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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분석

팔기자제는 어떻게 무기력해졌는가?

by 중은우시 2010. 3. 4.

글: 홍촉(洪燭)

 

위풍당당했던 팔기(八旗)는 원래 누르하치가 자신의 손으로 만든 군사, 정치, 생산이 삼위일체된 조직이었다. 초기에는 황(黃), 백(白), 홍(紅), 남(藍)의 4기(四旗)였는데, 나중에 사기가 증편되었다 그리하여 원래의 사기("정기(整旗)" 혹은 "정기(正旗)"라고 칭함)의 표지에 가장자리에 색깔을 넣어서 "상기(旗)"라고 불렀다. 정황, 상황, 정백, 상백, 정홍, 상홍, 정남, 상남을 합쳐서 팔기(八旗)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소규모 사회이면서 대규모 병사집단이기도 하다. 상호 지원하면서 규율이 엄격하기로 유명했다.

 

누르하치와 홍타이시(청태종)의 두 창업자는 바로 이 단련된 자제병을 이끌고 백산흑수의 사이에서 굴기하여, 담장 하나를 사이에둔 명왕조와 분정항례(分庭抗禮)하면서 대치하고 교전을 벌였다. 장성을 차지하고 있던 명나라군대는 관외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팔기의 깃발을 보면 미워하면서도 두려워했다. 그들의 눈에, 이 이민족의 깃발은 피를 부르는 것이었고, 기세는 만리를 한 숨이 삼켜버리는 호랑이와 같이 보였다.

 

팔싸움하는 식의 교전상태가 수십년간 지속된다. 시시때때로 전투를 걸어오는 팔기병의 압박에 명나라는 숨도 쉬기 어려울 정도였다. 바로 이때, 깃대를 들고 일어선 섬서성의 농민 이자성이 치명적인 일격을 가한다. 명왕조는 내부갈등으로 무너졌다. 팔기병을 그 빈틈을 노려 치고 들어왔다. 밀물처럼 산해관으로 밀려들어왔다. 그리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이자성을 쫓아내는 일이었고, 북경성을 점령하는 일이었다.

 

1644년 6월 6일, 청나라의 섭정왕 도르곤은 명나라에서 투항한 장수 오삼계의 인도를 받으며 조양문을 통해서 자금성으로 들어간다. 아마도 득의만면하여 입성의식도 치렀을 것이다.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옛 명나라의 문무관리들이 5리밖까지 마중을 나갔다" 북경이라는 풍수길지는 오래전부터 팔기병들이 침을 흘려온 곳이다. 자신들이 차지할 수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수개월후, 청나라조정은 성경(심양)에서 북경으로 천도한다. 이리하여 통일강산의 꿈을 실현하였다.

 

북경은 이렇게 하여 팔기자제의 천하가 된다.

 

도르곤이 말을 달려 북경성의 문턱을 넘을 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혹시 이런 것을 의식했을까: 이자성도 북경에 들어오면서 비슷한 의식을 했을까? 이자성은 자금성에서 겨우 42일간 황제노릇을 했고, 강산을 손에 넣었다가 잃어버렸다. 겨우 42일이지만, 이 기간동안 그의 부하들은 사치, 부패한 생활에 젖어들었고, 뻣속에서 녹아들어갔다. 그리하여 전투력이 대거 약화된다. 승리한 군대는 소리없는 허물벗기를 한다: "허리에는 돈을 가득 둘러매고 이미 부자가 되었다. 이미 적군과 싸우던 기개는 모두 사라졌다." 북경서은 정말 천하제일의 소금굴(銷金窟)이다. 금과 은을 녹일 뿐아니라, 영웅의 기개마저도 녹여버린다.

 

도르곤이 이런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개선곡을 울리는 팔기병이 마지막에는 다시 이자성의 전철을 밟게 될 줄은. 단지 그 과정이 좀 더 길었을 뿐이고, 고통스러웠을 뿐이다. 42일이 아니라 268년이었다. 이자성의 대순군에 침투했던 "연골증(軟骨症)"은 팔기자제들에게도 전염되었다. 이것은 만성병이 되었다. 결과는 그러나 일치한다. 무정하게 역사의 무대에서 축출당하는 것이다. 얻었던 모든 것들은, 하루아침에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그저 손가락 사이에 남은 온기와 여한만 있을 뿐이다. 후회막급이다. 팔기자제의 이 일장춘몽은 비록 꾸었던 기간이 길었지면 어쨌든 파멸할 것이었다.

