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양려광(楊黎光)
중국이라는 극도로 안정된 사회는 실제로 주로 두 가지 체계가 지탱해주었다. 하나는 권력체계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체계이다. 이 두 체계는 동중서(董仲舒)가 "삼강오륜"이라고 정리했다. '삼강'은 권력체계이며, 동시에 윤리체계이다. 그러나 이는 주로 권력의 강박성과 절대성을 드러낸다. 군(君)은 신(臣)에 대하여 절대권력을 가지고(여기에는 신 혹은 관이 민에 대하여 절대권력을 가지는 것도 내포하고 있다), 부(父)는 자(子)에 대하여 절대권력을 가지고, 부(夫)는 처(妻)에 대하여 절대권력을 가진다. "오륜"은 권력체계에 빌붙은 윤리체계이다. 그것은 도덕으로 사람의 사상과 행위를 통제하는 것이다. 나아가 잠재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윤리도덕을 준수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런 권력,윤리의 이중체계를 통하여, 중국인들은 기본적으로 일망타진되었다. 그러나, 백밀일소(百密一疎)라고 "상인"은 사실상의 예외로 된다. 중국전통사회에서 상인은 시종일관 특수한 사회계층이었다.
명말청초의 학자인 고염무가 <<일지록>>에서 고증한 바에 따르면, "사, 농, 공, 상을 사민(四民)이라고 부른 것은 관자(관중)에게서 시작한다." <<국어.제어>>의 기록에 따르면, 관중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민은 서로 섞여있게 하면 안된다. 섞여서 살면 그 말이 혼란해진다." 이를 보면, 당시의 권력자들은 상인을 사민의 끝자리에 놓았을 뿐아니라, 그들을 엄격하게 제한하려고 시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상 이러한 포지셔닝 자체가 심각한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춘추전국시대에 군주들은 모두 상인이 국가를 부강하게 하는데 유리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서로 앞다투어 불러모았다. 이리하여 상인들은 모두 왕의 시장에 숨어있고자 했다" 상인을 사민의 끝자리에 놓았던 관중도 소금의 이익을 가지고 제나라의 경제를 번영시킨다. 그리하여 제환공으로 하여금 천하쟁패에 가담할 실력을 갖추게 한다. 아마도, 관중이 상인을 잘 이해했기 때문에, 상인의 이해(利害)를 분명히 알았던 것같다.
중국에서 '이'와 '해'는 항상 함께 연결되어 있다. 통치자들은 상인의 '이'를 알았지만, 상인의 '해'도 잘 알았다. 공자의 제자인 자공은 성공적인 상인이었다. 사마천은 일찌기 이렇게 쓴 바 있다: "자공은 말 네마리를 묶은 마차를 가지고, 비단을 묶어서 선물로 가지고 가서 제후들로부터 좋은 대접을 받았다. 그가 가는 곳이면 각국의 제후들이 그에 대하여 대등한 예의로 맞이했다(分庭抗禮)." 사마천은 또 이렇게 말했다: "무릇 공자의 이름을 천하에 널리 알린 자는 자공이다. 이것은 바로 재물을 가지고 공자의 명성을 널리 떨치게 만든 것이다"
중국정치문화가 맹아단계에 있던 고대사회에, 상인은 통치자들에게 골치거리인 집단이었다. 어떤 군주도 대등한 예의로 맞이하고자 하지 않는다. 더더구나 상인들이 자신의 재물을 가지고 세력을 형성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우려한다. 상인들이 부를 가지고 권력을 핵심으로 하는 사회등급질서를 위협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상인들은 반드시 '천상(賤商)'이 되어야 했다. 반드시 권력과 윤리체계의 주변으로 배척되어야 했다. 사농공상, 사민의 끝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바로 그들의 정치권력에서의 주변화를 의미한다. 돈 한푼을 가지고 다투고, 간사하지 않은 상인이 없다. 이것은 바로 도덕윤리에서의 주변화를 의미한다.
왜곡된 역사환경은 기형적이고 정신적인 지주가 결핍된 중국상인을 길러냈다. 그리하여 그들은 멸시할 수도, 선양할 수도 있고, 면모가 모호한 특이한 부류가 되어버린다.
상인은 요즘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현대한어사전>>에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상품을 판매하면서 그 중에서 이익을 취하는 사람" 이것은 포폄이 포함되지 않은 중성적이고 객관적인 신분뮤사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지 않았다. "상인"이라는 글자는 탄생하는 때부터, 사실 정치적인 차별적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문사계(文史界)에서 공인된 관점은 상인은 일종의 직업칭호가 된 것은 주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킨 이후라는 것이다. 주공은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은상족들의 정치간여를 금지했다. 단지 장사만 할 수 있도록 했다. "상인(商人)"이라는 명칭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고힐강 선생은 일찌기 이렇게 분석한 바 있다: '상인(商人, 상족)은 많은 전답을 가지고 있어도 정치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멍청한 자는 농사를 지었지만, 뛰어난 자는 보수적인데 만족하지 않고, 장사를 했다. 그리고 그 재력을 가지고 정권과 항쟁할 수 있었다. 이 상인들은 장사를 하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장삿꾼을 '상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즉, 상인이라는 것은 '한 왕조의 사람의 이름을 가지고 한 무리의 사람을 통칭하는 명칭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주나라 사람들이 '상인'을 차별하는 선례를 만들었다 .이후 각 왕조에서는 속속 이를 모방하여, 상인에 대하여 각종 제한을 가한다.
