무제는 그의 말이라면 다 들어주었다. 그가 추천하면 바로 2천석의 높은 관직에 오르기도 하였으니, 그의 권한은 거의 황제에 버금갔다. 그리하여 한번은 한무제가 "네가 임명할 사람 다 임명했느냐. 나도 좀 임명해보자."고 말할 정도였다. 그가 자신의 저택을 확장하기 위하여 관청을 땅을 내달라고 하자 한무제는 결국 화를 내게 된다. "아예 무기고를 내달라고 하지 그러느냐." 전분은 할 수 없이 좀 조용히 지낼 수밖에 없었다.
관부와 두영을 박해하여 죽게 한 후에 그도 병이 들었다. 그는 병석에서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는 말을 연발했다. 그리고 무당을 불러서 위기후 두영과 관부가 곁에 서서 자기를 죽이려 하니 없애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3월에 전분이 병사한다.
나중에 회남왕 유안이 모반을 일으켰는데, 전분이 회남왕으로부터 재물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자, 한무제는 "만일 무안후가 아직 살아있었다면 내가 멸족을 시켰을텐데.."라고 했다고 한다.
전분에게는 또 하나의 죄과가 있다. 원광3년 봄에 황하가 범람하여 물길을 바꾼다. 5월에 다시 제방이 무너져서 인근 16개 현에 황하물이 흘러들어와서 수재를 당한다. 백성들이 유리걸식한다. 한무제는 10만의 병사를 보내어 무너진 황하둑을 막았지만, 막은 후에 다시 터졌다. 전분은 자기의 식읍은 전혀 수재를 입지 않았으므로 이렇게 말한다: "장강 황하의 둑이 터지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굳이 사람을 보내고 돈을 써서 막을 필요가 없다. 둑을 막는 것은 하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한무제도 황하의 무너진 둑을 막지 않게 된다. 20여년이 지난후인 원봉2년에 이르러 한무제는 비로소 사람을 보내어 둑을 막게 되니, 황하가 물길을 다시 잡게 된다. 이 죄만으로도 전분은 여러번 죽어 마땅하다.
5. 평극후(平棘侯) 설택 (원광4년-원삭5년)
전분이 죽은 후, 한무제는 한안국(韓安國)으로 하여금 임시로 승상업무를 대리하게 한다. 원래는 한안국으로 하여금 승상을 하게 하려는 생각이었는데, 이때 한안국이 다리가 부러지게 된다. 그리하여 설택이 운좋게 승상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원삭5년 겨울11월 초닷새에 설택은 면직된다. 그는 재직기간중 뚜렷한 업적이 없다. 그렇지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 큰 곤란도 겪지 않는다.
6. 평진후(平津侯) 공손홍 (원삭5년-원수2년)
한무제의 즉위초기에 시행한 현량모집에 응했었다. 그 때 공손홍의 나이 60세였다. 그는 현량으로 박사의 직위를 받는다.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보고하는데 한무제가 마음에 들지 않아했다. 그는 참지 못하고 사직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간다. 원광5년에 한무제가 다시 현량을 모집했는데, 치천국에서는 다시 공손홍을 추천한다. 그는 "이미 해봤다. 황상은 내가 관리를 하는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나를 파면했으니, 이번에는 다른 사람을 추천해달라"고 한다. 그렇지만 현지에서는 여전히 그를 추천한다. 한무제는 조서를 내려 추천받은 수백명을 불러서 글을 논하게 하는데, 공손홍의 글을 한무제는 가장 마음에 들어하여 1등으로 뽑는다. 그리고 그의 용모가 뛰어나 ㄴ것을 보고 박사로 모신다. 수년후에는 어사대부로 삼는다. 임기중에 여러번 황제에게 권하는데 아주 타당한 의견들이어서, 한무제는 그가 겸손하고 현덕하다고 생각한다. 매번 조정에 나올 때마다 공손홍은 그저 사실의 대강을 설명할 뿐, 조정에서 다른 사람고 다툰 적이 없었다. 한무제는 그가 아주 근신하고 후덕하며 정사에 밝은 것을 보고는 날이 갈수록 그를 높이 평가하게 된다.
원삭5년, 설택이 면직되자 그가 승상이 된다. 이전에 승상을 하던 사람은 모두 후(侯)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공손홍은 작위가 없었다. 그리하여, 한무제는 그를 평진후에 봉한다.