 

팔기자제는 언제부터 폄하하는 말이 되었는가? 강산을 개척했던 위풍당당했던 무리가 어느새에 기생충같은 백수한량으로 바뀌었는가?

 

팔기자제는 부지불식간에 세월에 의하여 무장을 해제당했고, 전마, 갑옷을 버리고, 풍찬노숙하고 수렵하던 것을 버리고, 웅심, 장지, 호기를 모두 버렸다.

 

기(旗)가 위축된 것은 깃대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사람(人)이 쓰러진 것은 뼈가 녹아버렸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아래에서 근무하는 초소병사가 되는 것은 확실히 쉬운 일이 아니다.

 

청나라황제는 산해관을 넘어 자금성을 차지한 후, 인구가 많은 한족에 분명히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끊임없는 전쟁의 나락으로 빠질지도 모른다는 점이 겁났을 것이다. 그리하여 만주족과 한족을 분리통치한다. 내성에 원래 거주하던 한족들을 모두 외성으로 내보내고, 내성은 팔기병사로 채운다. 정황기는 덕승문안에 주둔하고, 상황기는 안정문 안에 주둔한다. 정백기는 동직문 안에 주둔하고, 상백기는 조양문안에 주둔한다. 정홍기는 서직문 안에 주둔하고, 상홍문은 부성문 안에 주둔한다. 정남기는 숭문문 안에 주둔하고, 상남기는 선무문 안에 주둔한다. 이외에 서쪽 교외에 삼대영(三大營)을 두었는데, 원명원확군영(圓明園擴軍營), 남전창화기영(藍廠火器營), 향산건예영(香山健銳營)이 그것이다.

 

내성은 생일케이크처럼, 팔기에 의하여 갈라져서 나뉘었다. 그들은 공동으로 자금성을 호위한다. 이렇게 하여 청나라황제는 편안하게 잠이 들 수 있었다.

 

내성은 실질적으로 팔기의 깃발이 나부끼고, 칼과 창이 늘어선 큰 병영으로 바뀌고, 군사화관리를 한다. 팔기자제는, 천자의 발아래에 있는 '청년근위군'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가까운 적계부대인 셈이다.

 

내성과 서교의 삼대영에는 10여만의 팔기전사가 주둔했다. 여기에 그들의 가족, 노비등은 포함되지 않았다. 천자와 물리적인 거리가 가장 가까우므로, 이들 '경기(京旗)'는 '팔기중의 팔기'가 되어, 특수한 하나의 사회계층이 되어 선천적인 우월감을 지니게 된다. 천자의 신변안전은 그들이 담당하고 있는 셈이니 어쨌든 '어전시위'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전체 북경지역에, 경기의 각 영병은 전국각지의 팔기를 모두 합친 인원의 절반 정도를 차지했다. 이를 보면 그들의 임무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다. 이같은 대규모 병력을 북경에 주둔시킨 것은 어쨌든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로 엄청나게 많은 귀족의 무리를 탄생시킨다. 모든 '팔기의 사람'들은 국가의 녹을 먹고 정기적으로 녹봉을 받는다. 이들을 모두 국가가 먹여살린 것이다. 편재된 관병들을 먹여살릴 뿐아니라, 그들의 가족까지 먹여살렸다. 여기에는 군대의 정원제한으로 놀고 있는 팔기자제들도 포함된다. 이를 보면 팔기자제는 군인이건 민간인이건, 농사도 짓지 않고, 공업에 종사하지도 않고, 상업에 종사하지도 않고, 유목에 종사하지도 않는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녹을 얻는다. 이것은 '철밥통'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그 시기에 군인이 되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권력이었다." 팔기의 법도는 "오구(五口)를 호(戶)로 하며, 호에서는 1명의 남자를 병사로 한다." 10여만의 병력을 기준으로 추산하면 경기의 총인구는 60만정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 오랜 기간동안 그저 놀고 먹었다(그것도 만한전석이니 뭐니를 먹어가면서). 아무리 부유한 나라라도 거덜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경기(京旗)'와 '기생(寄生)'은 동의어가 된다. 경기집단은 청나라말기가 되면서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방대한 기생집단이 되어버린다(방표의 말이다). 북경성에는 엄청난 무리의 기생충이 있었다.