<<사기.평준서>>에는 "(한나라 초기)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다. 한고조는 장삿꾼들이 비단마차를 탈 수 없게 하고, 세금을 중과하여 그들을 곤욕(困辱)스럽게 했다. 효혜(孝惠), 고후(高后)때, 천하가 안정되자 다시 장삿꾼들에 대한 규제를 느슨하게 한다. 그러나 시정의 자손은 관리가 될 수 없게 하였다" 사마천의 이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한나라때도 상인들이 정치에 종사할 수 없게 하는 구관례를 그대로 답습했다는 것을, 그리고 비단마차를 탈 수도 없었다. 이때부터 자공처럼 네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군주를 만나서 평등한 예로 대하는 시절은 다시 오지 않는다. 이것은 '욕(辱)'이다. 그보다 심각한 것은 '중과세'의 억상정책이다. 이것은 '곤(困)'이다.
수문제 개황16년(596년)에도 조서를 내려서 '공상(工商)'은 벼슬길에 나갈 수 없다고 규정한 바 있다. 당나라때의 제도에서도 '공상잡류(工商雜類)'는 벼슬을 할 수 없었다. '선거령'에 따르면, 공상은 벼슬길에 나갈 수 없고, 이미 벼슬길에 나선 관리와 동거하는 진척도 공상업에 종사할 수 없었다. 송나라때에는 '공상이류(工商異類)'는 상복을 벗지 않은 자, 승려 도사로서 환속한 자와 마찬가지로모두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공상이류'라는 칭호만 보더라도 차별과 편견을 가득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역사상, 상인처럼 이토록 장기적이고 조직적으로 정치적인 탄압을 받은 계층이 없다. 이런 탄압은 본질적으로 사회규율에 어긋난다. 현실생활과도 모순된다. 일찌기 한나라초기에, 저명한 정치가인 조착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지금 법률이 상인을 천하게 여기는데, 상인은 이미 부귀해졌다; 농부를 귀하게 여기는데, 농부는 이미 빈천해졌다. 그러므로 세속에서 귀하게 생각하는 것을 군주가 천하게 여기고 있다"(한서.식화지). 이런 현실생활과 권력,윤리체계간의 충돌은 파괴성을 지니고 있다. "돈이 있으면 귀신도 부린다" "빈천한 부부는 모든 일이 슬프다" 백성들은 자신의 행활경험을 가지고 권력,윤리체계의 허위성과 사기성을 꿰뚫어 보았다. 그리하여, 비록 정통언어체계에서는 장사를 하고 매매를 하는 것이 경시되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이 누구나 장사를 좋아했고, 장사를 잘했다. 농부나 촌부들도 시시때때로 ㅈ짐을 지고 시장에 나가서 장사를 했고, 정상적인 수입 이외의 가욋돈을 벌었다. 모든 백성이 장사를 하는데도 공식적인 역사가들은 인정하지 않는 일종의 민족전통이 나타난다.
명청왕조에 이르러, 공상업의 번영과 연납제도의 출현으로, 상인이 벼슬을 하는데 여러가지 변통적이고 느슨한 방법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정부가 주도하는 사농공상 사회의 분화에 근본적인 동요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역사적인 주변화로 중국상인은 시종 자신의 특유한 직업정신이나 도덕규범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대대로 연이어 성공한 상인들은 모두 '졸부'의 심리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명청시대의 각 대형 상방은 적극적으로 전통적인 윤리체계에 의탁하려고 시도한 바 있고, 스스로 '유상(儒商)'이라고 자처하며, '신의'를 표방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들이 의탁한 주요목표는 여전히 권력체계였다.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연반(捐班)'이든, 관상결탁으로 보호를 추구하는 것이든, 그들은 시종 권력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동일한 시기의 영국에서 상인과 국왕의 관계는 이미 평등한 계약관계가 된다. 중국의 상인은 시종 다른 사람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종속적인 지위를 지니고 있었다.
어찌되었건, 관중이 수천년전에 발견한 것처럼, 상인은 전제정권과 천성적으로 충돌하기 마련이다. 중국의 역대통치자들의 중농억상의 역사는 정치경제의 전면적인 정체를 가져왔을 뿐아니라, 중국의 현대화발전을 철저히 막았다. 그리고 사회윤리체계의 점진적인 붕괴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전제정치는 '상인을 천시하지만, 상인은 이미 부귀해지고, 농민을 중시하지만 농민은 이미 빈천해지는' 현실적인 모순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배경과 현실환경하에서, 중국의 상인은 아마도 졸부의 기쁨은 누릴 수 있지만, 이런 직업이 가져다주는 영광과 쾌락은 느끼기가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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