공손홍은 승상이 되자, 다른 사람들처럼 집에 손님을 받고 현명한 인재들을 모은다. 그의 녹봉은 모두 이런 손님들을 기르는데 썼고, 자기는 아주 검소하게 살았으며, 집안에 재산도 별로 없었다. 그는 외면적으로 아주 관대한 것처럼 보였으나, 심기가 깊었다. 그에게 잘못 보인 사람은 친소원근을 불문하고 반드시 보복을 당했다. 동중서는 사람이 정직하여 공손홍이 아부를 잘하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공손홍은 동중서를 미워했다. 당시 교서왕 유단이 아주 교만하고 무례하여 여러번 법령을 어겼고, 심지어 관리를 죽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는 동중서를 교서왕의 상(相)으로 추천해서 내보낸다. 오래지 않아 동중서는 병으로 관직을 사직한다. 급암(汲黯)은 자주 유생들을 비난하고, 공손홍이 잘못한다고 말하곤 했다. 예를 들어 그는 너무 가식적이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는 한무제에게 급암으로 하여금 우내사로 가서 황친과 귀족이 거주하는 지역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다행히 황제가 급암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어서 공손홍이 그를 해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6년간 어사,6년간 승상을 지냈고, 80세가 되어서 승상의 지위에서 죽었다. 그의 이후에 이채, 장청적, 조주, 석경, 공손하, 유굴모가 계속 이어 승상이 되었다. 이채로부터 석경에 이르기까지는 승상부가 사실상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고, 공손하, 유굴모의 시기에는 이미 승상부가 퇴락하여 마굿간 가마창고나 노비의 집같은 정도로밖에 되지 못하였다. 이후의 6명의 승상중에서는 석경이 돈후하여 죽을 때까지 승상의 위치를 지켰고, 나머지는 모두 주살되었다.
7. 낙안후(樂安侯) 이채 (원수2년-원수5년)
비장군 이광(李廣)의 종제이다. 한경제때 공을 세워 이천석에 이르렀다. 한무제 원삭연간에 경거장군(輕車將軍)에 이르렀고, 대장군을 따라 흉노의 우현왕을 치는데 전공을 세워 낙안후로 봉해졌다. 원수2년, 어사대부에서 승상에 올랐다. 이채는 사람됨이 보통이었고, 명성도 그의 종형인 이광에 못미쳤다. 그러나, 이광은 작위를 받지 못했고, 관직도 구경에 불과했지만, 그는 승상까지 하였다.
이채는 4년간 임직했는데, 원수5년 즉 이광이 자살한 후 1년이 지난 때, 그는 한경제의 능원 앞쪽의 길 양쪽을 침범하여 자기 일가를 매장한 것으로 죄를 얻었다. 그는 재판을 받기를 원하지 않아 자살하고 만다.
8. 무강후(武强侯) 장청적 (원수5년-원정2년)
원정2년겨울, 어떤 사람이 한문제의 능을 도굴하여 배장된 화폐를 파낸다. 장청적은 어사대부 장탕과 함께 한무제에게 죄를 청한다. 그런데, 한무제의 앞에 가서는 장탕은 죄를 청하지 않는다. 한무제는 어사대부에게 이 사건을 조사하도록 시킨다. 그런데, 장탕은 이 자리에서 "승상은 일찌기 누가 한 짓인지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고한다. 장청적은 두려웠다. 승상의 부하인 세명의 장사인 주매신, 왕조, 변통은 평소 장탕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승상과 협의한 후 한무제에게 주청을 올렸다: "장탕이 황제에게 법령의 시행을 주청드릴 때면, 상인들이 항상 먼저 알아서 매점매석하여 큰 돈을 벌고는 그 돈중 일부를 장탕에게 나눠주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한무제는 장탕을 추궁했고, 장탕은 모르는 것처럼 하였다. 이때 어떤 사람이 도 다시 장탕이 전어사중승 이문이 모반했다고 모함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장탕은 글을 올려, "신을 죽이려는 것은 세 장사입니다"라고 하고는 자살해 버린다. 장탕은 고위직에 있었지만, 죽었을 때 집안의 재산이 오백금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의 형제가 장례라고 제대로 지내려고 하자, 그의 모친은 "장탕이 천자의 대신으로 중상모략을 받아 죽었는데 어찌 후하게 묻겠는가"라고 하였다. 한무제가 이 소식을 듣고는 세 장사를 죽였고, 승상인 장청적을 감옥에 가두었다. 12월 25일 장청적이 감옥에서 자결한다.
