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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분석

중국은 명말청초에 비로소 서방이 뒤쳐졌는가?

by 중은우시 2009. 10. 12.

위금계(衛金桂)

 

"명말청초에 중국은 서방에 뒤쳐지기 시작했다" 중국의 교과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은 중국이 아편전쟁에 패배한 후에 서방에 뒤떨어졌다고 생각한다. 가장 통상적인 비교기준인 정치, 경제, 문화의 발전정도를 비교하면, 이렇게 결론을 내리는 것은 스스로를 위안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치적으로 보자면, 서방국가는 르네상스이후, 로마법이 서방법치사회의 기초를 닦았다. 이때는 중국의 명나라시기에 해당한다. 서방의 변호사 지위와 역할은 급속히 상승했고, 중국인들이 대대로 오매불망하였지만, 항상 농락당했던, "왕의 아들이 법을 어기더라도, 백성과 같이 죄를 받는다"는 이상은 "국왕이 법을 어기더라도, 백성과 같이 죄를 받는다"는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영국혁명후 변호사 쿠크는 확실한 증거를 거지고 찰스1세를 단두대로 보내는 쾌거를 이룩한다. 바로 당시 영국의 민주와 법제가 어느 정도로 발전하였는지 알 수 있는 방증이다. 신흥 자산계급의 크롬웰은 왕실과 대항하여 승리를 취득한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영국인들의 당시 법제와 민주의식을 알아볼 수 있는 사건이다. 그러나, 이때 중국은 황권신성, 중농억상, 군권신수의 관념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영국혁명과 같은 시기에 이자성의 난이 일어난다. 옛황제가 목을 매어죽는다. 이자성은 자신의 목숨이 날아가더라도 용상에 올라보는 즐거움을 누린 후에 죽었다. 중국인들이 군권신수의 사상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영국인들은 법률의 이름으로 국왕을 단두대에 보냈다. 이러한 서로 다른 선택은 사회변혁의 차이를 반영한다.

 

경제적으로 보자면, 10세기에서 12세기에 서구의 주요국가가 형성되었다. 지금의 아펜니노반도의 메디치가족 코시모의 통치시기(1434-1464) 및 나중의 로렌조 통치시기(1469-1492)에 플로렌스에는 사상유례없는 경제와 문화의 번영을 이룩한다. 그리하여 '암흑'의 중세기 유럽에 하나의 등불이 된다. 이를 전후하여, 네덜란드, 스페인등이 강성해져서 해적과 해상패권이 흥성한다. 해외식민지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거의 적수가 없었다. 포르투갈은 중국의 마카오를 점령한다. 중국은 이를 '해적식의 사기'라고 하지만, 이런 사기와 약탈식의 침략은 바로 그들의 당시 항해기술과 강대한 해외식민지의 역량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전세계를 상대로 식민지를 경영하지 못했을 것이다. 후기의 영국 프랑스 등 국가가 형성된 후, 신속히 동남유럽의 경제문화성과를 흡수하고, 근대정치혁명과 경제혁명을 완성하고, 전세계로 세력을 확장한다. 낙후한 중국은 아편전쟁에서 부딛치자마자 궤멸하였는데, 결코 우연만은 아니다.

 

문화적으로 보자면, 고대그리스와 고대로마는 법률, 수학, 민주사상, 천문학등의 측면에서 큰 성과를 거둔다. 로마의 법률과 법학은 고대세계의 최고봉이었다. 그리고 근대구미국가의 법률에 기초가 된다. 서구의 암흑시대에도, 대학교육은 중국봉건시대 태평성대보다도 훨씬 큰 성과를 거두었다. 몇가지 이 시기에 건립된 세계랭킹100위이내의 대학들을 봐도 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1096년에 옥스포드대학 건립; 1209년 옥스포드학생들이 반기를 들고, 일부 교수 학생들이 캠브리지대학을 건립; 1386년 독일 하이델베르그대학 건립; 1425년 벨기에 루벤대학 걸립; 1575년 네덜란드 라이든대학 건립; 1087년 이탈리아 볼로냐대학 건립; 1472년 독일의 뮌헨대학 건립; 1365년 오스트리아 비엔나대학 건립; 1479년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건립; 1218년 스페인 살라만카대학 건립. 교육을 생명으로 여기는 사상이 널리 받아들여졌고, 영국의 청교도들도 미국으로 옮겨간 후, 서적과 돈을 내놓아서 1636년 하버드대학을 건립한다. 이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르네상스시기에 서구의 자산계급은 고대그리스 철학자 프로타고라스의 명언인 '사람이 일체의 사물을 형량하는 척도이다'라는 말을 한 후,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에서 큰 성과를 거둔 원인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왜 유럽에서 일련의 학술과 예술의 대가들이 나왔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문화적인 변혁으로 근대정치와 경제의 변혁을 가져와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된다.

 

이를 보면, 명말청초이전에, 중국은 일찌감치 서방에 뒤쳐졌다. 더욱 객관적으로 말한다면, 서방과 중국의 선진과 낙후는 원래 아무런 의미도 없다. 왜냐하면, 고대그리스나 고대로마는 문화적으로는 서방문화의 기원이지만, 이 두 국가가 서방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고대로마와 고대그리스시대에 서방의 일부지역은 아직 국가가 형성되지도 않았다. 역사를 추적할 수도 없다. 더더구나 중국과 선진, 낙후를 비교할 수조차 없다. 유럽근대국가의 형성이후, 직접 고대그리스, 고대로마의 문화성과를 흡수하여, 르네상스의 봄바람을 맞으며, 처음부터 중국을 앞서갔던 것이다. 즉, 서방의 주요한 국가는 그때부터 형성되었고, 중국은 그때부터 뒤떨어졌다.

 

소위 중국이 고대에 세계에서 선진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냥 혼자서 운동장에서 뛰는 것과 같다. 빠르던 느리던 무조건 1등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