 

국가는 먹는 것뿐만 아니라, 사는 집도 제공하고, 입는 옷도 제공했다; 집도 나눠주고, 토지도 나눠주었다. 심지어 노예까지 나눠주었다. 순치2년(1645년)에는 성지를 하나 내린 바 있는데, 그 뜻은 "입을 것도 먹을 것도 없으며, 기아에 굶주린 한족은 팔기의 아래에 노예가 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먹을 걱정도 없고, 잠잘 곳 걱정도 없고, 입을 것 걱정도 없게 된 후에, 팔기자제는 모든 신경을 노는데 쏟았다. 이들은 그저 노는 사람이었다. 집안 일은 모두 노비가 해주었다. 옷을 입을 때는 팔만 벌리면 되고, 밥을 먹을 때는 입만 벌리면 된다. 팔기자제의 관심은 자연히 "형이하(形而下)"에서 "형이상(形而上)"으로 변모한다. 생존의 기술은 전혀 알지 못하지만, 생활의 예술에는 아주 익숙해진 것이다: 금기서화(琴棋書畵), 취랍탄창(吹拉彈唱), 새장을 들고 새를 기르는 것, 경마를 하고, 개싸움을 시키는 것....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건륭55년, 4대 휘반(徽班)이 북경으로 들어온 후, 팔기자제들이 이들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국수(國粹)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가장 충성스러운 청중이었다. 자기집의 정원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들의 공연을 구경했다. 이러한 민간공연을 하려면 '발급XX표방"이라는 허가증(속칭 龍票)를 받아야 한다. 당연히 너무 지나치게 놀아서 '주화입마'한 경우도 있다. 파산한 자들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이를 보면 팔기자제들은 자신의 취미를 위하여 집안의 재산을 탕진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노사(老舍)는 팔기자제들에 대하여 입목삼푼(入木三分)의 날카로운 지적을 한 바 있다: "만청의 말기 수십년간, 기인(旗人)의 생활은 마치 한족들이 공급할 쌀을 먹고, 한족들이 바친 돈을 쓰는 외에, 하루종일 생활의 예술에 시간을 쏟아부었다. 위로는 왕후(王侯)부터 아래로는 기병(旗兵)까지, 그들은 이황(二篁), 단현(單弦), 대고(大鼓)와 시조(時調)를 했다. 그들은 물고기를 기르고, 새를 기르고, 개를 기르고, 꽃을 심고 귀뚜라미싸움을 시켰다. 그들중에 심지어 어떤 사람은 서예를 아주 잘하거나, 그림을 아주 잘그리거나, 혹은 시사를 아주 잘 지었다. 여기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상당히 유머러스한 이야기들을 몇 개씩 할 줄 알았다. 그들은 강산을 지키거나 정권을 보위할 능력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닭, 새, 물고기, 벌레들을 가지고 노는데는 능했다....우리가 현재 북경에서 볼 수 있는 자잘한 골동품들 중에서 비둘기방울, 비연호, 귀뚜라미집, 새장, 토아야(兎兒爺, 완구의 일종)등을 자세히 보면, 팔기자제들이 이런 자잘한 일에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지 알아볼 수 있다."

 

그는 동시에 "이는 아주 위대한 망국의 문화이다", "북경의 문화를 다시 눈을 들어 보면, 우리는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우리의 이런 문화로는 나같이 구차한 인간이나 나오게 할 수 있지 품속에 격정을 지닌 사나이는 나오게 할 수 없다, 나는 스스로 부끄럽다. 동시에 우리의 문화를 위하여 걱정한다. 하나의 문화가 지나치게 발달하게 되어, 감성이 마비되어 경천동지할 일이나 자극은 제켜두고, 그저 먹고마시고싸는 일들에만 온 신경을 쏟게 된다. 당연히 먼저 그 굴종적이고 수치스러운 문화를 평화를 사랑하는 문화라고 했던 것을 질책해야 한다. 그 문화는 바로 조용하고 단정한 천안문을 만들어냈고, 천안문의 앞에 적을 마주하고도 피를 흘리려고 하지 않는 청년을 만들어 냈다"라고 한탄했다.