9. 고릉후(高陵侯) 조주 (원정2년-원정5년)
원정5년겨울, 남월승상 이정(李鼎)이 몰려서 반란을 일으킨다. 가을, 제나라 상(相)인 복식이 상소를 올려 그들 부자와 제나라에 익숙하고 수전에 능숙한 자들이 남월로 가서 충성을 다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한무제는 그를 관내후로 봉하고 황금과 전답을 내린다. 9월, 종묘에 제사지내고, 여러 제후들은 황금을 마친다. 제후들 중에서 황금을 부족하게 냈거나 성분이 부족한 경우에는 불경죄로 탄핵한다. 그리하여 106명이 작위를 박탈당한다. 9월 초엿새, 조주는 제후들이 바친 황금이 부족한 것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은 죄로 하옥된다. 주주는 자살하고 만다.
10. 목구후(牧丘侯) 석경 (원정5년-태초2년)
승상 조주가 죄를 받아 체로되자 한무제는 당시 어사대부이던 석경을 승상으로 삼는다. 당시 한나라는 남으로는 두 월나라를 치고, 동으로는 조선을 쳤다. 북으로는 흉노를 쫓아내고, 서로는 대완을 쳤따. 국가에 일이 많을 때였다. 한무제는 천하를 순시하고, 사당을 재건했으며, 봉선을 행하고, 예악을 다시 부흥시켰다. 그리고 상홍양등은 국고를 채우기 위하여 노력하고, 왕온서등은 법제를 엄격히 집행하였으며, 아관등은 문학을 일으켰다. 이들의 지위는 모두 구경에 달하였다. 그러나, 석경은 돈후하였고, 모든 일을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 처리하였다. 그리하여 재상의 지위에 9년이나 있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특별히 비난을 받지 않았다.
11. 갈강후(葛絳侯) 공손하 (태초2년-정화원년)
원래 무장이고, 여러번 전공을 세웠다. 무제가 태자일 때, 그는 태자사인(太子舍人)이었다. 그의 부인이 위청의 누나인 위자부 위황후의 언니였으므로, 한무제의 총애를 받았었다. 차기장군으로 대장군 위청을 따라 출정하여 공을 세웠고, 남묘후에 봉해졌다. 나중에 좌장군으로 출병하였으나, 전공을 세우지 못하여 작위를 박탈당했다. 다시 부저장군으로 오원에서 출병하였으나 여전히 전공이 없었다. 태조2년에 태복에서 승상이 되면서 갈강후에 봉해진다.
조정에는 일이 많았고, 한무제는 당시 엄격했다. 공손홍의 이후에 승상을 맡은 3명이 연이어 죄로 죽었다. 석경만이 조심해서 늙어죽었지만, 여러번 황제에게 견책을 당했었다. 그래서 공손하는 승상으로 임명받자 무릎을 꿇고 인수(印綬)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신은 원래 변방을 지키던 작은 인물입니다. 어찌 승상의 직위를 감당하겠나이까" 하면서 엎드려 통곡했다. 한무제는 그의 가련한 모습을 보고는 주변의 신하들에게 그를 일으켜 세우도록 했으나,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한무제가 직접 그를 일으켜 세우니 그가 명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궁문을 나서면서 "이제 나는 위험에 빠졌구나"라고 탄식했다.
공손하의 아들인 공손경성이 공손하를 대신해서 태복이 되었다. 그리하여 부자가 함께 나란히 최고직위에 오르게 되었다. 공손경성은 황후의 언니의 아들이다보니 교만하고 법도를 잘 지키지 않았다. 정화년간에 북군의 돈 1900만냥을 유용했다가 발견되어 하옥되었다. 당시, 한무제는 양릉 사람 주안세를 체포하고자 하였는데, 계속 잡지 못하여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공손하는 자기가 주안세를 붙잡으면 아들 경성의 죄를 사해달라고 부탁한다. 한무제는 응락한다. 나중에 그는 주안세를 붙잡았는데, 이 주안세는 경사의 대협객이었다. 공손하가 자기를 붙잡아 아들을 살리려 한다는 것을 알자, 웃으면서 말했다. "승상이 곧 멸족되겠군. 남산의 대나무를 모두 베어오더라도 그의 죄과를 기록하는데 부족할 것이다. 사곡의 나무를 모두 베어와서 붓을 만들더라도 내가 거의 죄과를 기록하는데 부족할 것이다" 주안세는 옥중에서 글을 써서 공손경성과 양석공주가 사통한 일을 까발렸고, 무당을 불러 황제를 저주했던 일도 까발렸다. 그리고, 한무제가 감천궁으로 가는 길 에 나무인형을 묻어서 저주한 일도 까발렸다.
