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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분석

황제의 고독과 비애

by 중은우시 2009. 11. 16.

글: 장척곤(庄滌坤)

 

양결(楊潔)이 주연한 TV 드라마 <<서유기>>는 봤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승은(吳承恩)의 <<서유기>>는 읽어보지 못했을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당승(唐僧)에 대한 이해는 바로 TV드라마에서의 모습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만일 드라마영화작품중에서 당승이라는 인물의 포지셔닝에 대하여 오승은의 원작에 가장 가까운 것이 주성치(周星馳)의 <<대화서유>>라고 한다면, 당신은 아마도 놀랄지 모르겠다. 최근에 청나라말기의 후궁들의 사진 몇 장을 보았다. 바로 나는 <<대내밀탐영영팔>>에 나오는 후궁들의 '꽃처럼 예쁜 한 무리의 여인'들을 떠올렸다. 진상은 왕왕 민간의 상상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황제"라는 지위는 건국후에는 제국의 권력을 장악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을 뿐아니라, 제국의 흥망성쇠이든 민단의 착취이든 모두 그 황제와 관계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소위 황제는 그저 무대위에 올려진 원숭이나 같다. 그의 지고무상의 권력은 실제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권(無權)이다. 그는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뭐든 할 수가 없다.

 

먼저, 황제는 미녀는 몇명 만나지도 못한다. 황자(皇子)로 지내는 동안 이들 제국의 권력의 희생자인 황자들은 권신(權臣)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서, 그들의 사위역할을 하게 된다. 황제위에 오른 후에는 중점감시대상이 되어서, 혹시 황궁내에 굴러들어온 미녀의 손이라도 잡을라치면, 다음 날 그 미녀의 손은 접시에 담겨져서 황제에게 바쳐진다.

 

황제는 고독하고 적막하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친히 나서서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실권이라고는 조금도 없게 된다. 인사관리도 할 수가 없고, 심지어 자기가 마음에 둔 사람을 발탁할 수도 없다. 그리하여 소인들에게 눈이 가린 멍청한 임금이라는 평을 듣게 되는 것이다. 계속되는 아부와 떠받듬 속에서 아무런 진심도 발견할 수 없다; 생사여탈권이 아무런 감독도 받지 않기 때문에, 진정으로 군주에 충성하는 자를 찾아보기 힘들다.

 

첫번째 관문은 바로 황자들간의 투쟁이다. 아무리 해명해도 소용이 없다. 그들은 반드시 형제간에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에 끼어들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귀를 찾아서 자신에게 모여들어 꼬리를 흔드는 사람들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들 추종자들이 자신의 몸에 황제의 용포를 걸쳐주더라도 이를 통제할 수가 없다. 그들은 자신의 '수하'들이 자기의 부친이나 형제를 죽이더라도 이를 저지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모두 그 자신의 명의로 진행된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이 그들의 '충성'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난자 1개를 놓고 다투는 정자들처럼, 더욱 적극적으로 부친을 시해하고 형제를 죽이는 사업으로 뛰어들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전투과정에서, 그들이 누구를 의지할 수 있을까? 부친을 의지할 수도 없다. 형제를 의지할 수도 없다. 그저 자신의 부친과 동상이몽인 모친과 처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 모계와 처계의 실력은 그들이 성공하는 관건이 된다. 소위 "태자"는 그저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지혜가 아무리 많더라도, 혼자만의 힘으로는 큰 역량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1차전투가 끝난 다음에는 바로 제2차전투에 부닥친다. 그것은 바로 모계와 처계의 결투이다. 만일 업적을 남기고 싶어하는 황제라면, 여기에 자신의 직계인물들까지 가담하여 3자간 전투가 이루어진다. 우리가 중국역사에서 보아온 것은, 아무리 강대한 제왕이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호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들의 모친, 그들의 여인, 그들의 총신, 그들의 자녀들이 왕왕 멸문지화를 당하는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의 이치라고 얘기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처음부터 그들은 누구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들은 그저 권력의 무대위에서 공연을 펼치는 원숭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비록 자신의 직계집단이 황태후와 보정대신에게 승리하여, 황제가 실권을 장악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들은 다시 세번째 전투를 치러야 한다. 자신의 아부집단과의 싸움이다. 황제가 존재하여야 하는 필요성은 무엇인가? 국가의 상징 이외에 중재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람이 있는 곳에는 좌파 우파 중간파가 있고, 투쟁이 있다. 한 집단이 승리한 후에는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난다. 하나의 결과는 집단내부의 균형을 이루는 정신적이 지도자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자가 제후들을 부리는 것으로, 실제로는 천자는 문서에 서명하는 기능밖에 없다. 또 다른 결과는 집단의 분열로, 새로운 투쟁에 접어드는 것이다. 황제의 의미는 균형을 맞추는데 있다. 두 개 혹은 수 개의 집단간의 세력균형을 맞춰주는 것이다. 이때, 시비는 문제되지 않고, 잘못 죽이는 일도 일어나기 시작하면, 황제는 타협적이고 멍청하며, 제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걸림돌이 된다. 그가 무엇을 하더라도, 반드시 악명을 얻게 되어 있다. 중국인들은 어려운 때 함께할 수는 있지만, 복을 같이 누릴 수 있는 자들은 드물다. 반드시 부패하고 반드시 패도적이 된다. 황제로서 수하를 제약하면 망당(亡黨)이 되어, 자기의 손으로 자기가 만든 집단을 없애버리게 된다. 제약하지 않으면 망국(亡國)의 결과가 나타난다. 아무도 최저선이 어디인지를 모른다. 그래서 성공에는 반드시 멸망의 씨가 함께 뿌려지는 것이다.

 

비록 정치적 권모술수가 뛰어난 황제라고 하더라도 다시 네번째 전투를 맞이하게 된다. 이는 후궁관계를 잘 처리하는 것이다. 다행히 자신의 후대를 둘 수 있게 된 경우에도, 그는 다시 한편으로는 아들들간에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목도해야 하고, 자신이 중재자로 역할을 해야 한다. 만일 그중 하나가 승리하는 것을 목도한다면, 다시 자신과 천하를 놓고 자웅을 겨뤄야 한다. 새로운 임금의 아부집단은 반드시 옛황제의 직계부대를 제거하게 된다. 이는 어떤 경우에는 옛황제가 스스로 그러기를 원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마음을 써가면서, 이미 자신의 직계인물들을 다루는데 싫증을 느꼈을 수도 있다. 없앨려면 없애라는 심정이 될 수도 있다.

 

이는 사실 황제만의 비애는 아니다. 모든 지도자들이 모두 직면하는 문제이다. 소유한다는 것은 그리하여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