 

노사 본인은 바로 정홍기에 속한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팔기자제중에 우수한 예술가를 많이 배출했다. 예를 들어, 납란성덕, 조설근, <<경화연>>의 이여진(李汝珍)등이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성색에 눈이 팔린 부잣집도령들이었고, 인생을 즐길 뿐이었다.

 

북경의 차관(茶館)은 팔기자제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북경의 희원(戱園)은 팔기자제들이 후원해서 유지되었다. 그러나, 팔기자제는 그 시대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식객이었다. 소비할 줄이나 알았지, 창조할 줄은 몰랐다.

 

언제부터 팔기자제들이 말을 탈 줄 모르고, 활을 쏠 줄 모르게 되고, 전투를 할 줄 모르게 되었는가? 언제부터 팔기자제들이 '피를 흘리려고 하지 않는 청년"이 되어 버렸는가? 그저 쇄국을 할 줄알고, 땅을 떼어주고 배상금을 물어줄 줄만 알고, 수치를 참으며 평화를 구걸하게 되었는가? 그들의 무릎은 더 이상 쇠처럼 단단하지 않았다. 그들의 땅, 성 내지 강산은 더 이상 쇠처럼 단단하지 않았다. 

 

집을 헐고 땅을 팔고, 집안이 파산한 후, 그들은 다시 망국의 운명을 맞이한다. 그들은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자산을 전당포에 맡기게 된다.

 

팔기자제는 확실히 특수한 문화현상이다(팔기문화). 그러나, 그들은 최종적으로 자신들이 누리던 문화에 의하여 죽어버린다. 그들은 문화의 희생물이다. 이런 문화는 그들의 무력을 약화시켰을 뿐아니라, 그들의 호연지기도 갉아먹었다.

 

"기인은 용감하게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초원민족에서 향락을 즐기고 기생생활을 하는 특권계층으로 변모했다. 그들의 강건하고 용맹스러운 민족성은 편안함을 원하고 힘든 일을 싫어하며, 퇴폐적이고 연약한 성격으로 바뀌었다. 북경일대의 기풍이 약화되는데 한 몫을 한다. 생활을 하나의 예술로 만들려면 하나의 전제가 필요하다. 즉 부유하면서 여유시간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발자크가 한 말이다. 근대의 풍속은 세 계층이 만들었다. 노동자는 바쁜 생활을, 사상가는 예술가생활을, 아무 할 일이 없는 사람은 우아한 생활을. 향락과 기생의 생활을 즐기는 많은 기인들은 상층생활문화를 전파하는 중개자가 되었다.

 

특히 청나라말기는 중국치욕사가 시작된다. 기인들은 만주, 몽고, 한군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매 기는 1명의 도통이 관할했으며, 모두 합쳐서 24명의 도통이 있었다. 이들은 북경내성의 군사, 행정지방관이다. "북경지구의 상주인구는 경기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경기는 북경성지역과 북경서교의 삼대영지구에서 이백여년을 생활했다. 한족과 기타 소수민족중 북경에서 대대로 살아온 사람들의 인구수량은 경기와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북경의 역사를 연구하려면, 경기의 지위와 영향 및 작용을 연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말하는 옛날북경(老北京) 혹은 경미문화(京味文化)는 주로 기인문화(旗人文化)를 기초로 한다. 비록 북경의 기인문화 자체는 바로 팔기자제가 '한화(漢化)"한 결과이다. 결국은 일종의 혼혈문화이다.

 

강산을 얻는데 공로가 있으므로, 팔기자제는 청나라 이백여년동안 안정적으로 세습귀족으로 살았다. 돈도 있고 시간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손쉽게 완물상지(玩物喪志)하게 되고, 조상들이 창업할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잊어버렸다. 그리하여 경기문화는 사실 일종의 기생충문화이다. 물질에서 정신까지의 기생충이다. 이렇게 하여 팔기자제의 생활능력은 날이갈수록 퇴화하였고, 언젠가 경제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대청제국이 산해관을 넘을 때의 기세를 등에 업고 강희, 옹정, 건륭의 태평성대를 거쳐, 다시 쇠퇴하였다. 질풍노도와 같던 검은 무디어지고, 녹이 슬었다. 팔기자제는 바로 이때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아마도 천하에 적수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야에 들어오는 범위내에서는 적수가 없었다. 심지어 가상의 적조차도 소멸해버렸다. 적이 없는 강자는 슬프다. 우환의식이 없는 강자는 위험하다. 세상의 생물은 어느 정도 천적이 있어야 진화하는 법이다.