정화2년 정월, 공손하부자는 감옥에 갇히고 주살되고 멸족된다.
12. 팽성후(彭城侯) 유굴리 (정화2년-정화3년)
한무제의 서형(庶兄)인 중산정왕 유승의 아들이다. 정화2년 봄에 한무제는 탁군군수이던 유굴리를 좌승상으로 삼고, 팽성후로 봉한다. 같은 해 태자 유거의 무고사건이 벌어진다. 그와 이광리(李廣利)는 모두 멸족의 화를 당한다.
13. 부민후(富民侯) 전천추 (정화4년-정화4년)
한무제 말년에 태자 유거는 강충(江充)의 모함으로 자살하게 된다. 그는 태자를 대신하여 한무제에게 글을 올린다 "아들이 부친의 군대를 동원하는 것은 기껏해야 채찍을 맞을 작은 죄에 지나지 않습니다. 천자의 아들이 사람을 잘못 죽였다고 해서 무슨 큰 일이겠습니까. 이것은 내가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백발노인이 나에게 말해준 것입니다" 그가 상소를 올렸을 때는 이미 태자사건이 마무리된 지 한참 지난 후였따. 한무제는 당초 태자가 어쩌지 못하는 상황에서 강충을 죽이게 된 것을 알게 되었고, 그의 상소를 보고는 바로 전천후를 만나게 된다. 전천후가 팔척의 키에 용모가 괜찮은 것을 보고는 기뻐했다: "부자간의 사정을 외부인이 언급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도 네가 오로지 나에게 태자의 마음을 고하였으니, 이것은 분명히 고조황제의 신령이 너에게 그렇게 말하라고 한 것이리라. 너는 나의 보정대신이 되어야 겠다" 그리고는 전천추를 대홍로의 직위에 앉힌다. 몇 개월 후 유굴모가 참형에 처해지자 그를 승상으로 삼고, 부민후에 봉한다.
사실 전천후는 무슨 대단한 재주를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었따. 전공도 없고, 경력도 일천했다. 그저 한무제의 마음에 맞는 글을 한번 써서 올렸을 뿐이다. 몇 개월간 승상으로 있었다. 오래지 않아. 한나라의 사신이 흉노를 찾아가서 선우를 만났다. 선우는 "너희들이 새로 승상을 임명했다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해서 승상이 되었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사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는 황제의 뜻에 맞는 글을 써서 올렸기 때문이다". 선우는 다시 "아 원래 너희 한나라는 승상을 뽑을 때 능력있는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라 아무나 말만 몇마디 하면 승상이 되는 것이냐"라고 하였다. 사신은 그대로 한무제에게 고하였는데, 한무제는 사신이 자신을 욕보인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 사신을 죽여버렸다.
그러나, 전천추는 사람됨이 성실하고 돈후하였다. 승상직위에 있으면서도 분수를 지켰다. 그리하여 이전의 몇몇 승상들보다는 안전하게 승상의 직위에 있었다. 태자사건과 관련하여 한무제가 여러 사람을 연루시켜 처벌하려 하자, 그는 한무제에게 너무 많은 사람을 연루시키지 말도록 주청한다. 한무제도 그의 말이 맞다고 생각되어 더 이상 확대하지 않는다.
1년이 지난 후 한무제가 죽었다. 전천추는 어린 황제를 도와 계속 승상을 지낸다. 합쳐서 12년을 승상으로 있었고, 임기중에 사망한다. 그는 나이가 많았으므로 황제가 그에게 아주 잘 대해주었다. 조회를 할 때도 그에게 가마를 타고 궁전을 드나들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를 "차승상(車丞相)"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그의 성까지도 차로 고쳐서 "차천추(車千秋)"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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