 

적이 없어지니,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이 의미가 없어진다. 와신상담도 의미가 없어진다. 장성을 수리하고 함포를 만드는 것도 의미가 없어진다. 평화시기의 의장대는 그저 보기좋은 동작을 할 뿐이다. 팔기자제는 먼저 정신적으로 '제대'를 하게 된다. 당당한 무사에서 풍류를 쫓는 문관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스스로 문화인으로 자처한다. 이것만 해도 괜찮은 편이다. 어떤 경우는 방탕한 귀족자제들은 섭선을 들고, 새장을 들고 시내를 돌아다녔다.

 

건륭시절에, 기인의 빈부격차는 이미 심해진다. 팔기자제는 길거리 가게에서 가장 환영받는 손님이었다. 비취옥석, 골동서화등 집안의 가보를 내다팔았다. 빚이 많았던 자들은 심지어 몰래 집, 토지같은 부동산을 전당포에 맡기거나 팔아버렸다. 그때의 고리대금은 "인자전(印子錢)"이라고 불렀다. 국가에서 주는 돈만으로는 쓰는데 부족했던 것같다. 그저 앞당겨 쓸 수밖에 없었다. 팔기관병들은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오늘 술이 있으면 오늘 취한다는 정신으로. 이것이 팔기자제들의 생각이었다. 그들은 점점 허리를 곧게 펴고 당당하게 살 수가 없게 된다. 두 손을 소매속에 집어넣고, 목을 움츠리고, 추위를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그들은 존엄을 잃었다. 이것은 집안재산을 잃는 것보다 더욱 무서운 일이다.

 

이들 한량들이 스스로 먹고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조정은 여러번의 '이간(移墾)'운동을 벌인다. 지식청년을 농촌에 내려보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팔기자제들이 어디 황량한 북방으로 가기를 원하겠는가? 차라리 북경성에서 굶주릴 지언정, 시골에 가서 힘들게 살기를 원하지 않았다. 혹시 어떤 사람이 대박의 꿈을 꾸고 가고싶어하더라도, 그런 고생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오곡을 제대로 구분할 줄도 모르는데, 어떻게 농사를 짓겠는가?). 그리하여 빈손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계속 구호물자에 의지하여 생활한다. 다행히 황제가 자신의 적계가 굶어죽는 것을 눈뜨고 그냥 놔두지는 않았다.

 

팔기자제는 철밥통을 먹고 사는데 익숙해 있었다. 이미 스스로 밥을 지어먹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너무 오래 길들여진 애완동물처럼, 이미 야성을 상실한 것이다. 이것은 놀면서 세월을 보낸 유한계층이고, 매일 어떻게 생활해야 더 즐거울지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일찌기 말을 타고 전국을 누비던 대청왕조의 팔기들은 어느새 생활능력이 없고 게으르며 놀기좋아하는 무리로 변신했다. 그저 노는데에만 온 정신을 쏟았다. 팔기자제는 아주 폄하하는 단어가 되어버린다. 혈통은 사람을 만들기도 하지만 사람을 망치기도 하는 것같다. 이들은 봉건시대의 패가망신한 자들이다.

 

적이 멀리 지평선 너머에 나타나자, 팔기자제는 이미 싸울 힘을 잃었다. 1860년, 영국프랑스 연합군, 1900년 팔국연합군은 모두 가볍게 북경성을 함락시킨다. 일찌감치 칼과 창을 들고 북경성을 차지했던 팔기의 용맹한 병사들이 다시 뭉쳤지만 일패도지한다. 더더욱 믿기 어려운 점은 누르하치시대의 기풍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 팔기가 그 팔기인가? 그들은 군사적으로 외교적으로 패배했을 뿐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패배했다. 그들은 적들이 어디에나 있고, 언제나 있고, 자신은 약하기 그지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귀를 누리던 조용한 곳이 졸지에 피바람이 몰아치는 전쟁터로 바뀌었다. 팔기자제의 마음은 아직도 새를 기르고, 창극을 구경하고, 경마를 하고, 귀뚜라미싸움을 하는데 가 있었다. 밀려오는 강력한 함대의 앞에서 이들은 '소아과'수준이었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집안을 망친 팔기자제는 자신의 땅조차도 지키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나라를 지키겠는가? 당연히 그들이 전당잡히고 팔아먹은 것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부동산(속칭 吃瓦片)이다. 그런데, 황제와 태후의 씀씀이는 더욱 컸다. 걸핏하면 대만, 홍콩, 마카오 같은 것을을 할양해주었다. 누군가 이렇게 말하는게 이상할 것도 없다: 식민주의자들의 사신이 청나라조정의 '태상황'이다. 소위 남경조약, 신축조약같은 것들은 모두 구차하게 연명하기 위하여 며칠의 평화를 얻은 것이다.

 

청나라황제가 퇴위한 후, 애신각라씨의 북경에 대한 통치는 끝이 난다. 경기도 해체된다. 이제는 황제 자신이 파산한다. 위로는 황제부터 아래로는 팔기자제까지 모조리 파락호가 된다.

 

팔기자제는 우리가 요즘 얘기하는 '고관자제"와 비슷하다. 스스로 혈통이 순수하다고 믿고 좋은 출신이므로, 편안하고 우월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망한 나라의 귀족자제이지만, 여전히 나쁜 근성을 버리지 못했다. 천자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천자의 발아래에서 살아왔다. 이런 우월감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 물질적인 유산을 다 먹고 난 후에 다시 정신적인 유산을 먹어치운다.

 

북경은 아Q가 성장하기 좋은 토양을 지니고 있다. 아Q는 스스로 예전에는 잘 살았다고 한다. 팔기자제의 정신적인 면은 아Q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 않다. 몇세대 이전의 부귀영화를 가지고 자랑해 마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하더라도 소박하게 살 수는 없다. "당초의 팔기자제는 그들 조상의 영광을 가지고, 그들 문벌의 광채를 가지고, 재산과 시간에 의지하여 정교하고 우아한 놀이를 즐겼다. 이것은 돈있는 사람들의 놀이이다. 그들이 금으로 쌓아올린 집에 기왓장 하나 남지 않게 되었을 때, 그들은 여전히 예전의 교만함을 버리지 못한다. 여전히 가소로운 존엄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새를 기르고, 차를 마시고, 창극을 보고, 골동을 만지는 것이다. 예전처럼 호화사치는 조금 줄고, 구차함이 조금 늘었을 뿐이다. 이것은 돈이 없어진 이후에 가난한 사람의 놀이였다."

 

기인문화는 귀족계층에서만 유행한 것이 아니라. 북경의 시정에는 뿌리깊게 박혀 있다. 그리하여 전체 도시의 성격을 결정했다. "민국"전후로 기인생활은 급변한다. 대량의 기인은 도시빈민으로 전락한다. 이는 문화의 혼합현상을 더욱 가속화 시켰다. "여유롭고 게으르며, 유머를 즐기는 성격, 꽃,새,물고기,벌레, 희곡 서화에 대한 취미, 차를 마시는 습관, 체면을 중시하고, 예절이 복잡한 것등등은 모두 북경사람들의 인격과 생활에 깊이 스며들었다."

 

팔기자제의 기풍은 일종의 시공을 초월한 전염병이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일부 토착주민들의 행동거지에서 팔기자제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필자는 그들의 편집적이고 오만한 심리를 "팔기자제후유중"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들의 생활은 이미 현대문명사회에 들어섰고, 하이테크시대에 접어들었는데, 어떤 사상은 아직도 청나라때에 머물러 있다. 봉건시대의 마지막 왕조에 머물러 있다. 그들은 전문 바깥의 차관으로 가지 않고 산리툰의 술집으로 간다. 경극을 듣지 않고, 미국의 대작영화를 본다. 팔대후통을 돌아다니지 않고, 카라오케로 간다. 만한전석을 먹지 않고 해산물을 먹는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을 "신기인(新旗人)"이라고 명명했다.

 

팔기자제의 음혼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것같다. 언제든지 다시 권토중래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팔기자제는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대역을 찾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